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 페미니즘, 모색하며 1/4
루인과 J.uz
[#M_ 읽기.. | 관두기-_-;; 크크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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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라는 주제를 접하고, 별 갈등 없이 채식/채식주의에 대해 써야지, 했다. 이 ‘갈등 없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과 접하는 경계 중 하나인 채식 경험을 별 갈등 없이 쓰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이 글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익숙한 일이기에 갈등이 없었을까, 종종 써온 주제이기에 갈등이 없었을까. 채식 경험이 한국사회에서의 계급, 지역, 집단/인종주의, 젠더, 나이, 학벌, ‘장애’/비‘장애’, 섹스/섹슈얼리티 등등의 다양한 지점들과 동시에 작동하는 문제임을 쓴 적이 있기에, 이번 글쓰기는 쉬우리라, 짐작했다. 더욱이 앞으로 쓸 내용들은, 그간 접해온 사람들 중 일부는 상당히 자주 들었을 테고 블로그를 통해서도 몇 번인가 쓴 적이 있기에 금방 쓰겠거니 했다. 하지만 개요를 쓰고 한 달여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초고를 썼고 그 초고를 방치하며 몇 달이 지난 지금에야 다시 이 주제를 붙잡는다. (함께 채식주의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는 나무님, 고마워요.)
작년, 대학원 입학 원서를 준비 하며 생애사를 써야 했다. 젠더로 읽는 생애사라. 대학에서 여성학 수업을 들은 경험이 있다면 낯설지 않은 주제일 것이다. 루인처럼 여성학 전공자라면 서 너 번씩 쓴 적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학 대학원이 요구했던 생애사 쓰기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아, 이번에도 쓰는구나. 하지만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한 친구는 예전에 썼던 글을 내라고 ‘위로’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루인은 삶을 한 순간도 정리할 수 없(었)고 매번 다른 언어로 구성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새로운 언어를 통해 계속해서 재구성하고 잊혀진 부분을 ‘발굴’하거나 때로 ‘창조/발명’하기도 한다. 예전에 썼던 생애사는 당시의 언어로 구성한 글이기에 지금의 루인에겐 ‘거짓’이기도 하다. 더구나 젠더라니. 루인의 삶에서 가장 불편하게 다가오는 경계가 젠더이고 젠더 자체를 문제시 하며 조금은 변한 몸이었다. 과거와는 달라진 ‘나’를 과거의 언어로 윤색한다는 건 자기 모순이며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글을 재활용할 수도 없었고 새로운 생애사를 쓰기도 어려웠다.
그랬다. 음식-채식과 채식주의를 주제로 글쓰기가 ‘쉽겠다’고 예상했던 건, 몸에 맞는 완벽한 언어가 있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몸으로 쓸 수 있는 언어는 아직 제대로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착각과 자각 사이의 괴리로 초고를 쓰는데 한 달여 시간이 걸렸고 초고를 쓰고도 몇 달의 시간을 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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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언제부터 채식을 했어요?”란 질문을 자주 접한다. (이 정도면 ‘착한’ 편이다.) 과거엔 이 질문에 열심히 대답했다. “예, 몇 년 되었어요.” 그럼, “아니, 그렇게 어릴 때부터 채식을 하다니…” 하는 반응과 함께 질문 공세를 시작한다. “왜 채식을 하게 되었어요?”, “다이어트 하세요?”, “어디 아파요?”, “종교 때문이에요?”, “달걀은 먹어요?”, “우유는?”, “빵은?” 호기심(호기심은 타자화/대상화를 동반한다)어린 표정으로 각종 질문을 하더니 “단백질 섭취는 어떻게 하고”, “그럼 건강에 안 좋을 텐데”, “스님하면 딱 이네”, “오래 살겠네~”라는 내용으로까지 번지며 때로 비난이나 야유를 동반한 말투로 끝낸다. 이런 말들이 주는 폭력-상처들에 몸이 너덜해질 즈음, “언제부터 채식을 했어요?”란 질문 자체가 문제로 다가왔다. 그러며 “그럼, 언제부터 육식을 했어요?”라고 되묻기 시작했다. (이런 되묻기를 모든 자리에서 하는 건 아니다.) 이때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두 가지로 단순화하면: 멈칫하며 망설이거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먹었다, 정도. 이런 되묻기는 단순히 되받아치기가 아니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어느 것 하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개고기”가 “야만”인 사회와 “전통”인 사회가 있듯, 먹는 행위는 탈정치화된 습관이 아니라 한 사회의 다양한 맥락 속에 위치하는 정치적인 행동이다. 언제부터, 왜 채식을 했느냐는 질문은 질문자 자신의 식성은 평범하거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채식은 뭔가 튀고 이상하고 같이 식사를 하기엔 불편한 일로 여기는 폭력이다. (알다시피 이런 폭력은 다른 ‘정치적 약자/소수자’ 문제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Ⅱ. 때로 채식주의자들 글에서, 육식을 도살행위로 간주하고 죽인 생명을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비슷하게, “썩은 시체”를 먹지 않겠다며 채식을 한다는 말도 있다. 동물권을 주장하거나 불쌍하다는 식의 시선을 표하면서 육식행위를 “썩은 시체”를 먹는 행위로 말하는 글들을 접하면 그 혐오증이 육식행위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육식이 (죽은) 생명을 고기/물건으로 환원하는 행위이듯, “썩은 시체”를 먹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 역시 생명을 타자화/대상화하며 고기/물건으로 환원하는 행위이다.
