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프레임에 갇힌 글

‘우연히’ 어떤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냥 넘어갈까 하는 고민도 잠시하였습니다. 제가 이 글에 어떤 언급을 하면 뭔가 이상하게 연결시킬 분들이 계실 수도 있어서요. 하지만 글이 매우 (논쟁적이 아니라!) 문제적이라 짧게 말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의견을 덧붙이는 건, 행여나 해서 찾아본 트위터의 언급이 더 문제가 많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원글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추정하는 글인데 부연설명이 더 곤란해서, 원글 중심으로 의견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보통은 원문을 그대로 퍼오지 않는데 글이 짧을 뿐만 아니라 전문을 먼저 읽어야 해서, 원저자의 동의 없이 퍼왔습니다. 펌이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아울러 가급적 링크를 따라 가셔서 원문을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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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CO @mecovibre

질문: 바이는 회색분자의 운명을 못 벗아 나는 건가요?

답변: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부에 바이포빅한 분위기가 있지요. 그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 바이도 많고요. (물론 바이를 자처함으로써 정체감 형성에 따르는 부담감을 줄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들은 사실 바이와 별 상관은 없지요. 물론 이로부터 진짜/가짜 바이를 가리자, 는 데까지 나가면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요)

사실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구도로 가게 된다면 문제가 너무 도식화되고 빤해지는 듯합니다. 만일 제가 바이라면, 이런 구도 대신에 자신의 문제에 천착하는 쪽을 택할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그건 곧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일원이란 게 내 정체성에도 중요한 요소인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찰이나 갈등 같은 것은 어느 커뮤니티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하겠지요.

물론 양성애자라고 밝혔을 때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에서 겪게 되는 갈등의 폭이 매우 커질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느 커뮤니티에서든 모두가 잘 지낼 수는 없는 것이고, 잘 지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두렵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시스템이 씌워 준 ‘회색분자의 운명’을 자처할 필요는 더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만, 써버리고 나니 상당히 재수 없는 소리가 되어 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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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부연설명으로 추정하는 트윗 세 개
우선 이 글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고민은, 사회적 소수자 위치 혹은 소위 차별 받는 위치에서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의 글이구나,였습니다. 이것은 느낌이지만, 정말로 소위 기득권층이라고 인식하는 사람, 혹은 특정 지배 규범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이 할법한 어떤 위치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사실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구도로 가게 된다면 문제가 너무 도식화되고 빤해지는 듯합니다.”란 구절입니다. 이 문장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구도’는 누가 만들었고 선호하며 유통하는 프레임인가? 이런 프레임과 비슷한 예로, ‘페미니즘은 남녀 대립구도를 만들어서 (가장 부정적 의미에서의)갈등만 부추긴다’가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트랜스젠더 강의를 하고 나면, ‘그냥 다 살아가는 사람인데 굳이 트랜스젠더와 정상인으로 나누어서 사고할 필요가 있느냐?’가 있지요. 혹은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동성애자 강사에게 ‘다 같은 사랑인데 왜 이성애 vs. 동성애자 구도로 도식화하느냐?’가 있겠지요. 아시겠지요? 페미니스트가 남녀 대립구도를 조장하나요, 남성중심적/가부장적 사회 제도 자체를 탈구성하려고 하나요? 트랜스젠더 이슈는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구분하려는 정치학인가요, 비트랜스젠더를 인간의 기본값으로 삼는 사회적 인식 자체를 문제삼는 정치학인가요? 동성애 운동은 동성애자 분리주의 운동이던가요? 바이/양성애자 운동/인식론은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를 구분하려는 운동인가요?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구도”와 같은 도식은 특정 지배 규범을 문제삼는 이들의 논의를 망치기 위해 혹은 의도적으로 훼손시키기 위해 특정 규범과 동일시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전략입니다. 질문하신 분의 정확한 의도야 알 수 없지만 그 질문을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프레임으로 가두는 건 두 집단의 권력 위상을 등치할 뿐입니다. 마치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는 정치 권력이 동일해서 둘 사이엔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페미니즘의 주장을 “남녀대립구도”로 만드는 것 역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인간이며 둘 사이엔 아무런 차별 없이 잘 살고 있는데 괜히 페미니스트가 시끄럽게 떠들어서 문제라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처럼요. 이런 프레임에선 ‘동성애자 공동체’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성애자 공동체’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바이나 비동성애-비이성애자가 문제일 뿐이죠. 즉 모든 문제를 동성애-비트랜스젠더가 아닌 존재에게 떠넘길 뿐입니다.
이 프레임이 야기하는 문제는 곧이어 드러납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그건 곧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일원이란 게 내 정체성에도 중요한 요소인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찰이나 갈등 같은 것은 어느 커뮤니티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하겠지요.”
이 문장을 조금만 바꿔볼게요.
한국인 사회가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그건 곧 한국인 사회의 일원이란 게 내 정체성에도 중요한 요소인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활동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차별이나 혐오폭력 같은 것은 어느 나라/사회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하겠지요.
또 다른 문장.
“하지만 어느 커뮤니티에서든 모두가 잘 지낼 수는 없는 것이고, 잘 지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이 역시 조금만 바꿔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교회에서든 모두가 잘 지낼 수는 없는 것이고, 잘 지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동성애자 vs. 양성애자” 프레임에선 문제제기를 하는 양성애자/바이가 잘못입니다. 이런 인식틀의 대립 언어를 조금만 바꿔 적용하면, 한국 사회에서 보수기독교의 혐오발언은 문제될 것 없으며 그런 혐오발화를 문제삼는 일군의 집단이 문제인 거죠. 혐오발화를 문제삼는 집단이 보수기독교의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http://goo.gl/B5hSsL) 것과 같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문제 삼는 글을 단순히 “개인적인 상담글”(http://goo.gl/nNSSRf)로 여길 수 없습니다.
아울러 질문자의 질문 “바이는 회색분자의 운명을 못 벗아 나는 건가요?”(이것이 질문의 전체라고 가정한다면)의 어디에 “회색분자라는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http://goo.gl/B5hSsL)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개된 질문만 따져 읽으면 바이를 회색분자로 여기는 ‘동성애자 공동체’에 문제제기로 해석할 수도 있거든요. 즉 바이/양성애자를 “회색분자”로, “박쥐”로 몰아가는 사회 구조, ‘동성애자 공동체’를 문제삼으며 글을 전개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덧붙여 “이런 구도 대신에 자신의 문제에 천착하는 쪽을 택”하라는 구절 역시 당혹스럽습니다. 질문하는 분이 “동성애자 vs. 양성애자”라는 프레임을 “수용”하고 있다면, 이것은 이미 질문자의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이것은 바이 이슈며, ‘동성애자 vs. 양성애자’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유통하는 집단의 이슈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바이나 동성애자 공동체와 무관한 남의 이슈인 것처럼, 질문자의 이슈가 아닌 것처럼 설명할 수 있는 건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프레임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위험합니다.
(이 글은 또 다른 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러운데, 이 글은 단편적 글에 말을 덧붙인 경우지 글을 쓴 사람을 비평한 것이 아닙니다. 글을 비판하면 마치 글쓴이를 비판하는 것처럼 오독하는 경우가 있어 덧붙입니다.
++
프레임을 프레임하는 이슈는 부끄럽지만.. ㅠㅠㅠ
루인. “괴물의 인식론: 이택광, 『마녀 프레임』(자음과모음, 2013)” <자음과모음> 20 (2013): 348-352. 인쇄본. http://goo.gl/25xlG
을 참고하셔요.

