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범주 논쟁, 일부

기말페이퍼 “‘여성’ 범주의 구성: 여성 범주를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에 쓴 글의 일부입니다.

전문은 언제나 그렇듯 writing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에도 얘기했듯 블로깅할 것 없으면 포스팅 때우기 용으로 다른 부분을 이렇게 쓸 수도 있습니다. 크. ;;;
아래는 하리수 씨가 한국 사회에 등장할 수 있는 맥락을 탐색한 부분입니다. 추정이 일정 부분 섞여 있다는 점,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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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황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트랜스젠더 연예인을 상기시킨다. 다름 아니라 하리수 씨다. 2001년 화장품 광고를 통해 처음 등장한 하리수 씨는, 이름처럼, 한국 사회의 핫이슈였다. 하리수 씨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방송되었고 <인간극장>과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하리수 씨의 등장은 한국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엔 ‘대중’에게 트랜스젠더란 존재를 널리 알린 점이다. ‘트랜스젠더=하리수 씨’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젠더란 용어를 낯설어 하는 이들에게 하리수 씨 이름을 꺼내면 바로 이해하듯, 하리수 씨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대중과 얘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2001년에도 지금도 많은 이들이 하리수 씨를 통해 비로소 트랜스젠더란 존재를 인식하고 인지하기 시작했지만 하리수 씨가 한국 최초의 트랜스젠더가 아님은 당연한 사실이다. 비록 하리수 씨의 등장에 연예계 매니지먼트의 전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2001년 뜬금없이 트랜스젠더가 한국 사회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매니지먼트사의 전략은 특정 역사적 맥락에 위치한다.
한국 신문 기사에서 처음으로 성전환수술이 등장한 것은 1921년이지만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즈음부터다(루인, 250-257). 기지촌 이태원 지역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엔 트랜스젠더 집단이 언론에 수 차례 보도되었다. 1976년엔 공식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트랜스젠더 업소가 만들어졌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는 꾸준히 모였다. 이를 기반으로 지금까지도 이태원은 트랜스젠더 공동체/집단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집단 형성은 1990년대 동성애인권운동이 등장했을 때 함께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1990년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데 하나는 동성애인권운동을 매개로 트랜스젠더가 적극 부상한 점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환수술과 관련한 의료 문헌이 출판되기 시작한 점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성애자는 호모로, 트랜스젠더는 게이로 불렸다. 아울러 트랜스젠더는 여장하는 남성으로 언론에 보도되곤 했다. 동성애인권운동의 등장으로, 게이는 동성애자를 지칭하고 트랜스젠더는 지정 받은 젠더가 아닌 다른 젠더로 살아가며 때때로 의료적 조치를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구분하기 시작했다. 용어의 구분은 동성애인권운동의 주요 작업 중 하나였고 이것은 트랜스젠더를 가시화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1996년엔 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가 따로 모이는 모임, 아니마가 결성되었다. 1998년 발간을 시작한 섹슈얼리티 전문 잡지 《버디》는 꾸준히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를 싣고, 트랜스젠더와 동성애를 구분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이 작업은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별개의 범주로 구분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 시기의 맥락에선 트랜스젠더를 가시화하는 작업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제외한 모든 젠더 실천과 성적 실천을 일괄 변태(혹은 호모)로만 이해하던 당시 상황에서 존재의 경험을 세심하게 구분하고 설명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운동이다. 아울러 동성애인권운동에 적잖은 트랜스젠더가 함께 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 동성애인권운동은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Transsexual)인권운동이라고 평가함이 더 정확하다. 다른 한편 김석권, 최병무와 같이 성전환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 집단은 성전환수술 관련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까지도 성전환수술이 제도적 절차를 갖추고 있진 않지만 이들의 학술지 논문 게재는 성전환수술을 학제에 공식화하는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후반, 트랜스젠더는 ‘대중’에겐 낯설 수도 있지만 하위 문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곳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저변을 형성하였다. 하리수 씨는 바로 이런 시대적 정황에서 등장했다. 일부 논자들은 홍성천 씨가 커밍아웃에 따른 피해만 겪었고, 하리수 씨는 그에 따라 발생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가져다 준 혜택만 누렸다고 말하곤 한다. 이것은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평가다. 물론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아웃팅이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홍석천 씨 한 사람의 커밍아웃이 트랜스젠더가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고 상상한다면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거나 과장된 평가다. 