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는 규범적 의미에서 무질서하고 엉망진창이며 폴리아모리이며 폭력의 규범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런 다정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정이는 여러 번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그 중 한 번인가는 다시 시작한다. 다른 경우에는 다시 시작하는데 실패한다. 그리고 다정은 불안할 때마다, 곤란할 때마다 하나 둘 셋을 센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것은 시작할 때 쓰는 구호이기도 하다고 했다. 하지만 다정이는 하나둘셋 구호를 백번은 외쳤다. 다정은 다시 시작했을까? 다시 시작하고픈 다짐이었을까?
이제 너무도 진부한 회귀물의 경우, 다시 시작하는 이들은 아는 자, 질서를 완벽하게 재조정하는 자이다. 미래를 알고 성공의 지름길을 알며 타인의 행동 패턴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아는 미래를 대비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활용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바꾼다. 타인의 변수는 계산 속에 있거나 통제 가능하다. 다정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한 인생은 이전보다 괜찮을까? 오히려 고통과 최악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다시 시작할게요라는 대사 혹은 간절함은 오히려 불안하며, 리셋의 안정감이나 문제 해소를 위한 외침이기보다 슬픔과 미안함의 중첩으로 읽힌다. 이전의 실패나 엉망진창인 상황을 그대로 혹은 더 나쁜 방향으로 다시 시작한다면, 그건 무엇일까?
여기서 이 연극의 절망적인 희망편이 등장한다. 암울하지 않기 위한 억지의 희망이 아니라 암울함-희망이다. 엉망진창을 되풀이하는 것이 다정의 욕망이라면? 모든 것이 다 망했다는 그 상황이 다정을 추동하는 힘이라면? 그럴 때 다정은 오히려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정은, 우울증은, 감정적 고통은, 그 끔찍함을 다시 시작할 수/견딜 수 있을까.
그러고보면 다시 시작하는 지점은 또 어디,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