모두에게 완자가(모완)의 윤리: 무지로 무지를 얘기하기 혹은 트랜스-바이 맥락으로 읽기 시도

참고글
ㄱ 모두에게 완자가. 82화 “트렌스젠더에 대하여”에 대하여 https://www.runtoruin.com/2138
ㄴ ‘모두에게 완자가’에 대해 어제 쓴 글에 덧붙여서[약간 추가] https://www.runtoruin.com/2139
ㄷ 이것저것 잡담: 읽은 거, SNS, 구글플러스, 모두에게 완자가(모완), 무한도전-노홍철 https://www.runtoruin.com/2140
모두에게 완자가(모완)을 논하는 글을 썼을 때, ‘이 삐리리한 삐리리한 삐리리야’라고 쓸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모완을 읽으며 너무 싫어서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하셨을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욕을 하며 비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르며 각자의 맥락에 따라 이를 표현하는 방법도 다양하니까요.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룬 82화와 83화에 문제가 있은 표현이 상당하단 점에서 저 역시 “야이 삐리리야”라는 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 판단에 저는 그럴 위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완자 작가보다 낫다고 얘기할 부분이 없거든요.
자신이 모르는 이슈, 열심히 고민하지 않은 이슈에 있어선 ‘누구나’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수준으로 얘기한다고 정희진 선생님께서 지적한 적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모든 이슈에 아무런 문제 없이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럴리가요. 어떤 이슈에서 저는, 저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로 논쟁적이고 혐오발화일 수도 있는 말을 했을 겁니다. 제가 주로 염두에 두는 맥락에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얘기를 한다고 해도 제가 염두에 두지 않은 맥락에선 문제가 될 발언이 상당합니다. 장애이슈에 있어선 어떤 ‘사건’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지금 떠올려도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일입니다. 제가 주로 글을 쓰고 제 전공이라고 얘기하는 트랜스젠더 이슈라고 예외일까요? 오히려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훨씬 더 논쟁적인 얘길 더 많이 했을 수도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고작해야 제가 경험한 방식의 일부만 떠들 수 있을 뿐인 걸요. 저는 다른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대표하지 않으며 다른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대리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경험과 역사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의 논의가 다른 트랜스젠더에겐 문제가 많고 혐오로 독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완에 관한 논평을 쓸 때, 그 잣대를 저에게도 들이댈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얼마나 잘 할 수 있나? 자신없어요. 모완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너는 얼마나 잘 하나 보자’는 식으로, 타인을 비평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비평할 것인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트랜스젠더가 이 세상의 최대 약자, 최대 피해자라서 모든 언설을 판단하는 기준도 아닌데, 트랜스젠더 역시 다양한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혐오발화를 하는데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더구나 각자의 맥락에서 얘기하자는 건, ‘나는 이게 싫어’라는 식으로 그냥 툭 내뱉자는 게 아니니까요. 나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맥락화하자는 거죠. 밑도 끝도 없이 ‘그건 혐오야’, ‘그 말이 난 불편해’라고 말하는 건, 적어도 비평적 글쓰기엔 … [그냥 생략할 게요.]
물론 사람마다 다 다른 윤리가 있기에 제 글쓰기 윤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그저 저는 이런 고민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거죠. 제 기준에 제가 잘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요.
어쩌면 제가 모완을 1화부터 계속 읽었기에 이렇게 판단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82화만 읽었다면 또 한 편의 트랜스혐오 텍스트가 나왔다며 “이 삐리리한”이라고 비판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이라면 1화부터 읽었고 모완이란 작품의 흐름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완자 작가는 자신의 무지를 통해 무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누군가 어떤 낯선 이슈를 얘기할 때면 다양한 전략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부 <성과 사회>란 수업 조별 발표 자리에서, “저희 조는 트랜스젠더라는 (신기한)존재를 만났는데..” 운운할 수도 있죠. 혹은 “너네들 트랜스젠더 잘 모르지? 내가 어제 트랜스포머 아니 트랜스젠더를 만났는데 내가 가르쳐 줄게”라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발언의 수위는 달라도 많은 경우 타인을 얘기할 때 이런 형식입니다. 말투만 조금 순화되었냐 아니냐의 차이지 내용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런 타자화 혹은 우아하지도 않은 혐오일 때가 많죠.
