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관계에서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권력 행사

사회적 맥락에선 ‘소수자’ 혹은 ‘비규범적 범주’라고 해서 개별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사회적 맥락에선 ‘소수자’지만 개별 맥락에선 ‘권력자’일 수도 있다.
(사회적 관계와 개별 관계가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구분하기로…)
채식이 그러하다. 몇 주 전 읽은 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채식주의자 혹은 비건은 인구의 1% 정도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 나물 음식이 많아 채식하기 좋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나물 반찬에 젓갈이나 멸치다시다, 쇠고기다시다 같은 것이 들어간다. 조개나 멸치로 국물을 낸 된장국도 채식으로 분류된다. 그러니 비건이나 채식하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별로 없다. 이런 점에서 비건이 사회적 불편을 겪는 건 사실이다. 사회가 비건에 우호적인 것도 아니다(때때로 적대적이다). E님의 지적처럼, 잡식하는 사람의 죄의식을 채식하는 사람에게 투사하는 분위기에서 채식은 피곤한 일이다. 그러니 비건도 ‘사회적 약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일 순 있다.
‘사회적 약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라고 해서 개별 관계에서도 그러할까? 이를 테면 친밀한 관계에서, 한 명은 비건이고 다른 한 명은 잡식이라면 권력은 참 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식당을 고르거나 음식을 선택할 때 기준은 거의 항상 비건일 수밖에 없다. 잡식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선택하면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별로 없지만, 비건을 기준으로 선택하면 잡식하는 사람도 대충 다 먹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비건의 생활양식에 호응하는 잡식하는 사람의 태도를 음식감수성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관계와 권력에 민감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이 관계에선 채식하는 사람이 (반드시 부정적이진 않다고 해도 때때로 일방적)권력을 행사한다고 말하고 싶다.
친밀한 개별 관계에서, 특정 한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이 관계를 엮어가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그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어쨌거나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상대방의 어떤 선택 가능성을 차단하는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잡식하는 사람이 비건과의 관계에서 변해가는 삶의 태도, 혹은 비건의 지향점을 위해 잡식하는 사람이 동조해야 하는 상황을 두고, 친밀성이 만든 따뜻한 변화라고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왜 채식하는 사람 혹은 비건은 어떤 변화를 실천하지 않고 잡식하는 사람만 어떤 변화를 실천하는가? 나는 이 질문을 던지고 싶지만, 정작 내게 어떤 마땅한 대답이 있는 건 아니다. 개별 관계에서 비건이 실천하는/행사하는 권력이 없다고,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는 말만 할 뿐이다. 그리고 내겐 그저 고민만 쌓여간다. 여전히 비건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고민은 알리바이용인지도 모른다.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관계에서도 비슷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사회적 인식에서 트랜스젠더는 대개 사회적 약자/소수자로 표상된다. 그래서 연애관계나 어떤 친밀한 관계에서 트랜스젠더가 연애파트너인 비트랜스젠더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계속 얘기할 순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비트랜스젠더 애인에게 떠넘기는 형식이라면?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관계에서 트랜스젠더가 겪는 어려움은 고려되는데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어떤 어려움은 고려되지 않는다면? 비트랜스젠더의 다른 어떤 어려움이 아니라 트랜스젠더의 애인이란 위치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움이 있는데도 이것이 논의되지 않는다면? 이 관계에서도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약자’이기만 할까? 적어도 이 관계에서만은 트랜스젠더가 어떤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 비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의 상황을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은폐된’ 억압을 겪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어떻게 트랜스젠더와 사귀느냐’와 같은 사회적 인식이 야기하는 폭력, 트랜스젠더와 관계를 맺어가며 끊임없이 긴장하거나 걱정해야 하는 고민(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트랜스젠더의 어떤 태도에 문제제기하려고 해도 그것이 행여나 혐오발화로 오독/오인될까봐 혹은 트랜스젠더 애인의 삶을 이해 못 하는 무정함/무지로 독해될까봐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상황 등이 있다. 이것은 어딘가에 말하기도 쉽지 않다. 적어도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 지점을 말할 담론의 장은 없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인 애인이 비트랜스젠더인 애인의 고민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타자성을 이용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 아닐까?
나는 사회적 억압 이슈를 개별 관계에서 풀어버리는 많은 폭력 중 하나로 위의 고민을 위치 지으며 줄곧 고민을 이어갈 수 있을까? 개별 관계에서, 이것이 사회적 맥락과 동떨어지진 않는다고 해도 바로 이 사회적 맥락 때문에 권력으로 행사될 수 있는 비규범적 지위를 계속해서 고민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이 어떤 알리바이, 혐의를 남겨두기 위한 면피용일까봐 두렵다.

애도의 권력

집시들은 나치가 몰락한 뒤 다시 한번 주변화되었고 박해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25만 명의 집시들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모스, 326.

