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모음: 읽을 거리, 자아, 트랜스젠더 논문

01
연휴로 본가에 가면 읽을 거리를 몇 개 챙겨간다. 물론 거의 못 읽는데, 명절 준비로 분주해서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욕심 내지 않고 조금만 챙겼다. 그 중 두 가지만 읽어도 좋겠다고 싶었는데… 그 두 가지를 다 읽었다. 시간이 남아 낮잠도 푹 잤다. 어쩐 일인지 이번 연휴엔 시간이 좀 남았다. 이유는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다음 명절도 지내봐야 확실할 듯하다. 감정은 복잡하지만 아무려나 다행이다.
02
자아와 관련해서 내가 지나치게 어렵게 혹은 정신분석학적 강박으로 고민하고 있는 걸까 싶다(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적은 없다). KSCRC 겨울 아카데미 강좌로 스트레스가 상당하고 강의 준비는 조금도 안 된 상황이라, 체계적으로 잠수 탈 계획을 세웠다. 그날 급한 일이 생긴다거나, 다른 행성의 존재가 나타나 나를 데려간다거나, 갑자기 공간 이동을 하면서 고양이 왕국의 집사로 취직한다거나(하앍하앍), 마야력 계산 오류로 이제야 지구가 멸망한다거나, 전 우주에 42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모두가 더 이상 강의 같은 건 들을 필요가 없어진다거나.. 뭐, 이렇게 체계적이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며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잠수를 타야지 했다. 후후. 그런데 이런 저런 책을 읽다가, 내가 ‘자아’를 너무 어렵게 혹은 지나치게 낯선 개념으로 접근했구나 싶었다. 이제 이런 부담은 좀 줄었는데, 여전히 뭘 강의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크크. ㅠㅠㅠ
03
mtf 트랜스젠더/트랜스여성/성전환여성을 인터뷰한 사회복지학 논문(http://goo.gl/l7bDl 백형의, 배은경, 안은미, 권지성 “성전환여성(MTF)의 생애경험에 대한 생애사 연구”)을 읽었는데.. 내용은 둘째 치고 참고문헌에서 당황했다. 왜 이렇게 엉성하게 문헌조사를 한 것이냐! 물론 트랜스젠더 이슈가 전공이라고 소심하고 수줍게 쫑알거리는 내가 검색할 수 있는 참고문헌과 트랜스젠더 이슈에 낯설 수도 있는 사람이 검색하고 선별할 수 있는 참고문헌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다 싶다.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트랜스젠더’와 ‘성전환’만 입력해도 나올 논문이 대거 누락되었다. 아울러 기존 연구 문헌 검토에서 인용하거나 논해야 할 법한 문헌이 빠져 있거나 제 위치를 점하지 않고 있다. 이를 테면 한채윤이 용어를 정리한 부분은 각주로 처리되고 본문에선 다뤄지지 않는다. 나영정의 논문은 다루지만 김준우의 논문은 누락되었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나 <3xFTM> 역시 빠져 있다. 이 두 권만 읽었어도 용어 정리를 전혀 다르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운조의 글만 읽었어도 달랐을 텐데 누락되었다. 나는 이것을 누락되었다고 판단하는데 읽었지만 인용하기 애매해서 언급을 안 했다고 해석하기엔 논문의 논지와 관점이.. 흠… 끄응…;;; 2012년에 나온 논문인데 기본적으로 언급해야 할 논문이 너무 많이 누락되었다(여기서 ‘기본’은 본 논문에서 언급한 논문과 동일 선상에서 같이 언급해야 하는 논문을 뜻한다). 오히려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의학 논문이 중요한 수준에서 다뤄지고 있다. 외국 논문도 1982년에 나온 논문을 적극 인용하고 있는데 이건 좀 심하다 싶다. 정말 황당한 건 참고문헌 작성에 있다.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 기획단. 2006. “성전환자 인권실태 조사.” 국가인권보호위원회.
국가인권보호위원회는 어디냐? 이런 단체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단체와 함께 작업한 적 없거든!! 이 기록물을 어디서 봤기에 이런 식으로 작성한 걸까?
이론적 분석 없이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재배치한 수준이라 논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이지만(학제마다 논문 형식이 다르단 점에서 이런 판단은 조심스럽다) 이와는 별도로 문제가 많은 논문이다. 그럼에도 불만을 쉽게 표현하기도 어려운데 사회복지학 학제에서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최초의 논문(이라고 연구자는 주장한다, 근데 틀린 말도 아니란 게 함정 ㅠㅠ)이란 점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런 시도 자체가 중요하단 점에서, 그 내용도 만족스러우면 좋겠지만 사회복지학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고민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점 자체도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내용이 별로라고 마냥 무시할 수가 없다.
언제나 이런 점이 어렵다. 논문의 수준으로 판단하지 못 하고 사회적 맥락에서 논문을 평가해야 하는 상황에 속이 상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어려운 상황이 싫고 좀 화난다.

