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건 단지 많은 경험 중의 일부일 뿐이다

한동안 “보다”란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곳에도 관련 글을 몇 번 적었듯이, “보다”란 말은 시각’장애’인을 배제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시각 경험만을 정상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끼다, 닿다, 접하다 등의 단어로 바꾸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른바 3대 감각이라고 불리는 감각 중 하나(이름을 까먹었다-_-;;)가 없으면 자신의 몸을 보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왼쪽 손으로 물건을 잡기 위해서는 눈으로 왼쪽 손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계속 보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손은 다른 곳에 가 있곤 한다. 이런 몸의 경험에서 본다는 것은 때로 “아는” 것이다.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니까.

또 어떤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런 경험들을 의학에선 병리 현상으로 간주하겠지만, 이건 병리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이라는 몸의 경험이 실은 많은 감각 경험 중 일부일 뿐임을 의미한다. 느낀다는 것이, 본다는 것이 그렇게 당연한 일이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같은 내용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요즘은 “보다”란 말을 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 경험을 어떻게 특정 경험의 문제로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보다”란 언어를 쓰지 않는 것은 보지 않으면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의 경험을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보다”란 시각 경험을 중심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각 경험을 단지 여러 가지의 감각 경험 중 일부로 상대화해야지 않을까. 시각 경험에 너무 익숙한 사람에겐 시각 경험이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이른바 시각 ‘장애’인 보다 “우월”한 경험이 아니며, 시각 경험이라고 해도 그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일테면 색깔에 관해서도 사람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걸 듣곤 하는데 이는 어떤 색깔을 동일한 식으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미지 난독증이 있고 색에 대한 감각이 무딘 편인 루인에게(신경 쓰지 않으면 색깔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보다”라는 시각 경험은 평생 안고 갈 고민/자원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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