트랜스젠더건 다른 어떤 변태건 마찬가지인데,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는 언제나 어떤 권력을 실천하는 것과 같다. 모든 죽음이 애도되지 않고, 언급되지 않는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는 문제지만, 만약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에서 유태인이 경제계에서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그때도 그렇게까지 애도했을까? 만약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의 경제권을 집시의 유족이 쥐고 있었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익숙한 질문이다. 던지는 질문도 익숙하다. 모든 죽음이 애도되지 않는다. 죽음을 드러내고 애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망자의 권력을 가늠케 한다. 매우 우울한 일이다.

[논문] 저항의 맥락화: Lila Abu-Lughod “The Romance Of Resistance”

관련 글: 저항의 낭만화(한나님의 글)

※카테고리는 그다지 신경쓰지 마세요;;;;;

저자: Lila Abu-Lughod
제목: The Romance of Resistance (여기)
출처: American Ethnologist, Vol. 17, No. 1. (Feb., 1990), pp. 41-55

종종,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어디서 들어본 것, 혹은 언젠가 어느 수업 시간에 배운 것만 같은 것일 경우,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서 아는 척 하려는 루인과 만난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무섭다고 느끼는 건 익숙해지는 것이다. 학년 구분 없는 수업시간에 4학년이 1학년 보다 유리한 점은 4학년이 1학년 보다 더 많이 안다거나 책을 더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답안을 작성하는 방법, 공부를 하는 방법 등이 익숙할 가능성 때문이다. 전공수업일 경우엔 그 전공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에, 1학년 보다는 4학년이 더 익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무서운 건 이 지점이다.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자주 듣다보니 자주 접하다 보니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맥락인지 모른체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 그렇게 익숙하기만 할 뿐인데 마치 안다고 믿게 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일테면, 젠더라는 단어가 그렇다. 여성학 수업을 몇 번 듣고 나면 혹은 여성학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고 나면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익숙해서 그저 일상어처럼 사용하기 쉽다. 루인 역시 너무도 자주 그러하고. 하지만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의 어떤 맥락을 알고 있다는 걸까?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자주 사용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는 언어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던 이유엔 “젠더”라는 단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루인의 전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전히 젠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여성학기초 과목을 들으면 젠더를 아주 간단하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으로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지만, 당시 기말 답안지엔 이 문장을 A4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적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선 이토록 단순한 설명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요즘의 고민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위에 링크한 한나님의 글을 읽으며,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행위성을 안다고 착각했지만, 그동안 무얼 안다고 믿었던 걸까.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싶었고, 얼추 일주일 전 즈음에 이 논문을 읽었다. 그러며 남은 화두는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라는 말.

뒤통수를 맞은 것만 같은 느낌은, 이 말에서 비롯한다. 그동안 행위성 혹은 저항을 한 개인이 그 사람의 맥락에서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읽으면서, 그것이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전복”이란 의미가 아님은 분명히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권력의 작동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고민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항 혹은 행위성을 통해 권력의 징후를 읽어 내지 않았다면/않고 있다면, 도대체 무얼 안다고 믿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한다는 말 혹은 어떤 앎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렇게 작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이론적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하는 건 언제든 자신을 투명한 위치로 간주할 위험성이 있고, 자신이 무슨 문제를 범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는 말은 무겁게 다가왔다. 어떤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은 이것에서 비롯한다.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 들었던 그 복잡한 감정-혹시나 공포범죄를 경험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이런 불안이 싫음과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은 정확하게 이런 감정이 발생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옷이라는 것, 옷을 입는다는 것의 의미와

저자의 또 다른 지적은 저항이란 언제나 맥락적이라는 지점이다. 즉, 모든 저항의 행위가 모든 문화적인 가치를 전복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선 저항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다른 지점에선 권력을 지지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트랜스젠더는 성별이분법을 강화한다는 말과 성별이분법을 초월한다는 말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 하리수를 향한 비난 중 하나는 하리수는 이성애 성별이분법을 더욱더 강화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의 비난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민등록번호 1번/3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1번/3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주민등록번호 2번/4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2번/4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이런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에서 하리수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했다. 성별 혹은 젠더가 (어떤 의미에서) 임의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것으로 느껴졌지만, 방송을 통해 하리수는 이른바 “여성”이라는 그 어떤 이미지를 “여성보다 더 여성답게” 재현했고 그래서 기존의 성별이분법을 더 강화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하리수의 행동은 동시에 이른바 “여성성”(혹은 “남성성”)이라는 젠더가 몸에 부착해 있는 본질적인 속성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처럼 저항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Abu-Lughod는 이걸 훨씬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 ㅠ_ㅠ)

그러니 저항 혹은 행위성은 맥락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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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Butler가 현상학을 비판하는 지점 역시 이 지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버틀러의 글 혹은 이론은 현상학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버틀러는 종종 현상학을 비판하는데, 현상학은 담론이 작동하는 측면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 말이 현상학으론 담론의 작동을 얘기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버틀러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은 Abu-Lughod가 저항을 낭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말고 권력을 징후하는 것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제안과 상당히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