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분류와 윤리에 관한 잡담

01
사실상 초안이 있는 원고를 수정해서 투고하는 일이라고 해도 처음 쓰는 것처럼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초벌원고가 있다고 글쓰기가 쉬운 건 아니다. 기획이 달라지면 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래서 마치 첫 문장부터 새로 쓰는 기분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완성할 수 있을까? 부득이한 상황으로 사전 협의하여 마감 일정을 연기한 적은 있어도 대책 없이 마감을 못 지킨 적은 거의 없으니 이번에도 마감은 지키겠지만 글 수준이 걱정이다. 더군다가 실제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되는데.. 끄응…
02
영화 <내가 사는 피부>를 분석하여 작년 문화연구학회에 발표한 원고를 일부 수정해서 2월 초에 투고했는데 20여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하긴 지금 결과 통보가 오면 더 곤란하니 다행인 걸까… 그러고보면 벌써 결과 통보가 올 리도 없구나…
영화는 정말 재밌지만, 분석 글은 얼추 1년 동안 붙잡고 있었더니 좀 지겹다. <내가 사는 피부> 분석을 3부작으로 기획했는데 최소한 올 해 안엔 쓰지 않을 듯하다. (이렇게 말하고 2부를 올 해 쓸 수도 있지만;;; )
03
어떤 경로를 통해 모 학술대회 원고 발표자로 내정되었다고 곧 연락이 올거란 말을 들었다. 두근두근. 내정했지만 역시나 수준 미달 발표자란 사실을 간파하고 취소했을 수도 있고… 후후. 근데 주제가 뭐지? ㅠㅠ
04
투고한 원고에 자기 소개 문구를 쓸 때면, 연구활동가라고 표기한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둘은 결코 충돌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연구자 정체성과 활동가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할 일이 생겼다. 연구자로서 참고문헌, 1차 자료는 상당히 중요한 정보라서 쉽게 공개하기 어렵다. 글을 쓰는데 중요한 아이디어이자 원천이라 내가 욕심을 내는 어떤 글을 완성하기까지는 꿍쳐둘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활동가로서 내가 가진 기록물 중 귀하거나 찾기 쉽지 않은 건, 공유할 수록 좋다. 내 활동의 주요 영역이 아키비스트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연구자로서도 공유는 좋은 일이지만 활동가로서 정보 공유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구분하고 판단한다.
그런데 여기서 충돌한다. 어떤 결정이 최선일까? 물론 언젠간 공개할 거다. 그것이 언제냐가 관건이라면 관건.
05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트랜스젠더 관련 도서를 정리하기로 했는데…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을 트랜스젠더 관련 도서로 분류하자.. 한 부치께서 정서적 저항감을 표현하셨다. 이렇게만 쓰면 혐오처럼 읽히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소설의 주인공이 워낙 부치와 감정적 정서적 공명이 깊은 인물이라 이에 따른 복잡한 감정의 표현이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까? 내가 트랜스젠더 텍스트로 철썩 같이 믿고 열렬히 애호하는 있는 작품을, 누군가 전혀 다른 범주 텍스트로 분류할 때 느낄 어떤 감정일 테고. 충분히 가능한 감정이자 표현이고 그래서 더 재밌고 많은 논의가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고독의 우물>은 부치 레즈비언 텍스트로 분류할 수도 있고 ftm 트랜스젠더 텍스트로 분류할 수도 있다. 범주 분쟁의 한 가운데 있는 책이랄까. 최종 판단은 어떻게 될까?
근데 난 <방한림전>도 트랜스젠더 관련 도서로 분류하고 싶다는… 후후후.
06
존재해선 안 되는 기록물이, 전량 파기하기로 약속했고 그래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록물이 5-6년 뒤 갑자기 발견되었다고 하자. 그땐 파기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최선이었다. 시간이 5-6년 지난 뒤 지금은 그 결정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그때 왜 그랬을까 되물을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 기록물이 일부 발견될 때 그 기록물은 지금이라도 파기해야 할까 아님 비공개로 조용히 보관해야 할까?
07
여성 범주는 하리수 씨가 아니라 하리수 씨를 배제하려는 그 언설을 통해 더 골치 아프고 또 곤란한 상태에 처한다. 범주 논쟁이란 이런 거다.
08
크롤러의 문제.
어느 잡지에 트랜스젠더와 페미니즘 관련 특집호가 실렸고 며칠 전 그 자료를 모두 긁었는데… 확인하니 2년 전에 이미 긁었더라… 같은 기록물을 두 번 모았다… 아우, 바보. 이것이 크롤러의 문제. ;ㅅ;

