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책, 독후감은 아니지만 – 두 번째

이른바 12월 특집인가요? 흐흐. 평소엔 안 하지만 이런 저런 일들이 끝나고 새로운 일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라 쓰는 독후감 아닌 독후감입니다.

다나베 세이코지의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읽었습니다. 영화는 예전에 봤으니, 책을 읽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책과 영화가 모두 좋은 경우가 드물어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상당히 잘 썼어요. 조근조근하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 작품이고요. 실린 단편 중, “사랑의 관”이 가장 좋아요. 두고두고, 가끔씩 꺼내 읽을 수 있는 책이라 기쁩니다.

이비스
리스의 『도덕적 암살자』를 읽었습니다. 여러 고민 거리를 동시에 던져 줍니다. 스포일러가 아니니 미리 말하면, 암살자는
채식주의자입니다. 저처럼 유제품이나 달걀도 안 먹는. 아울러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대역이지 않을까
싶어요. 소설 내내 사람이 동물을 얼마나 부당하게 죽이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합니다. 그러며 채식이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전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짝 짜증도 났지요. 전 현재의 도살장이 비윤리적으로 살생하기에 육식이
부당하고 채식이 정당하다는 식의 주장은 인간의 자뻑/자기애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제발, 인간 아닌 동물들이 농장에서,
도살장에서 얼마나 참혹하게 사는지를 전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윤리가 기준이라면, 이런 전시야 말로 비윤리적이죠. 그리고 살인의
윤리 말고, 내용 전개에서의 윤리를 따지면 이 책보다는 미야베 미유키 같은 작가의 작품이 훨씬 윤리적입니다. 미미와 같은 이들의
추리소설은, 윤리를 설파하지 않지만 등장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에서의 윤리를 고민하게 합니다. 아무려나, 그래도 다음의 구절은
꼽씹을 만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절반은 자랑스럽고 절반은 분노에 차, 마치 어린 학생이 라틴어 동사 활용 시범을 보이듯 말을 꺼냈다.

“범죄자들을 더 기술이 좋은 범죄자로 변화시키는 곳인데도 우리가 교도소를 운영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로 교도소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멜포드가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구나. 말해봐.”


톰스 경관이 내게 보여준 똑똑한 십대 소년인 조지 킹슬리를 떠올렸다. 그는 착한 아이였지만 냉혹한 범죄자가 되었다. 모든 걸 바꾹 개혁하겠다며 미래를 그리던 아이는 모든 맹세와 야망을 잃은 채 범죄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범
죄자들은 대개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생겨요. 그 사람들은 우리 문화로부터 별로 얻는 것이 없어요. 그들이 뭔가 얻으려면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심지어 파괴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새로운 체제로 바꿔야 해요. 물론 더 나은 체제일 수도 아닐 수도 있죠. 그건
상관없어요. 그들은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국 법을 어기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들에게 범죄를 배우죠. 어쩌면 교도소에
가서 훨씬 중요한 법률을 어기는 걸 배우기도 하겠죠. 어느 사이엔가 미래의 혁명가들은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사회는
범죄자는 쉽게 흡수할 수 있지만 혁명가는 받아들이지 못해요. 범죄자들은 체제 안에 자리가 있지만 혁명가는 자리 자체가 없죠.
그래서 교도소가 있는 거예요. 사회의 부적응자들을 살인자로 바꾸는 거죠. 사회에 피해를 주고 분위기를 해칠 수는 있지만 사회를
파괴하지는 않거든요.”


-데이비드 리스. 『도덕적 암살자』 남명성 옮김. 서울: 대교베텔스만, 2008. 463-464.


기욤 뮈소의 『사랑하기때문에』를 읽었습니다. 100만 권씩 팔린다는 소설은 이런 소설이군요. 이런 소설이 이렇게 많이
팔린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부담 없이 읽기엔 좋아요. 소설이 읽는 시간 동안의 유희라면, 나쁘진 않습니다. 다만 다시 읽고 싶은
작가는 아닙니다.

카미유 로랑스의 『사랑, 그 소설같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만약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좀 안다면 매우 재밌을 책입니다.
프랑스문학와 프랑스어에 문외한인 저로선, 아쉬웠습니다. 사실 책을 읽다보면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런
아쉬움과는 별도로, 매우 매력적인 책입니다. 특히나 작품의 구조와 구성은 제 취향. 흐흐.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는 형식으로
풀어냈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기시 유스케의 『유리망치』를 읽었습니다. 영화로도 유명한 『검은집』의 저자기도 합니다. 읽고 난 느낌은… 오오. 감탄, 또 감탄. 『도덕적 암살자』가 도덕과 윤리를 주장하기만 한다면, 이 책은 도덕과 윤리를 녹이고 있습니다. 도둑질은 괜찮아도 살인은 안 된다는 구절 때문이 아닙니다. 소설 속 인물을 설명하고 전개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를 읽었습니다. 반 정도를 읽었을 땐 그냥 그랬는데 어느 순간 빠져들더군요. 사람들이랑
농담으로 하던 얘기를(스포일러라 말을 할 수가 없어요;; ) 이렇게까지 밀어붙였다는 점에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습니다.