모완은 어떤가요? 조금만 세심하게 읽으면 완자 작가는 윤리적으로 그리기 위해 상당한 고민을 한 걸 짐직할 수 있습니다. 글에 나타난 문제적 표현을 잠시 덮어둘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 이슈에 접근하는 태도, 트랜스젠더 이슈를 얘기하려는 태도가 그러합니다. 자신이 안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자신에게 어떤 무지가 있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작가의 바이 범주가 만든 성찰이지 않을까라고 추측합니다.
완자 작가는 야부와 7년 정도 파트너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 시간이라면 자신을 그냥 레즈비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편이 설명하기 더 편할테고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이니까요. 완자 작가가 자신을 바이라고 밝혔음에도 모완이 동성애 웹툰으로 이해되는 걸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개별 관계에선 자신을 바이라고 얘기하면서 공적 자리에선 레즈비언이라고 밝히기도 했고요. 이것이 현재 바이 범주가 갖는 위치를 상징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제가 특강에서 얘기할 때,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는 그래도 참조할 대상이 있어서인지 고개라도 주억거리지만, 바이나 무성애 이슈에선 다들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분위기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완자 작가는 자신을 바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럴 작가가 아니죠. 완자 작가는 자신이 바이란 점을 분명하게 밝혔고 바이 범주를 설명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어느 화에서 바이에 관한 오해를 설명한 적도 있는 듯하고요(다시 정주행을 하지 않고 쓰는 글의 문제;;). 자신을 바이로 설명하면서 완자 작가는 자신의 범주 및 삶과 관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겠죠. 바이가 아닌 거의 모든 사람,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상관 없이 끊임없이 자신의 범주를 설명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감수성과 성찰이 있을 테고요. 그렇기에 타인의 삶에 대해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고 함부로 아는 척 얘기 할 수 없다는 걸 정말 잘 아는 듯하단 인상입니다. 이제 완자 작가가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얘기를 할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웹에서 자료 좀 검색해서 떠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직접 만나서 듣고 그 얘기를 전하는 것, 그렇게 들은 얘기로 아는 척하기보다는 자신의 무지를 먼저 밝히며 무지를 통해 무지를 얘기하는 것이죠.
물론 저는 어떤 글을 비판할 땐 “야이 삐리리야”를 글쓰기 언어로 바꿔서 쓸 때도 있습니다. 이경이나 김정란의 글을 비판할 때 그렇습니다. 비트랜스젠더는 무조건 옹호하고 트랜스젠더는 비난부터하는 글에 저는 지금까지 적은 글쓰기 기준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완자는 제가 판단하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 글에 “야이 삐리리야”라는 식의 비판을 할 순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제가 모르는 이슈와 관련해서 글을 쓸 때 완자 작가 수준으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며 글을 쓸 용기가 있느냐면 아니요, 제겐 그런 용기가 없습니다. 저는 완자 작가보다 잘 쓸 자신이 없습니다. 완자 작가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만 비판하라(“너희 중에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져라”?)가 아닙니다. 그냥 저는 이런 판단을 했다는 것 뿐입니다.
그랬기에 트위터에 제 글이 유통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만약 둘 다 유통된다면, “모두에게 완자가. 82화 “트렌스젠더에 대하여”에 대하여”보다는 “‘모두에게 완자가’에 대해 어제 쓴 글에 덧붙여서[약간 추가]”가 더 많이 유통되길 바랐습니다. 지금이라면, 앞의 두 글보다 지금 이 글이 더 많이 유통되길 바라고요. 하지만 글의 소비와 유통은 제가 판단하고 바랄 수 있는 게 아니죠. 제가 원한다고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도 않고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출판한 글 중에서 ‘다른 어떤 글보다 지금 이 글을 사람들이 더 많이 읽으면 좋겠어’라는 글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읽어주는 글은 다른 글입니다. 제가 기대하는 글보다는 다른 글을 더 좋아해주시더라고요. 그러니 그 글 말고 이 글을 읽어주세요, 이 글을 유통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읽은 분이 판단할 사항이니까요. 제가 고민하는 부분과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은 다르단 뜻이겠지요. 그러니 지금까지 쓴 글은 당연하게도 저 한 사람의 사소한 주절거림에 불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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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알바하러 오고가는 지하철에서 넥서스7(7인치 태블릿)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생산성 최고인 넥서스7 만세!

