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는 걸 느끼는 건, 연구실이 시원해서만은 아니다. 사무실 문이 바람에 왔다 갔다 해서만도 아니다. 루인 책상의 책장에 끼워 둔 무지개깃발이 펄럭여서만도 아니고. 예전에 쓴 적이 있는 사무실 창문 너머의 풍경 덕분이다. 바람이 불면, 사무실 창문 너머에 있는 작은 언덕의 울창한 나무들, 나뭇가지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 바람과 나무-나뭇가지-나뭇잎들이 서로 몸 부비는 소리가, 조금은 무시무시하면서도 시원하고 즐겁게 들리기 때문이다. 길을 걸을 때의 바람은 머리카락을 통해 느끼지만, 연구실에 있을 때면 바람-나무의 소리로 느낀다. 이럴 때면, 이렇게 바람-나무의 소리를 눈을 감고 듣노라면, 지금 여기가 서울의 도심이 아니라 어릴 적 모계/부계 할머니 댁에 놀러간 날의 어두운 밤과 같다. 시골집 뒷산의 나무-바람 소리, 뒤뜰의 대나무-바람 소리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