채식을 하겠다는 것, 육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썩은 시체”를 먹지 않겠다가 아니라 살생행위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살생행위를 줄이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식물은 생명이 아닌가. 채식주의자라고 밝혔을 때 가장 빈번하게 듣는 반문 중 하나는 “그럼 식물은 생명이 아니냐” 이다. 물론, 이런 반문의 대부분이, “채소도 먹지마라”, “그렇게 잘났으면 굶어라” 등을 의미하는 야유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고민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 질문을 되받아치면 “누가 아니래?”인데 육식은 살생이니 안 되고 채식은 살생이 아니니 괜찮다가 아니다. 이런 이분법을 통해 채식=동물권으로 간주하는 행위에 반대한다. 식물을 먹는 행위는 덜 살생하는 행위라느니, 포유류 등과는 달리 인간과 가장 거리가 머니까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느니, 하는 식의 언설들은 전형적인 이분법이며 인간중심주의/인간이기주의에 토대를 둔 인식이다. J.uz와 루인에게 채식은 관계의 정치학인데, 생명과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Ⅲ. 채식과 관련한 글을 읽은 적이 있거나 관련 사이트에 들어간 적이 있다면, 이 글을 읽으며 실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 글에는 닭이나 소가 어떤 식으로 “사육”되고 “도살”되는지에 대한 얘기가 없다. 혹은 채식이 건강에 좋으며 육식이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에 대한 얘기도 없고 채식이 더 윤리적이란 얘기도 없다. 이미 채식주의자인 사람들 중엔 이런 이유로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채식을 하면서도 이런 얘기로 구성되어 있는 담론에 진저리를 쳤기에 전혀 하고 싶지 않다.
J.uz와 루인에게, 소 한 마리 키우는데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데 그 땅이면 몇 명의 사람이 먹고 살 수가 있다느니, 도살장에서 생명들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느니 하는 글은 동물혐오에 토대를 둔 폭력이며 비윤리적이라고 몸앓는다. 웬만한 채식주의 관련 카페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거의 항상 “사육과 도살” 동영상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채식의 윤리를 획득하려는 행위는, 반미*평화운동 한다면서 ‘여성’피해(경험)자의 사진을 전시하는 행위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런 인식들은 동물혐오를 드러내는 대상화, 타자화의 전형이며 인간이야 말로 유일한 해결사이면서 최종심급으로 간주하는 행위이다.
채식이 더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건강에 더 좋은 행위라고 몸앓지 않는다. 이런 언설들 역시 인간만을 유일한 인식주체로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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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관련 글을 쓸 때 마다 하고 싶어 하는 말은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육식이 이데올로기라는 것, 채식이 정치학이라는 지점이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는 강박, “고기를 먹어야 건강에 좋다”, “채식을 하면 나이 들어서 고생한다” 등의 언설들이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는 것, 그래서 채식만큼이나 육식 역시 정치적인 행위임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이렇게 채식에 대한 몇 가지 얘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면서도 하는 말이 “그래도 난 육식이 좋아”, “고기가 좋은데 어떡해”, “그래도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어” 등이다. 이런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불편한데, 결국 채식을 취향으로 간주하는 태도이다(페미니즘을 배부르고 할 일 없는 ‘여자’들이 “수다”떠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와 별 차이를 못 느낀다). 채식을 취향으로 간주하는 것이 정치적인 문제로 여기는 것 보다 “편하기” 때문일까. 이와 유사하게 “난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해”란 말을 접한 적도 있다. 채식을 먹는 음식의 종류 문제로 축소하는 이 발언의 맥락은 유행처럼 퍼져 있는 차이의 정치학에 기반 하는데, “너의 채식과 나의 육식은 단지 다를 뿐이야”란 말을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차이의 정치학이 아니라 정치학이 상실된 ‘차이’일 뿐이며 “페미니즘은 다름을 인정한다며, 그러니 (나의 마초적인) 발언도 인정해야지”, “나는 너의 다름을 인정하니 너도 나의 다름을 인정해”라는 말투이다.
최근 웰빙이 유행하며 웰빙-채식이란 말도 생겼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채식주의]라는 라면이 나왔고 비건vegan도 먹을 수 있을 스티키핑거스라는 빵집도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채식주의가 또 한 번 자본주의의 논리에 이용된다며 비판하지만 그렇게 비판할 일만은 아니라고 느낀다. 기존의 육식중심세계에서 채식만으로도―우유나 계란도 없이― 가능하구나, 하는 다른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채식주의자다 아니다, 를 떠나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몸앓는다.
채식은 관계에서, 생활에서 지금과는 다르게 상상하자는 목소리이다. 육식이 당연한데 딴죽 거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지도 않지만, 육식을 획일적으로 강제하는 억압들 속에서 너무 불편하고 때로 몸이 아프기 때문에 내는 목소리이다. 단지 그 뿐이다.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