가쿠타 미쓰요의 『삼면기사, 피로 얼룩진』을 읽었습니다. 이 작품도 괜찮습니다. 책마다 편차가 있긴 해도, 이 작가,
대체로 괜찮은 듯합니다. 사실 “삼면기사”라고 해서 흑기사와 같은 기사인 줄 알았습니다… 아하하 ;;; 그 기사가 아니라,
신문의 3면에 실린 기사란 뜻입니다. 짧게 실린 기사에 작가 특유의 상상력을 붙인 소설입니다.

웬디 매스의 『망고가 있던 자리』를 읽었습니다. 책을 옮기신 분에게서 2009년 늦여름에 선물 받았는데 이제야 읽었습니다. ;; 전
이런 종류의 책을 좋아합니다. 사회적으로 ‘다른’ 존재로 불리는 이들이 지배규범과 소통하는 과정을 그리는 성장소설. 소리에
색깔과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공감각인(synesthesia)이 주인공입니다. 예를 들면, a는 분홍색, b는 하늘빛이 도는 은색, d는
주황색이란 식으로요. 2000명 중 한 명이 공감각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 존재를 아는 이들이 거의 없기에 주변 사람들은
상상이나 헛소리로 치부하죠. 정신병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주인공의 다른 경험과 함께,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이러한 ‘다른’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별도로, 소설 자체도 무척 재밌습니다.


내가 나를 미쳤다고 하는 것과, 의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웬디 매스. 『망고가 있던 자리』. 정소연 옮김. 서울: 궁리, 2007. 95.


요시다 슈이치의 『거짓말의 거짓말』을 읽었습니다. 헌책방에 있어서, 그냥 일하는 시간 동안 읽었습니다. 의외로 재밌는 부분은,
주인공이 젊은 시설 게이 파트너와 동거를 했다가 현재는 표면적으로 이성애 결혼을 한 상태라는 것. 그래서 꽤나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뭐, 이런 내용이 아니어도 요시다 슈이치 소설이 부담 없이 읽긴 좋기도 하고요. 내용만으로는 구매할 수도 있겠지만, 분량에 비해
비싼 편이라, 사지는 않았습니다. 결혼한 동성애자와 관련한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면 참고하세요. 🙂

천운영의 『잘가라, 서커스』를 읽었습니다. 천운영은 2000년 이후 등단한 작가 중 제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는
작가입니다. 제 취향이 옛날 작품을 좋아해서인지, 2000년대 등단 작가 중에서 읽을 만한 작가를 못 찾았거든요. 김애란이 잘
쓴다고 하지만,
『달려라 애비』도 네 편 정도 읽다가 결국 덮었습니다. 전 소설을 읽을 때 한국작가의 작품과 번역작품을 평가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번역작품이야 내용이
재밌으면 그만이지만, 한국어로 쓰는 작가의 작품은 구성과 문체 등을 좀 더 엄격하게 따집니다. 근데 등단 첫 작품집이란 점을
감안해도 김애란의 작품에선 큰 매력을 못 느꼈습니다. 반면 천운영은 첫 작품집
『바늘』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물론 갈 수록 기대에 못 미치지만요. 하하. ;; 『잘가라, 서커스』는 첫 장편이라, 계속 기대를 가져도 될지, 아님 그냥 접어야 할지를 가늠하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결론은, 아직은 좀 더 읽자는 것. 그렇다고 예전처럼 엄청난 매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 뭔가 평이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습니다.

에릭 포토리노의 『붉은 애무』를 읽었습니다. 홍보띠지에 “순수문학과 추리문학이 결합된” 운운하는데, 이런
구절은 무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딱히 추리소설이라고 부를 거리도 없거니와 순수문학과 추리문학이란 구분 자체도 문제니까요.
아무려나, 이 작품 매우 매력적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다음 인용구절을 음미해 보세요. 하지만 이 인용구절에 낚이진
마세요. 후후.


아이는 아빠 목소리를 가진 엄마를 너무나 좋아했다.(107)

“아빠가 내 엄마였을 때 기억나?”(108)

정확하게 말해, 마리가 아니라 내가 연기하는 엄마, 무엇이든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고, 펠릭스도, 마리도 결코 보이지 못했을
인내심을 발휘하는 금발 여인, 아버지의 서투름도, 짜증도, 불뚝 골도, 그리고 생모의 차가운 거리감도 없는 새로운
존재를.(161)


나는 실추한 어머니, 두께가 없는 아버지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172)
-에릭 포토리노. 『붉은 애무』 이상해 옮김. 서울: 아르테, 2008.


