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에서 불편했던 점

조금씩 정리하려고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정리하진 못하고 있다. 그런 불편한 지점들 중 하나.

종종 궁금한데, 공길이 그렇게 “예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왕의 남자]를 홍보하며 가장 많이 나온 얘기는 이준기의 “미모”였다. “트랜스젠더가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는 이준기의 말처럼, [왕의 남자]가 ‘동성애’를 담고 있는 영화라는 홍보가 있었을 때, 그 핵심엔 이준기의 “미모”였다. 하지만 루인이 접했던 ‘게이’영화 중에서 이준기처럼 “마르고 예쁜” 배우는 (거의) 없었다. 대체로 근육을 자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잘 생겼다”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말이 ‘게이’영화에 나오는 배우는 모두 이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외모지상주의가 가지는 의미를 말하고 싶다.

홍석천이 커밍아웃(아웃팅과의 경계가 애매했다)했을 때의 반응과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의 반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페미니스트라도 예쁘면 OK”라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얼마나 위협적인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보기 좋은가”의 여부이다. 트랜스젠더라는 “구역질 나는” 존재가 별 다른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리수의 외모가 “여자 보다 더 여자답게 예쁜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길 역에 이준기가 아니라 (요즘 반말로 욕을 먹고 있는) 최민수였다면 어땠을까. 혹은 지상렬(지상렬이 못생겼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듣고 있는 라디오에 나오고 있어서)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호의적인 반응으로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을까. [청연]을 두고 친일이라고 반응하며 불매운동이라도 펼치려는 마당에 [왕의 남자]에 “비윤리”적이고 청소년의 정서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동성애’가 등장하는데도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왕의 남자]에서 주목하려는 지점은 ‘동성애’가 아니라 “여자로 오해 받을 만큼 예쁜” 외모를 가진 공길을 욕망하는 연산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접한 몇 가지 반응 중에는 “표현 수위가 약해”서 뭔가 부족하다는 글과 “입맞춤 장면에서 토할 뻔 했다”고 표현한 글들이 있다. 둘 다 별로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읽었다. 루인에겐 공길과 장생의 관계는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연산과 공길의 관계를 ‘동성애’관계로 부르는데 꺼리고 있다. 어떤 분은 “사랑했는데 남자”라는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 퀴어가 아니라 야오이라고도 했는데, 야오이를 접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그럴 듯하기도 하다. 루인은 좀 다른 이유로 꺼리고 있다. 다만 그 지점을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표현 수위가 약하다는 것이 누구와의 관계에서 그렇다는 건지는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아마 연산과 공길의 관계가 그렇다고 여겨지는데 “패륜아” 연산 정도면 더 높은 수위의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었다는 걸까. 아니면 감정선을 중심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아쉬웠다는 걸까. 하지만 “입맞춤 장면에 역겨웠다”는 반응처럼 더 ‘높은’ 수위로 18세 관람가였다면 그런 이유로 상당히 욕먹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감독이 참 영악(靈惡)하다고 느끼고 있다. ‘동성애’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욕먹지 않고 한국 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 정도를 알고 딱 그 만큼만 표현하고 있으니까.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권력에 관한 영화라고 했는데, 그 말처럼 감독이 원하는 건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라는 “상품성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더 몸앓아야 할 부분들이다.

“본다”는 것의 다른 의미: 비정상을 통한 정상

루인이 흥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책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들이다. 여기서 ‘다른’은 ‘병리적인’과 동의어이며, 어떤 병에 걸린 사람들에 관한 과학과 인류학, 인문학 등의 경계를 넘나드는 책들을 의미한다.

이런 삶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루인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상상력과 용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병리적인 삶이 문제적이란 기술 보다는 그런 다른 생활이 창조적이거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살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내용을 좋아한다. 뭐, 당연한 얘기;;;

루인의 삶이 병리적이라는 의미는 아닌데, 이는 종종 자신의 삶이 병리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특별함을 위한 훈장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루인의 삶은 병리적인 편이다.