트랜스젠더, 수술/의료적 조치, 그리고 저어함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구성원 모드로: 건너뛰어도 무방한 구절.]
트랜스젠더 이론가 중 유난히 애호하는 두 명이 있다.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며 역사학자고 영화감독이기도 한 수잔 스트라이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론가다. 나는 그의 글을 여러 편 읽으며 매번 감탄했고 종종 울었다. 논문을 읽으며 울 수도 있음을 스트라이커를 통해 배웠다. ftm 트랜스젠더며 철학 전공인 제이콥 헤일의 1990년대 글은 내가 사유하는데 많은 토대를 제공했다(2000년대 들어선 글을 거의 안 쓰고 있다 -_-). 특히 범주 논쟁에 있어 그의 글은 탁월하고 때때로 중요한 기준점이다. 이 둘은 친구기도 한데, 각자의 글에서 우정을 표현하며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둘의 의견이 항상 일치함은 아니다. 의료적 조치를 결정하는 이슈에서 특히 그러하다. 스트라이커는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를 최종 결정할 사람은 트랜스젠더 자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가 요구한다면 의사는 그 요구에 따라 의료적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헤일은, 그의 1990년대 중후반 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바와 달리 2000년대 후반에 쓴 글에서, 최종 결정은 의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와 의사는 충분히 상담해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트랜스젠더의 의견이 존중 받아야 하지만 최종 결정은 의사가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의사가 왜 개인의 젠더를 결정할 권한을 지니는가?’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스트라이커의 의견에 가깝다. 의료적 조치 시행을 의사나 행정기관이 결정해선 안 된다. 의료적 조치를 요구하는 트랜스젠더 본인이 결정하고 요청하고, 이 요청은 정당한 요구여야 한다.
[변방의 이름 없는 블로거 루인 모드로]
며칠 전 강의에서 김비 님은 논쟁적 의견을 제시했다. 청소년과 기혼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 특히 수술은 관계를 생각해서 참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논쟁적인지 알고 있으며 그래서 이 이슈로 논의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의견에 ‘동의’한다. 청소년과 기혼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의료적 조치가 능사인가란 고민에서 ‘동의’한다. 이렇게 적으면, 전혀 다른 두 입장을 비슷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 같지만 어떤 염려의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 듯하여 연속선 상에 둘 수도 있으리라.
나의 고민은, 엄밀하게 청소년 및 기혼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 일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 일반에 해당한다. 트랜스젠더 운동이 더 활발해지고 사회적 분위가 변해, 나이 어린 mtf 트랜스젠더가 여성스러운 행동 양식을 실천하고 자신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수술을 요구하면 의사가 “좋아, 당신은 수술을 요구하는 트랜스젠더니까 의료적 조치를 해야지”라는 식으로 진단과 수술 처방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만족할 일일까? 지금은 예상 못할 어떤 또 다른 규범을 재생산하지는 않을까? 혹은 어떤 수준의 고통, 어떤 수준의 진정성을 경쟁하고 전시하도록 하지는 않을까? 이를 테면 가급적 어린 나이에 의료적 조치를 요구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트랜스젠더의 표상이고, 나이 쉰에 의료적 조치를 요구한다면 ‘너무 늦게 깨달았다’며 의심하는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을까? 수술이 트랜스젠더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확정되지는 않을까? 나의 이런 염려는 너무 조급하거나 쓸데 없는것일까?
물론 의료적 조치를 해야 한다면 가급적 빨리,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에 의료적 조치를 해야 그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고 삶을 영위하기에 조금은 더 수월하단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삶의 편안함이란 측면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니 의료적 조치를 원한다면 원하는 시점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적 조치 요구를 이행하는데 있어, 성인이어야 한다거나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요건은 없어야 한다. 7-8살이어도 본인이 원한다면 의료적 조치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너무 어린 나이에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한다면 이것이 큰 수술이기에(어쨌거나 간단한 수술은 아니기에) 아이에게 해로울 수도 있다며 반대할 수 있다. 특히 의료 관계자가 수술의 위험을 얘기하며 더 강하게 반대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다면 인터섹스의 경우엔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때때로 18개월 미만일 때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를 시행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현재 논하는 의료적 조치의 한계는 나이가 아니라 이원 젠더 규범이다. 아동 운운, 청소년 운운하며 반대하는 발언에서 핵심은 나이가 아니라 지배 규범의 재생산이다. 어린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태어날 때 지정 받은 규범적 젠더를 일평생 유지해야 한다는 이원 젠더 규범이 의료적 조치를 금하는 핵심 근거다. 그러니 나이가 한계일 수 없고 나이로 한계를 정할 수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의료적 조치를 받은 후 나이 들어 후회하면 어떡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오지랖은 접어 두시라고 답하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드는 질문은, 의료적 조치가 정말 유일한 선택이자 조언이어야 할까? 나는 트랜스젠더의 요구에 따라 외부성기재구성수술 등 의료적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의사는 상담가 역할이지 판사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과 믿음이 다른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한 가지로 수렴해버리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될 우려가 있어서 수술 이슈엔 늘 양가적 감정을 갖는다. 6살 아이의 의료적 조치 요구를 적극 지원하고 지지하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이것이 또 다른 어떤 규범을 재생산할 우려는 없는지 끊임없이 탐문해야 하는데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우려 혹은 걱정은, 지금 바로 이런 식의 고민이 트랜스젠더 이슈와 의료적 조치를 등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도 있다. 의료적 조치는 트랜스젠더의 삶에서 일시적 사건, 통과지점이지 종착점이 아님에도 많은 경우 트랜스젠더의 유일하고 최종 목표로 논의된다. 이것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고 상상할 수 없는 범주로 내몬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하리수 씨를 트랜스젠더의 유일한 모델로 만든다. 의료적 조치를 수월하게 하는 것이 능사인가란 고민은, 그 저어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감정이리라.