[영화] 밀양: 하늘, 태양/볕, 이중서사, 윤리

[밀양] 2007.06.18. 18:45 아트레온 9관 11층 G-10

#제대로 써야지 하고 미루다가,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간단하게 메모만. 스포일러는 없음.

01.
며칠 전, 영화잡지를 뒤적이다가 이 영화와 관련한 글이 있어서 대충 넘기다가, 이 영화엔 하늘이 많이 나온다는 구절을 읽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하늘을 비추는 장면은 단 두 번뿐이다. 두 번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하늘을 담고 있다. 물론 자동차도로를 비추면서 하늘이 드러나는 경우가 두어 번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서너 번이 전부. 하늘이 많이 나온다고 느껴지는 건, 어느 장면부터 전도연은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때문인 듯.

02.
이 영화에서 하늘은, 종교가 두드러지게 나와서 하나님으로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루인은 예전부터 자꾸만, 단지 하나님이 아니라 바람피고,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즉, 죽어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거는 모습과 겹친다고 느꼈다. 하늘을 쳐다보며 “잘 봐”라거나 “보고 있니”라고 얘기하는 모습들 모두 “하나님”과 죽은 남편에게 하는 말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신애(전도연)에게 남편이 하늘과 같은 존재란 의미는 아니고.

03.
흥미로운 건, 이 영화는 한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장편을 이어붙인, 두 개의 작품을 연결한 영화이기도 하다. 준이 하늘을 보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유괴되는 사건까지가 단편. 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찾아간 현장에서 신애가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이 장편의 시작.

영화가 시작할 때 준이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 준이 반응하는 모습들은, 죽은 준을 찾은 곳에서 신애가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 신애가 반응하는 모습들과 거의 같다. 이 장면에서 신애와 준은 우울증으로 합체했다고 느꼈다.

04.
당연히 의도적인 연출이겠지만 이 영화 속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 태양의 광기가 넘치는 날씨다.

05.
영화를 두 번 안 읽었다면, 범인이 누군지 못 알아 봤을 뻔. 그래서 그 중3 아이와 왜 그렇게 불안하고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지 모를 뻔 했다. -_-;; 인면맹의 문제다.ㅠ_ㅠ

06.
가장 화났던 장면은, 범인의 태도. 그리고 같이 있던 사람들의 태도. 이 영화가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일 수도 있다면 바로 이 장면 때문.

신애가 종교에 귀의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천하기 위해, 범인을 용서하러 (같은 교회 사람들과 함께) 면회를 간다. 범인은 표정이 너무 좋은데, 하나님께 귀의했고 그래서 용서를 구했다고, 용서 받았다고 말하며 매일같이 기도하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은 대단하다”고 반응한다. 이 두 장면에서 화가 났다.

도대체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준의 죽음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은 신애지 하나님이 아닌데, 정작 그 사건으로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신애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님에도, 범인은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비록 범인은 신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다소 형식적으로 들리고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았고, 신애도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 역시 하나님에 기대어 용서를 얘기하고 믿음을 얘기하지 신애의 고통과 슬픔은 얘기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 속에서 신애의 고통은 “방황하는 어린 양”일 뿐이다. 영화 속,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정작 타인의 고통엔 무관심하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범인이 하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있다는 말에 “역시 하나님은 대단하다”란 말이 나올 수 있는 거 아닐까? 마찬가지로, 종교인들은 계속해서 용서하란 말을 되풀이 할 뿐, 신애가 “하나님이 이미 용서를 했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느냐”란 항변을 못 알아듣는 것 역시 그래서가 아닐까.

지난 글에서도 적었듯, 이 글에서 종교는 하나의 장치이고,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나 이슬람교라도 아무 상관없다. 그러니 이 영화는 정작 타인의 고통엔 무관심하면서 구원이나 믿음 같은 막연한 ‘희망’ 만을 얘기하는 방식에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자”란 얘기만 할 뿐 정작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엔 모두가 무관심할 때, 그런 집단 속에서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개인은 어떤 식으로 변하는가를 [밀양]은 그리고 있는 듯 하다.

07.
이 영화가 프랑스영화나 독일영화였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영화를 읽다가, 문득 [미치고 싶을 때]가 떠올랐다.

[밀양]의 후반부에, 신애는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말이 너무도 양가적으로 다가왔다. 이 말이 절실하고도 절박하게 다가오면서도 이 말을 안 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궁시렁거리고 있다. 이 말이 좋으면서도, 안 하는 게 나았을 뻔 했다고. 그래서 프랑스나 독일이었으면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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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만 해도 이 분량이니, 정말 적었다면…-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