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는 “여자보다 더 여성스럽다”는 주장은, 트랜스젠더의 특성이 아니라 비트랜스가 트랜스에게 바라는 특성이거나 비트랜스가 트랜스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특성일 뿐이다.(https://www.runtoruin.com/1695)
작년 학술대회 발표문으로 쓴 글의 일부다. 다음 주에 있을 젠더포비아 강좌를 준비하며 예전 글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잠시 쉬었다. 자기 글을 읽다가 잠시 쉬는 건 참 웃기고 남우세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잠시 멈췄다. 위 구절은 내가 늘 견지하고자 하는 인식론이지만 종종 놓치는 인식론이다. 부끄럽다.
수학을 공부하며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집합론 수업이었다. 그 수업이 집합론 수업 맞나? ;; 암튼 피아노 공리라는 내용을 배운 시간이니 집합론이 맞을 듯하다. 피아노 공리(악기 이름 피아노가 아니라, 사람 이름 피아노…;;; 아 썰렁;;;)는 여기에도 몇 번 쓴 적 있다. 쉽게 예를 들면, 1에 1을 더하면 2다. 2에 1을 더하면 3이다. 이렇게 순서대로 계속나갈 때, 우리는 10000에 1을 더하면 10001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나하나 다 검토할 수 없지만 1억에 1을 더한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학에서 이것은 공리에 해당한다. (물론 “1+1=2” 자체는 증명할 수 있는 명제다.) 수학에서 공리는 증명할 수 없지만, 수학이란 체계를 만들기 위해 맞다고 치자는 일종의 합의다. 그래서 그것이 수학적 엄밀성으로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다. 그저 수학적 귀납법에 따라 옳다가 가정할 뿐이다.
피아노 공리를 배운 시간은 매우 짧다. 기껏해야 5분도 안 된다. 수학(정확하게는 유클리드 기하학 체계 내에서의 수학)의 치명적 약점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 내용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간을 매우 선명하게 기억한다. 공리란 진리나 사실이 아니다. 사회적/집단의 합의일 뿐이다.
어떤 명제를 당연하다고 믿으며 그 명제를 전제로 삼을 때, 이후의 논의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은 당연히 여성과 남성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는 말 자체를 질문하지 않을 때, 이 명제에 따른 논의는 많은 사람을 배제한다. 물론 이 명제가 여성과 남성이란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는 사람이 아닌 어떤 ‘것’으로 배제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_-;; 질문하고 증명해야 하는 어떤 명제를 공리로 삼을 때, 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트랜스젠더 이슈로 계속 예를 들면, 나는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잘)모른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물론 모를 수 있다. 다만 의도적이고 규범적 망각이자 무지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트랜스젠더를 모르는 것이 규범적 지식이며 아는 것은 뭔가 의심스러운 지식(“너 혹시..?”)이란 점을 지독하게 잘 알기에 망각과 무지를 몸에 익힌 것 뿐이다. 이것은 내가 언제나 제기하려는 의문이고 어떤 이슈에 접근할 때 기본적으로 취하는 방법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 조차 모른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용감하지만 불안하다. 나는 무엇을 공리로 삼고 있을까? 나의 주장 역시 공리일 때, 경합하는 공리에서 나의 주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