방콕, 기말 페이퍼 기간

지난 목요일 오전에 학교에 잠깐 갔다가 오후에 집에 들어온 이후 계속 집에 있다. 현관문 밖으로 일절 안 나가고 있다. 기말 페이퍼 기간이라 콕 틀어박혀 계속 논문 읽고 정리하고 글 쓰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조금 전 한 편 끝냈고 이제 마지막 하나 남았다.

학기 초만 해도 이런 기말을 예상하지 않았다. 일정이 꼬였는데 근본적 이유는 이번 학기에 세 과목을 들었다는 점이다. 주 5일 알바를 하면서 세 과목을 듣는 와중에 기말 페이퍼를 미리 준비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단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조율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수강취소기간에 하나를 취소할까 했지만 한 달 들은 것이 아까워 그냥 뒀더니 지금 이 모양. ㅠㅠㅠ 수업 듣는 날을 포함해서 한 과목 수업 준비에 이틀이 걸리니 세 과목이면 엿새가 필요하고 여기에 알바까지 감안하면… 다음부턴 반드시 두 과목만 듣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그래야 제대로 된 기말 페이퍼를 쓸 수 있다.
암튼 마지막 남은 기말페이퍼를 단 며칠 사이에 A4지로 15매 분량의 글로 써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정이지만 기말페이퍼 기간엔 초인 같은 힘이 생기는 걸. 후후. 물론 글의 질은 보장 못 합니다. 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게 가장 속상하다. 글의 질이 엉망일 게 뻔하단 점이 가장 속상하다.
아무려나 지금 바깥 날씨가 추운지 더운지(음?) 모르겠다. 그냥 방구석에 콕 박혀 바람만 괴롭히면서 기말페이퍼를 쓰고 있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도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즐겁다. 며칠 전 수업 뒷풀이 자리를 가졌는데 선생님께서 요즘 에로스 지수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이른바 에너지 지수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듯한데, 100을 기준으로 난 85-90 사이라고 말했다. 기말이라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말이라서 오른 것이다. 기말이 아니었다면 80 전후였을 듯. 글을 쓰는 시간, 글을 써야 하는 일정이 있으면, 그 촉박한 일정과 내 글의 한계에 엄청난 자괴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힘이 난다. 힘이 나는만큼 글도 잘 쓰면 좋으련만.. 엉엉엉.
암튼 내일 오전엔 집 근처로 산책이라도 좀 해야겠다. 너무 집에만 있으니 환기가 필요하다. 기분 전환도 필요하고. 오래 돌아다닐 수 없으니 10-20분 정도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아, 그리고 1월 3일 사고를 칠 예정이다. 뭔가 중대 발표할 거다. 물론 귀찮거나 까먹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크. ;;; 박근혜도 대통령이 되는 시대에 나라고 못 할 게 뭐냐 싶어 일단 지르기로 했다.