예전에 스티비 원더가 10분 정도 밖에 “볼 수” 없어도 “개안”수술을 하겠다고 했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이유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단 10분이나마 딸의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언어는 비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구성된 경험이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에 의하면 태어났을 때부터이든 사고를 통해서든, 시각’장애’인이 “개안” 수술을 했을 때, 시력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데는 최소한 한 달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리며, 경우에 따라선 우울증 등의 이유로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수술을 하고 붕대를 풀면, 금방 “볼 수” 있을 거란 믿음은 시력은 경험이 아닌 타고난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아기들에게 모빌 같은 것을 통해 시력 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동공이 고정되거나 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이처럼 시력은 철저하게 훈련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력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시력경험을 잊은 사람이 붕대를 풀자 금방 상대를 알아본다는 설정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환상, 즉 거짓이다. 시각’장애’인은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경험에 익숙한 사람들과는 다른 식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며 시각을 사용하는 사람과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지금의 세상이 시각에 기반 해서 구성되어 있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시각을 사용한다는 것도 문제적인 말인데 시력 차이, 색맹이나 색약이냐에 따라 다른 식으로 세상을 경험한다. 그것은 현재 사회가 설정하는 방식과는 다른 식으로 색깔을 인식하기에 경험하는 세계가 전혀 다르다. 루인은 아무 고민 없이 빨간 색 보다는 파란 색의 명도가 더 진하겠거니 했는데, 색맹의 입장에선 빨간색은 검은색의 명도와 별 차이가 없으며 파란색은 상당히 밝게 다가오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거의 흰색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루인은 루인을 시각’장애’인으로 명명했는데, 이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장애’라고 느끼지 않았거나 그렇게 명명해야겠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장애’를 “나”와는 상관없는 멀고 먼 남의 얘기로 여기며 타자화/특수화하는 폭력이다. 동시에 ‘장애’란 것이 얼마나 임의적인 것인가를 의미한다.)

정상/비정상이란 구분은 임의적인데 그것은 정상을 통해 비정상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을 발명함으로써 정상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내가 정상”이니까 “네가 비정상”이 아니라 “넌, 비정상이야”란 인식을 통해 “나의 정상성”을 획득한다. 누군가의 말에 대해 “그건 인종차별이야(동성애 혐오야)”란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은 인종차별적이지 않다, 동성애를 혐오하지 않는다고 “보이게” 하거나, 적어도 그런 비판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상/비정상 담론은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 비록 올리버 색스의 책 속엔 때로 정상/비정상 담론의 틀로 기술하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정상성을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비정상을 발명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폐증이 문제인지 자폐증을 문제로 여기는 세상이 문제인지, 책을 읽으면서 혼란을 느꼈다. (흔히 자폐증이란 말보단 자폐아란 말을 더 많이 쓰는데, 그럼 자폐증을 가진 성인은 어디로 갔다는 걸까?)

뭐, 이 책을 읽으며 대충 이런 얘기들을 중얼거린다. 사실, 올리버 색스의 다른 책들을 더 읽고 제대로 서평을 쓰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다. 지금껏 쓰지 않고 있는, 항상 몸속에 가두고만 있던 언어들을, 이 책을 매개로 풀어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트랜스, 혹은 ‘진부’한 이야기

01. 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은 연대할 수 있는가, 란 질문이 문득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전까진 감각하지 못하다가 월요일부터 시작한 책과 놀다가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는데, 일테면 “여성과 인권”이라는 말이나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이란 말처럼 다가왔다. “여성과 인권”은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이란 말은 ‘여성’운동은 시민운동이 아니란 의미다. 딱 이런 의미란 건 아닌데 이런 말을 들은 것처럼 불편하게 다가왔다. 기다리면 언젠간 불편함의 의미가 다가오겠지.
불편함의 의미를 알아간다는 건, 승려들의 화두 같다고 느낀다. 잠시도 놓지 않고 몇 년씩 고민해도 알 수 없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 화두처럼 불편함의 의미를 알아 가는 과정도 그렇기에.

02. 케이트 본슈타인Kate Bornstein의 [젠더 무법자Gender Outlaw]를 읽다가 밑줄 그은 문장:
그들(이성애 ‘남성’-루인 주)은 “레즈비언들은 파트너와 어떻게 (성행위를) 하나”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정말 슬픈 질문이다. 그것은 여성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M_ +.. | -.. | 살짝 의역했다. 책에선 “그들”이 이성애 ‘남성’이지만 꼭 ‘남성’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질문은 성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음에도 ‘답변’에선 “관계”로 번역한 건, 이 문장이 들어있는 챕터의 전체적인 맥락이 소통과 언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지점이 이성애 성기 중심주의지만 동시에 그것은 권력과 소통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문득, 검색어가 두려워 진다-_-;;)_M#]

03. 언제쯤 이반, queer란 키워드를 두고서도 트랜스를 별도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