동성애 이슈는 홍석천 씨를 통해 ‘대중’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고 해도 1990년대부터 인권운동을 전개한 활동가들의 헌신이 커밍아웃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조성했다.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아웃팅은 이런 배경에서 가능한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리수 씨가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며 방송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몇 십 년에 걸쳐 형성된 트랜스젠더 하위 문화와 1990년대 본격 시작한 LGBT 운동의 성과라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비록 하리수 씨의 등장이 트랜스젠더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단순히 이것만이 하리수 씨의 효과는 아니다. 그 논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와는 별개로 하리수 씨는 여성 범주를 다시 질문하도록 했다.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번째 숫자가 1번이었던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한다면, 그리고 완벽하게 여성으로 보이고 ‘여자보다 더 여자같은’이란 수식어를 듣는다면 누가 진짜 여성인가? 타인을 마주했을 때 (의료적 조치를 한) mtf(male-to-female)/트랜스여성과 비트랜스여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구분할 수 없다면, 사실상 본질적 범주로 여기는 여성(과 남성) 범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리수 씨의 존재가 제기한 여성 범주 논쟁을 모두가 진지하게 여기진 않았다. 일부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일군의 사람들은 하리수 씨가 여성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여성이라면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리수 씨는 그럴 수 없기에 여성이 아니란 이유를 들었다. 이런 주장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며 변하지 않은 것인 섹스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며 변할 수 있는 것인 젠더라는 섹스-젠더 구분 공식을 주장하고, 여성을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이라고 주장하며 여성 억압을 비판했던 페미니즘의 역사와 충돌한다. 임신과 출산 경험은 많은 여성의 경험일 순 있어도 모든 여성의 경험일 수 없고 여성 경험의 본질적 토대일 수 없다. 일부 장애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지 않으며 때때로 이 경험을 부정당한다(황지성). 그럼에도 임신과 출산 능력 여부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언설은 여성을 해부학적 기능, 생물학적 본질로 환원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여성 범주에 속하던 이들(임신할 수 없는 비장애여성과 장애여성 등) 중 상당수를 추방한다. 여성 범주는 하리수 씨가 아니라 하리수 씨를 배제하려는 언설을 통해 더 골치 아프고 또 곤란한 상태에 처한다.
이런 일군의 트랜스젠더 혐오 발화 혹은 여성 범주 논란에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 범주는 충분한 논쟁으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 하리수 씨는 어느 순간 그냥 여성으로 인정되고 만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란 판단에서인지, 인권 차원에서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단순하게 인정하고 넘어갈 이슈가 아니라 논쟁을 통해 더 많은 논의가 등장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곤란을 격는 건 트랜스젠더다. 하리수 씨를 간편하게 여성으로 대하는 이슈는 트랜스젠더 논의에서 제기하는 젠더 이슈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단순히 인정하고 넘어가는 순간, 비트랜스젠더의 젠더 범주, 혹은 비트랜스여성의 여성 범주는 본질적 범주로 다시 한 번 고착된다. 젠더 자체를 되묻고 질문해야 함에도 이를 차단한다. 아울러 이러한 인정은 하리수 씨처럼 여성으로 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트랜스여성만 ‘여성’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나 자신처럼,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지만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아 남성으로 더 많이 통용되는 많은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남성’으로 남겨진다. 트랜스여성 중에서 자신을 공공연하게 트랜스젠더라고 혹은 mtf라고 밝힌 사람만 여성으로 ‘인정’될 뿐이다.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흔히 트랜스여성은 여성성을 강화하며 젠더 이분법에 고착된 사람이란 비판이 있다. 그런데 하리수 씨와 같은 외모를 지닌 사람만 ‘여성’으로 ‘인정’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트랜스여성이 지배 규범적 여성성을 재강화하는 것이라기보다 젠더를 질문하지 않으면서 몇몇 트랜스여성만 여성으로 ‘인정’하는 이들이 지배 규범적 여성성을 재강화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둘째, 이런 인식은 여성과 남성을 본질적 범주로 고착시킨다. 젠더는 겉모습을 통해 단박에 파악해야 할 본질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확인해야 할 속성이다. 젠더는 피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소수 트랜스여성만 여성으로 ‘인정’하는 태도는 젠더를 단박에 포착하고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런 태도는 젠더, 혹은 여성-남성 범주 자체를 사유할 필요가 없도록 한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2 물결 페미니즘이 문제제기하려고 했던 바로 그 ‘억압’을 반복한다. ‘단순한 인정’은 다양한 문제를 은폐하며 젠더를 본질화/자연화한다.