퇴고의 즐거움 + 책이 나오긴 할 텐데…

15일까지 급하게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있다. 사실 급하게 마감하면 안 되는데 멘붕 같은 일이 생겨 그렇게 되었다. ㅡ_ㅡ;;; 암튼 8월 초부터 글쓰고 퇴고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데…(라는 건 거짓말. 그 사이에 책장 정리도 조금 했고 부산에도 2박3일 갔다 왔다, 내일은 세미나도 있다;; )

원고지 150매 이내로 써야 하는 글인데 열흘 정도 시간 동안 ‘제대로’ 완성할 수는 없는 법. 그럼에도 완성해야 하는 상황. 다행이라면 그 전에 원고지 60매 분량의 초고가 있었다. 초고 내용을 확장하고 빠졌던 부분을 보충하는 식으로 얼추 이틀 만에 150매 분량을 만든 다음 계속해서 수정하고 있다. 아울러 다음주에 친구가 원고를 한 번 검토해주기로 해서 조금은 안심하고 있기도 한데…
퇴고하면서 좀 웃긴 것이… 초벌 원고에서 ㄱ문장과 ㄴ문장 사이에 좀 더 조밀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서너 문장을 추가한 곳이 여럿있다. 그런데 추가한 문장을 ㄱ, ㄴ문장과 조금 더 잘 어울리고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수정하다보니 결국 ㄱ문장과 ㄴ문장만 남았다. ㅡ_ㅡ;;; 추가한 문장을 모두 덜어냈다는 얘기. 혹은 ㄱ문장+추가한 서너 문장+ㄴ문장을 버무려서 두어 문장을 전면 수정하거나. 크크크.
아울러 초고에 추가하며 멋들어진 문장을 몇 개 썼는데 그 중 상당수를 지웠다. 내용과 안 맞거나 했던 얘기 또 하는 느낌이거나 굳이 없어도 무방하거나. 솔직히 아쉬워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지만(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퇴고하며 살린 것도 있지만) 이런 욕심이 가독성을 떨어뜨리거나 난잡한 느낌을 줄까봐 염려되어 뺐다. 지금 내 수준에 문장 멋 낼 상황은 아니잖아. 내용 전달이라도 제대로 하면 다행이지.
지금 글이 출판될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서 내용과 관련해서 밝힐 수 있는 게 없네… 출판되길 바라고 있지만 어떻게 될까나…
글의 완성도는 아직 모르겠지만 한 가지 자부하는 것은 있다. 이 글이 출판된다면 아마도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인식론으로 작품 분석을 시도한 첫 번째 글이지 싶다. 작품 속 트랜스젠더 인물을 분석한 논문은 더러 있지만 트랜스젠더 인식론으로 작품을 분석한 글은 못 읽은 듯하다. 물론 나의 공부가 짧아 모든 논문을 다 검토한 것은 아니니 이렇게 단언할 순 없지만(혹시나 있으면 제보 부탁해요!).
아무려나 글을 쓰는 과정은 언제나 즐겁다. 자학하는 과정,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과정조차도 즐거운 시간이다.
+
2010년 가을부터 겨울, 알라딘-자음과모음 인문웹진에 다른 분들과 함께 글을 연재했지요. 기억하시나요? 전 화학적 거세를 괴물과 엮어서 썼고요. 그 글이 드디어 책으로 나올 듯합니다. <성의 정치, 성의 권리>란 제목이고요. 그 사이 내용을 좀 수정해서 웹진 연재 판본과 단행본 판본은 좀 달라요. 전면 뜯어고친 부분도 있고요. 흐흐흐. 한 동안 출판사에서 방치했는데 ;ㅅ; 출판사 교정 작업에 들어갔고 저자소개도 넘겼으니 오는 가을엔 정말 나오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책이 나와봐야 바뀌는 것은 저자의 이력서 한 줄 뿐. 출판과 관련한 일을 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기분이 복잡해요. 출판한다는 것은 어떤 실천일까요? 정말 출판 작업은 운동일까요? 어떤 출판이 운동일까요? 정의와 관련한 책을 내고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또 고민을 좀 바꾼다고 해서 꼭 운동은 아니니까요.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준 이웃 D에게 고마움을 전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