발제에 앞서 +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글을 쓰고 있을 때면 이곳에 쓰는 글의 내용이 조금은 달라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요즘이 그렇다. 오늘 오후에 있을 발제를 앞두고 발제문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부터 초고를 준비해서 화요일부터 쓰고 있다.

재미있는 징크스 중 하나는 루인이 발제하는 날이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유난히 적게 참가한다는 것. 아님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세미나가 취소되기도 한다. 상처받았다는 얘기다. 소심한 루인. 그래서 지난주엔 아예, 발제문이 부실할 예정이니 안 와도 될 것 같아요, 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에도 불안하다. 사람이 적으면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속상하기 때문이다.

루인은 글쓰는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학부시절 소논문이라도 낼라치면 길면 한 달에서 적어도 보름은 준비해야만 쓸 수 있었다. 물론 최소한의 초고는 제출마감에서 늦어도 사나흘 전에는 나와야 하고. 끊임없이 수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항상 불만족 상태로 제출했다. 발제문이라고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준비하는지 모르겠지만, 루인이 발제자가 되면 세미나가 끝난 시점에서부터 다음 세미나가 시작하는 일주일을 고스란히 발제문에 투자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좋은 발제문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나마 영악해져서 주말부터 시작하는 편이긴 하지만(세미나 하는 날이 목요일이기에 가능하다) 그래도 일주일 내내 신경 쓰인다. 그래서 때론, 전날 밤새서 발제문을 썼다는 얘길 들으면 너무도 부러워한다. 루인으로선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길 바라지 않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다고 반드시 좋은 세미나가 되는 건 아니지만, 루인이 좋은 사회자/세미나 진행자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많은 얘기를 해줬으면 하는 것이 진짜 바람이다. 내용을 자세히 읽고 빨간 줄 긋고, 많은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루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약간의 불안과 긴장으로 남은 시간을 기다린다.

[#M_ +.. | -.. | 발제문은 주말 즈음 이랑에 올릴 예정이네요._M#]

[#M_ ++.. | -.. | 양말 샀다. 우히히. 어제 돌아오는 길에 또 팔고 있었다. 신나게 골랐다. 이히히._M#]

돈, 눈,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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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세탁기를 주문하고 돈이 남았다. 간신히 맞춘 금액이었는데, 10% 할인쿠폰이 생겨서 그 만큼의 금액이 올앳카드에 남았다. 무얼 할까 한참을 갈등하다가 책을 사기로 했다. 그래서 어제, 바쁜 와중에도 신나는 몸으로 교보에 들렀다. 계획한 책을 사고 계산대로 가는 순간, 아하하, 카드를 안 챙긴 것이다. 바보바보바보. 순간 아찔함에 멍해졌다. 그렇잖아도 현금이 부족한데 안 산다고 할 수도 없어 그냥 샀다. (흑, 찾아야 할 제본 책이 한 권에, 할 예정인 책이 네 권인데ㅠ_ㅠ 아, 루인이 책을 읽는 습관 때문에 출판사 판본과는 별도로 제본할 수밖에 없는 책이 있다.)

이 안타까움은 여이연 강좌를 듣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발생했다. 양말이 11켤레 4,000원에 파는데, 엉엉, 지갑에 4,000원이 없었다. 양말 사고 싶었는데. 잉잉잉. 정말 순간적으로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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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이연 강좌를 듣고 나오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주디스 버틀러 강좌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리티와도 관련 있는 내용으로, 신난 몸으로 듣고 나오는데 눈이라니. 너무 좋아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미는데, 아콩, 눈이 눈으로 들어가 질끔 눈을 감았다.

같이 있던 분의 표현처럼, 뭐랄까,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 겨울 들어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날 밖에서 눈을 맞고 있기도 처음이었다. 어디선가 캐롤이라도 들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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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고 혼자 남아, 지하철을 갈아타는 길에 귀에선 [푸른새벽]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감고 걸으며 유리遊離했다.

음악을 듣고 있을 때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자주, 세상과 유리하는 상태에 빠진다. 마치 영화에서 차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가는 장면처럼 루인 밖의 세상은 유리창 너머의 다른 세상인 듯한 느낌. 루인은 길에서 듣는 음악을 O.S.T.라고 부르곤 하는데, 유리창을 통해 세상과 괴리를 느끼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느끼면서 그 장면에 빠져들어 바라보는 관객의 느낌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이대로 증발하고 싶은 유혹/충동에 빠진다.

본다는 건 단지 많은 경험 중의 일부일 뿐이다

한동안 “보다”란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곳에도 관련 글을 몇 번 적었듯이, “보다”란 말은 시각’장애’인을 배제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시각 경험만을 정상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끼다, 닿다, 접하다 등의 단어로 바꾸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른바 3대 감각이라고 불리는 감각 중 하나(이름을 까먹었다-_-;;)가 없으면 자신의 몸을 보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왼쪽 손으로 물건을 잡기 위해서는 눈으로 왼쪽 손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계속 보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손은 다른 곳에 가 있곤 한다. 이런 몸의 경험에서 본다는 것은 때로 “아는” 것이다.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니까.

또 어떤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런 경험들을 의학에선 병리 현상으로 간주하겠지만, 이건 병리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이라는 몸의 경험이 실은 많은 감각 경험 중 일부일 뿐임을 의미한다. 느낀다는 것이, 본다는 것이 그렇게 당연한 일이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같은 내용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요즘은 “보다”란 말을 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 경험을 어떻게 특정 경험의 문제로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보다”란 언어를 쓰지 않는 것은 보지 않으면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의 경험을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보다”란 시각 경험을 중심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각 경험을 단지 여러 가지의 감각 경험 중 일부로 상대화해야지 않을까. 시각 경험에 너무 익숙한 사람에겐 시각 경험이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이른바 시각 ‘장애’인 보다 “우월”한 경험이 아니며, 시각 경험이라고 해도 그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일테면 색깔에 관해서도 사람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걸 듣곤 하는데 이는 어떤 색깔을 동일한 식으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미지 난독증이 있고 색에 대한 감각이 무딘 편인 루인에게(신경 쓰지 않으면 색깔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보다”라는 시각 경험은 평생 안고 갈 고민/자원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