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학? 당사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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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포럼 혹은 토론회 자리에서 꽤나 재밌는(?) 일이 있었다. 사실 그 일로 적잖은 사람이 상처 받았을 듯한데…

어떤 사람이 성적소수자의 어려움을 말했고, 그로 인해 논의가 촉발됐다. 근데 그는 성적소수자의 어려움을 논하려는 이에게 당신이 성적소수자냐고, 성적지향이 뭐냐고 대놓고 물었고, 곧 이건 아웃팅이죠,라며 냉소했다.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었고 적잖은 사람이 그의 말에 화를 냈지만 누구도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성적소수자 이슈는 성적소수자만 말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였고, 그렇잖아도 민감하다고 불리는 이슈 중 하나인 성적소주자 이슈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토론하기 힘든 이슈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LGBT나 퀴어 등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이가 없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상당히 많았음에도 그는 마치 자신만이 성적소수자인냥 말했다. 할 말이 너무 많았고, 행사가 끝날 즈음에야 간단하게 나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말은 안 했지만, 난 그가 일 년 뒤에도 그렇게 말할까 궁금했다. 모두는 아니지만 적잖은 사람이 당사자주의에 경도될 때가 있으니(나 역시 그랬고), 지금이 그런 시기라고 믿고 싶다. 진화론적 변화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당사자주의의 문제를 인식하고 태도가 변할 거라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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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든 많은 고민 중엔 누군가가 당사자주의를 고집하고,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당사자이길 요구할 때, 소위 말하는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였다. 너무 강하게 당사자주의를 요구할 때, 그 당사자 범주에 속하는 이는 말하기 싫어진다. 하지만 주변에선 당사자에 해당하는 이가 말하길 기대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LGBT/퀴어 이슈가 아닌 다른 이슈에선 해당 운동에 속하는 이가 말해주길 바란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내가 말하는 게 참 부담스러웠고, 망설여졌다. 그가 요구한 당사자주의에 말리는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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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민 중 하나는, ‘어떤 범주의 이슈는 해당 범주에 속하는 이들만 말할 수 있다면(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이슈는 트랜스젠더만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운동을 왜 할까?’다. 당사자가 말하면 비당사자는 얌전히 듣고만 있길 바란다면, 당사자의 말에 누구도 반론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한다면 운동이 왜 필요할까? 이런 상태는 운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혼자 떠드는 것과 같으니까. 그냥 웹에 블로그나 트위터 계정 만들어서 혼자 열심히 떠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단상이지만.. 이번의 논란이 내게 당사자주의와 운동/활동을 다시 고민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채식과 채식주의는 반드시 일치해야 할까?

종종 채식을 채식주의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걸 알고 나면, “채식하세요?”라고 묻기보다는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다. “주의자ist”라는 무거운 접미사를 사용하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주의ism란 부담스러운 접미사를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채식을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채식주의에 반드시 채식이라는 행위가 필요한 걸까? 채식을 해야만 채식주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채식을 하는 사람에게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 건, 채식을 하는 사람은 어떤 계기와 정치적 신념 같은 게 반드시 있다는 선입견 때문일 터. 여기서 선입견이란 말이 반드시 부정적인 늬앙스는 아니다. 그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채식이 소비되고 유통되는 어떤 방식이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일 뿐. 채식은 어떤 신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통념은 채식과 채식주의ism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 둘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있을까?

언젠가 이곳 [Run To 루인]에서 “육식하는 채식주의자vegan”란 상상력으로 채식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했을 때(http://goo.gl/amhT 심심하면 http://goo.gl/q2zP 도;; ), 나는 동물과 식물이란 구분 자체를 문제제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려 3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이와 관련해서 고민을 더 진전한 건 아니다. 채식은 내게 그냥 습관일 뿐, 채식이 매우 분명한 정치학으로 내 삶에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곤 한다. 적어도 혼자 다닐 때,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냥 안 먹는 게 많은 사람일 뿐이다. 농반진반으로 나는 편식주의자일 뿐이라고, 정치적으로 편식한다고 말하면서. 하하.

그렇다고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라는 구절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니다. 고민하지 않을 뿐, 이것은 나의 몇 가지 화두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 다시 든 고민은, 채식과 채식주의가 반드시 일치해야 할까? 그러니까 요즘 들어 나의 고민은 채식이라는 어떤 행위와 채식주의라는 어떤 인식론을 구분할 수 있다면(한시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채식을 하지 않는다고 채식주의자로 자처하지 못 할 이유는 뭔가?’다. 이런 고민은 몇 해 전에 읽은 한 선생님의 글이 떠오르면서 촉발했다. 중산층인 대학 교수는 맑스주의자일 수 있는데, 페미니즘/페미니스트는 여성이라는 특정 젠더로 제한하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적인(혹은 논쟁적인) 인식이라고 지적한 글이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당사자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어떤 운동은 소위 말하는 ‘당사자’만 할 수 있는가? ‘당사자’는 정말 자신의 ‘경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걸까?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운동은 트랜스젠더만 해야 하는 걸까? 트랜스젠더는 정말 트랜스젠더 운동을 가장 잘 할 수 있고, 트랜스젠더 이론을 만드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할까? 당사자 정체성이라는 것이 분명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만, 앞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당사자와 비당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고민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예 당사자주의에 바탕을 두고 질문하면,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의료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사자 앞에서 나는 당사자이기 힘들고, 트랜스젠더는 당연히 이성애자며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당사자 앞에서 나는 곤란한 당사자거나 당사자이기 힘들다. 이럴 때 누가 당사자일까? 간단하게 말해 어떤 경험이나 (정체성)범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다시 채식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채식주의자일 필요는 없고, 채식주의자가 반드시 채식을 할 필요도 없다고 믿는다. 물론 이 말이 성립하기 위해선 채식과 육식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어디서부터는 채식이고 어디서부턴 육식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만(http://goo.gl/q2zP). ;;; 채식과 채식주의를 구분하려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의 현재 상황 때문이다. 나는 과거엔 어떤 이유에서 채식을 했지만, 지금은 그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가 현재로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서, 현재의 내겐 채식을 시작한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아울러 나는 내가 채식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대충 먹는 사람이라고 말하길 더 선호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 나는 채식주의자에 해당한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범주와 다른 사람들이 내게 붙여주는 범주 사이에서(물론 타인이 붙여주는 범주를 내가 사용할 때도 적지 않지만;; ) 갈등하며, 새롭게 든 고민은 ‘채식 혹은 채식주의가 당사자주의일 필요가 있을까?’다. 그래서 채식과 채식주의라는 구분을 설명하는데,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표현이 다시 한번 유용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채식주의라고 불리는 어떤 인식론, 세계관은 뭘까? 글쎄.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다. 비건인 사람도, 육식을 하는 사람도 모두들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설명하면서 서로 열심히 논쟁하다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