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일정, 고민, 욕심

4월부터 6월까지 총 여섯 개의 원고(기말페이퍼 하나 포함)를 마감해야 하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순전히 거절 못 하는 나의 성격이 야기한 문제고, 그동안 빚진 걸 갚느라 발생한 문제기도 하고, 내 욕심이 빚은 사태기도 하다. 그래서 하반기엔 따로 더 원고를 쓰지 않겠노라고 다짐에 또 다짐을 하고 있다. 8월 말이 마감인 잡지에 원고를 투고할지 말지를 결정해서 알려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는데, 여기에 답을 미루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상반기 내내 원고를 쓰고 있다보니, 든 것도 없는 통에서 뭔가를 억지로 긁어내는 느낌이랄까. 물론 글을 쓸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는 고마운 일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는 즐거운 일이고. 그럼에도 나 자신을 좀 채운 다음에 퍼내야 하는데, 채우기도 전에, 숙성하기도 전에 급하게 퍼내기만 하니 더 이상은 아니다 싶다. 그래서 하반기엔 기존 일정을 제외하면 추가로 원고 작업을 받지 않을 예정이다(과연… 원고료를 준다면 무조건 쓴다에 한 표;;; ). 백과사전 작업도 진행해야 하니 시간을 비워둘 필요도 있다.
그런데… 더 이상 쓸 얘기도 없겠다 싶었는데, 쓰고 싶은 주제가 생겼다. 두둥… ㅠㅠㅠㅠㅠㅠ 아,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물론 당장 급하게 출판해야 하는 주제는 아니다. 그냥 혼자 묵혔다가 천천히 내도 괜찮은 주제다. 잘 묵혔다가 나중에 급하게 내야 하는 원고가 생기면 그때 활용해도 되는 주제다. 그럼에도 또 쓰고 싶은 주제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또 다른 주제가 생겼다고 그냥 이번에 출판할까를 고민하는 꼴이라니… 아휴..
그럼에도 이번엔 정말 참아야지. 이렇게 다짐하는데엔 작년 초부터 기획하고 있는 일이 또 하나 있는데 박사과정 진학을 핑계로 전혀 못 하고 있어서다. 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 진행을 하면 좋겠는데.. 아, 그러고 보니 퀴어이론독본도 내고 싶다고 했는데.. 아니, 그 전에 백과사전도 계속 진행을 해야 하는데… 끄악…

언급하지 않는 전략의 글쓰기

고의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전략 혹은 그런 글쓰기를 훈련하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작년과 올해 초에 쓴 여성범주논쟁 관련 글에서, 제가 페미니즘의 역사로 설명한 이론가들 대다수가 퀴어이기도 합니다. 다만 글 전개에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어 언급하지 않았고 글의 효과를 위해 일부러 언급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버틀러는 그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설명하지만 많은 이들이 퀴어이론가로 부르는 것처럼, 퀴어이자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때때로 ‘퀴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 경우 페미니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논의임에도 ‘페미니즘 vs 퀴어이론’이란 말도 안 되는 이항대립에 따라 퀴어이론은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반응하고요. 혹은 ‘그건 그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퀴어이론가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반응하거나요. 전 그 이론가가 페미니즘 이론 맥락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설명하고 싶은데 ‘퀴어’란 수식어를 사용하는 순간 제 설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 싶어 일부러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쓰고 있는 글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며 시작했습니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버틀러는 언급하지도 않고 인용하지도 않으려고 했습니다. 버틀러라는 이름이 가지는 묘한 효과가 있거든요. 섹스-젠더 개념 논쟁에서 버틀러의 매우 중요한 위치와 논의를 다루려고 하지만, 버틀러를 논하는 순간 비퀴어/비트랜스페미니즘과는 무관한 논의로 취급하는 어떤 분위기가 있으니까요. 특히나 퀴어 이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다수인 듯한 저널의 특성을 감안할 때 버틀러를 언급하는 순간, 제 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는 염려를 했습니다. 물론 버틀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요. 어떻게 버틀러를 언급하지 않고 섹스-젠더 논의, 주체 구성 논의를 전개할 수 있겠어요. 아울러 제 논의는 이미 트랜스젠더 이론을 밑절미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아웃! 크.
예전엔 이런 식의 누락이 문제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페미니즘과 여성학에서 논하는 많은 이론가가 퀴어이기도 한데 이 사실은 누락된다는 점에서, 한국여성학의 이성애(중심)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고의로 누락하는 전략을 고민하면서, 누락이 반드시 배제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야 할 얘기를 누락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특정 범주 명명만 언급하지 않을 뿐인 거죠. 그럼에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닙니다. 진정 이런 전략 뿐인가,라는 어떤 유쾌하지 않은 상태가 몸 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 걸까요…