바이 모임, 두 번째

두 번째 바이모임을 연다고 합니다.
언젠가 20번째, 200번째 모임을 알리는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
===
바이모임 두 번째. 연애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쩌면 엄청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 연애.
바이와 바이를 둘러싼 우리들은 연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요?
두 번째 바이 모임에서는 “연애”를 주제로
수다수다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
이번 수다방은 4개의 작은 수다방으로 나눠 이야기를 한 뒤,
다시 큰 수다를 떠는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작은 수다 주제>
*바이가 아닌 내 애인
*내가 안/못 해본 연애
*썸
*나의 바이 애인
일시: 2013년 4월 13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
장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참가비: 비청소년 6,000원 / 청소년 4,000원
(참가비는 대관료와 간식비로 쓰입니다. 뒷풀이 비용은 따로!)
인원 파악을 위해 꼭! 미리 신청해주세요.
신청: bi.moim.kr@gmail.com
트위터 @bimoim

[#M_ more.. | less.. |

*
홍보 웹자보에 이런 글 쓰기 참 그렇지만… 그래서 지나치기 쉽게 more/less로 글을 쓰자면…
웹자보는 예쁜데요…
웹자보가 작아요.. 그러다보니 글자 크기도 작아서 읽기가 힘들어요.. ㅠㅠ
아울러 제가 색약이라서 그렇겠지만, 지금 색깔 배치로는 글자를 읽기가 어려워요..
홍보할 때 이미지 웹자보와 텍스트 파일은 언제나 함께!
방문자가 몇 안 되는 이곳이지만 혹시나 웹자보를 제작하는 분이 여기에 들리신다면, 그리고 지금 이 메모를 읽으신다면 이 점 참고해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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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LGBT 인권포럼 웹자보 사이즈가 상당히 작은 편이라(그 많은 내용이 들어있는데도 사이즈를 작게 해서 내용을 읽을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웹자보 홍보는 포기했는데요..
이게 모든 홍보를 SNS에서 한다는 개념에 따른 걸까요? 블로그에서 홍보한다는 개념으로 웹자보를 제작할 때와 트위터에서 홍보한다는 개념으로 웹자보를 제작할 때 이미지의 크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모바일을 통해 트위터 같은(페이스북은 안 써봐서 모르겠고) SNS에서 홍보할 때 적절한 크기의 이미지로 제작하다보니 작은 사이즈의 웹자보가 제작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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