나의 위치

기말 페이퍼를 쓰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사실은, 내가 트랜스젠더를 얘기할 때 팔 할은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은/않는 mtf/트랜스여성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나의 한계기도 하고 나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확인하며 조금은 안도했다. 행여라도 내가 보편적 위치를 점하려고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현재 한국에 의료적 조치를 한 트랜스젠더(mtf건 ftm이건) 맥락에서 트랜스젠더 이론을 전개하는 논의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의료적 조치를 한 입장에서 꾸준히 논의를 전개하고 글을 생산하는 트랜스젠더가 있으면 좋겠다. 그의 목소리가 의료적 조치를 겪은 트랜스젠더를 가장 잘/제대로 재현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좀 더 다양한 경험이 등장하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은/않는 트랜스젠더의 논의도 더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
… 결국 언제나 하는 얘기의 반복이다. 기존의 출판 형식이 블로그나 트위터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블로그에서 주로 글을 출판하지만, 그럼에도 기존 출판 형식으로 논의를 생산하는 트랜스젠더 이론가가 더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 (이런 아쉬움에 어떤 사고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사실 내가 조금만 더 활달했다면, 사람 만나는 걸 조금만 더 좋아했다면, 학제에서 공부하고 있는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젠더 이슈로 공부하고 있는 비/트랜스젠더의 네트워크를 만들었을 듯하다. 다른 형식의 공동체는 여럿 있으니 학제라는 맥락에서 어떤 식으로건 집단을 형성하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성애규범성, 불/편함과 슬픔, 그리고 장례식

2012년 10월 18일에 제출 쪽글입니다. 공개를 할까 말까를 좀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다 귀찮아서 미뤘더니 벌써 두 달도 더 지났네요. 크. ;;;
공개를 망설인 이유는 이 글이 기말페이퍼 초안에 가까운 내용이라 그냥 기말페이퍼를 완성하면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련 주제로 기말페이퍼를 쓰다보니 욕심이 생겨(혹은 기말페이퍼를 제대로 못 썼다는 속상함에) 출판을 해야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내년 중에 어떻게든 출판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초안은 좀 더 묵혀두기로 하고, 쪽글을 공개합니다.
주제는 일전에도 몇 번 공개한 적 있는, ‘트랜스제더/퀴어, 감정’입니다. 감정과 퀴어이론을 연결해서 쓴 글 중에선 가장 처음 쓴 글이기도 하고요. 물론 엄밀하게 따지만 지난 봄에 쓴 “장례식과 퀴어의 위치성”이 최초지만요. 뭐, 어떤 글이 최초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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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규범성, 불/편함과 슬픔, 그리고 장례식
-루인
이성애가 일련의 규범과 이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몸과 세계를 형상하는 감정을 통해서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를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Ahmed, 146).
“네가 번듯이 취직하고 결혼만 했어도, 그래서 외국여행이라도 보내드렸다면 네 아버지는 이런 사고를 겪지 않았고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자리를 옮긴 새벽 세 시, 친척 어른이 내게 처음 한 말이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던 그 시간, 그래서 슬픈지 슬퍼해야 하는지 어떤지 종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모든 감정, 특히 슬픔과 애도는 이성애 욕망, 이성애규범성, 이성애가족규범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조문객이 내게 공통으로 한 말, “이제는 결혼하자” “네가 결혼만 했어도…” “네 아버지가 손자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슬픔과 애도는 유족을 걱정하는 방식이고 고인을 기억하는 형식이지만, 또한 이것은 이성애가족구조를 환기하고 고인과 유족을 이성애제도의 적법한 구성원으로 소환한다.
감정은 투명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슬픔과 애도는 특히 지배 규범을 통해 재현된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가 데이비드 엥(David L. Eng)의 논의를 빌려, “9.11 이후 애도의 공적 각본은 이성애규범성의 기호로 가득했다”(157)고 말했듯, 슬픔과 이성애규범성은 얽혀있다. 슬픔은 이성애규범성을 통해 표현되고 이성애규범성은 슬픔과 애도를 매개하여 제 토대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 고인은 이성애 서사에서 획득한 것과 획득하지 못 한 것, 유족은 이성애 서사에서 제공한 것과 제공하지 못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손자를 획득하지 못 한 고인과 번듯한 직장, 결혼, 손자 어느 것도 제공하지 않은 나는 이 평가 체계에서 실패자(였)다. 나와 고인의 실패는 슬픔과 애도를 증폭했다. 울음이 넘실거리는 찰나, 조문객의 애통함은 고인의 부재 때문인지 나의 실패, 고인의 ‘실패’ 때문인지 모호했다.