내가 쓴 글, 선언문

[어쩐지 미리 써둔 글이 이것 뿐이라… 다른 글을 올리고 싶었는데… 흠.. 흠…]
현재 이 블로그의 writing 메뉴 ‘루인의 글’ 목록엔 첫 번째 글로 “트랜스젠더 선언문 1/2”을 올려뒀다. 하지만 루인이란 이름으로 처음 쓴 글은 선언문이 아니다.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룬 첫 번째 글 역시 선언문이 아니다. 이랑 시절 쓴 글 중 트랜스젠더 이슈와 직간접 관련 있는 글이 몇 편 있다. 루인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쓴 글도 몇 편 있고(글을 읽는 순간, 이건 ‘루인이 썼구나’ 하겠지만… 하하 ;; ). 그 글을 목록에 올릴지, 선언문 이전 시대의 글로 그냥 덮어 둘지 고민이다. 물론 이건 나만의 고민이고 관심 있는 분은 거의 없을 듯;;
고작 나 따위에게 00시대 이전, 이후란 구분을 붙이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구분을 하는 건 “선언문”이 나 자신에겐 상당히 의미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해서 작정하고 쓴 첫 번째 글이기도 하고, 석사 지도교수와 사제의 연을 확정해준 글이기도 하고, 지혜 선생님과의 인연을 맺어준 글이기도 하다. 그 글 한 편에만 다양한 역사와 의미가 담겨 있다. 다들 그런 글 한 편 정도는 있지 않나? 잘 쓴 글은 아닌데, 잘 쓴 글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문제가 될 소지가 많을 수도 있는데, 그 글에 다양한 사연이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글. 실체는 파묻어 없애버리고 싶다고 해도 그 글이 존재했다는 기록만은 꼭 남겨두고 싶은 글. “선언문”이 내게 그렇다.
언제 용기를 내서 한 번은 다시 읽어봐야 할텐데… 용기가 안 나네.. ㅠㅠ
뭐, 이렇게 말해봐야 현재 비공개로 묶여 있고 실제 읽은 분이 몇 안 되니 이곳에 오시는 분들껜 의미 없는 넋두리에 불과하겠지만..
다른 한편, 이랑 시절의 글은 이랑에서 운영한 웹진에 올렸고, 웹진은 벌써 오래 전에 사라졌고, 웹진에 올린 글 중 몇 편만 인쇄 형태로 남아 있다. 인쇄 형태로 남은 것 중 일부는 전문이 아니라 발췌 판본이다. 찾아봐야겠지만 내게도 최종본이 없을 가능성이 크달까. 물론 다행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지만.. 으하하. ;;; 역사 조차 지우고 싶은 건 아니지만 흔적은 없애고 싶은 글 하나 정도는 다들 있지 않나요… 전 지금까지 출판한 모든 글을 회수하고, 사람들 기억에서 소거하고 싶어요.. 그래서 루인이란 사람이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글은 썼다고 하는데 무슨 내용인지 아는 사람은 없으면 좋겠어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