수술 혹은 의료적 조치가 능사가 아니라고 저어하는 내 몸과 의료적 조치는 트랜스젠더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 몸은 ‘모순’이 아니다. 그럼에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뭔가가 있다. 뭘까?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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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E 님과 관련 얘기를 하다가, 상당히 어설프게 얘기한 것 같기도 하고 글로 정리할 필요도 있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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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약발행하였습니다.

거침없이 퀴어 킥, 트랜스젠더의 복잡다단함 자료 공유

두 개의 기록물을 writing 메뉴에 공개했습니다. 지난 목요일(2013.02.07.) KSCRC 2013 겨울 아카데미, 타리 강좌를 들으며 더 늦기 전에 공유해야겠다 싶었거든요.
하나는 이미 공개된 <거침없이 퀴어 킥: 여자, 여성성, 기만, 환상> 자료집(2007.06.06.)입니다. 과거에 공개한 기록물인데 어쩐 일인지 파일 다운로드 링크가 깨져 있더라고요(정확하게는 이상한 파일이 다운로드되더라고요). 그래서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링크를 추가했습니다. 제 블로그와 위그(WIG) 블로그, 두 곳 모두에서 자료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는데 위그 블로그의 로그인 아이디를 까먹은 관계로;; 제 블로그에만 파일 링크를 추가했고요. 아울러 제가 기획에 공동 참여했다는 걸 빌미로, 제가 쓴 글을 모아두는 writing 메뉴에도 등록했습니다. 자료 아카이브라는 측면에선, 이렇게 정리를 해야 관리하기 편하거든요.
이 문서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내용은 제 블로그에서 더 찾을 수 있으니 생략하고요. 케이 님의 글과 관련해서 약간의 논평이 필요해서 부연합니다. 강좌에서 타리도 얘기했지만 작년 말에 케이 님은, “거침없이 퀴어 킥”에서 쓴 글을 다시 정리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작년에 읽은, 가장 인상적인 글 중 한 편이며 정말 아름답고 또 아픈 글이기도 합니다. 글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아직 공개를 안 하신 듯하여 더는 언급하기 힘들지만, “거침없이 퀴어 킥”에 실린 케이 님 명의의 글을 읽고 케이 님을 비판하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부(적)당한 듯합니다. 현재 시점에선, 과거에 그런 논쟁이 있었다는 정도로 평가함이 적절하겠지요. 누구는 잘 했고 누구는 잘못 했고란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거나 평가되지 않길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의 흑역사, <트랜스젠더의 복잡다단함: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가기> 자료집(2007.11.03.)입니다. 엄밀하게는 그 자료집에 실린 제 원고만 공개해야 하지만, 노트북을 뒤져서 찾은 파일은 전체 자료집 뿐이라 전체 자료집으로 공유 및 공개합니다. 공개행사였고 자료집 역시 공개자료란 점에서, 자료집에 함께 글을 쓴 다른 분께 양해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에 아래아한글 파일로 편집했음에도 해당 파일은 없으며, PDF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20쪽도 안 되는 분량인데 PDF가 무려 27MB 정도 크기입니다. 다운로드할 때(특히 모바일 사용자라면)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지렁이가 개최한 몇 안 되는 행사기도 하고, 한국에서 열린 몇 안 되는 트랜스젠더 포럼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는 행사 자료집입니다. 하지만 지렁이 활동가 맥락에선, 기억도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아울러 외부인은 모르겠지만 내부인에겐 이 자료집만 읽어도 지렁이가 해산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활동가 각자가 지향하는 운동 방향, 하고 싶은 운동 내용 및 운동의 형식이 정말 달랐거든요. 정말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자료집이죠. 아하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려나 이 두 자료집을 찾는 분들에게 유용한 내용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