그 많은 언설에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침묵이었다. 대답을 다그치는 이들에겐 마지 못 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들의 언설에 ‘대항’할 수 없었다. 이성애규범이 자연질서인 장례식장에서 비이성애 실천, 비이성애 상상력은 존재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이성애가족규범의 윤리를 통해서만 슬퍼할 수 있고 또 슬퍼해야 했다. 비이성애적 감정은 고인을 애도하지 않음, 고인의 마지막 소원마저 거부하는 불효막심함, 그리하여 장례식 행사와 공간을 망치는 망나니짓에 불과했다. 그 전까지 이성애 가족 서사에 부합하지 않는 나의 행동과 삶의 양식은 그저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에 불과했다. 장례식장에서 나의 삶은 이성애규범성을 위협할 수 있기에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는, 강하게 규제해야 할 행동이었다. 이성애 가족 구성원의 일부면서 퀴어고 트랜스젠더인 나는 애도에 참여할 수도 없고 애도에서 추방될 수도 없는 위치를 점했다.
사흘 간 장례식장에 머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도 뿐이었다. 애도할 수 있는 적법한 위치에 있지 않음에도, 규범성의 실패자로 규정되었음에도 그랬다. 할 수 있는 것이 애도 밖에 없다는 말은 다른 역할에선 배제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규범적 가족 서사에서 요구하는 ‘아들’처럼 산 적 없는 내게 모든 조문객은 이제 ‘아들’(그리하여 ‘남성’)로 살 것을 요구했다. 사흘 내내 나는 그 얘기만 들었다. 하지만 모든 장례 절차에선 주변인이었다. 내게 ‘남성’이 될 것을 요구한 모든 사람, 특히 친척 어른 누구도 ‘남성’ 역할이라 부르는 어떤 의사결정에서 내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애도의 이권 다툼에서 혹은 슬픔의 공적 전시에서 결정권자는 ‘상주’인 내가 아니었다. 장례식장에 머물지만, 애도를 주도해야 하지만 그곳에 푹 파묻혀(“sinking”) 있을 수 없었고 모두가 내게 적절히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만 원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리하여 장례식장은 내가 애도할 수도 없고 애도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장례식장과 나는 서로 부대꼈다. 부대낌은 내가 머무는 공간이 어떤 규범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생생하게 포착하도록 했다. 편하게 슬픔과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유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슬픔과 애도라면 그것은 나의 역할이 아니었다. 슬픔과 애도를 규정받았지만 슬픔의 규칙과 애도의 규범성은 나를 배제했다.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나는 겉돌았다. 그리하여 나는 슬퍼할 수 없었다. 이 불편한 감정은 슬픔을 상쇄하거나 내가 느끼는 슬픔이 어떤 제도적/정치적 감정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했다. 내가 슬퍼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라는 자리의 상실 때문인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조우한 사람의 상실 때문인가, 슬퍼하고 울어야만 제대로된 애도라고 믿는 윤리 때문인가. 아메드는 공적 공간의 이성애규범적 애도와 퀴어의 애도를 따로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별개의 사건인 것은 아니다(아메드 역시 이를 별개라고 논하는 것은 아니다). 트랜스젠더인 내게 고인을 애도하는 일은 이성애규범적 애도와 퀴어의 애도가 충돌하고 경합하는 경험이다. 이 갈등에서 그리고 불편을 느껴야 하는 구조에서 또 다른 슬픔이 밀려왔다.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이에게 이성애규범적 장례식장은 이중의 슬픔을 생산한다.
아메드는 “퀴어 정치학을 위한 도전은 슬픔의 다른 방식을 찾고 다른 이의 슬픔에 반응하는 것”(159)이라고 했다. 맞다. 현재 사회에서 슬픔은 단 한 가지 방식 뿐이다. 다른 방식의 슬픔과 애도 실천은 ‘망나니짓’에 불과하다. 그러니 슬픔과 애도에 관한 ‘다른’ 정치학이 필요하다. 이때 다른 정치학은 퀴어의 이중 슬픔을 읽는 방식을 포함할 것이다. 규범성과 얽혀 있고 섞여 있지만 완전히 용해되지는 않은 그런 슬픔이 퀴어의 슬픔이고 이 슬픔의 정치학이 규범을 상대화하고 재구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