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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목차짜기
어제부터 조금은 분주했다. 오늘 개별연구수업이 있는 날인데, 그 준비도 준비려니와 그보다 중요한 논문목차를 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논문목차가 아니라 논문의 서론 초고를 써가기로 했지만, 서론 초고를 쓰기 위해선 목차가 우선 나와야 했고, 그래서 목차를 구성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석사논문은 처음 쓰는 거니까. 흐흐. 논문의 목차가 나와야 서론의 초고를 쓰건 어떻게 될 텐데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명확할 듯 하면서도 모호한 상황이었고, 더 큰 고민은 이 주제를 “석사논문” 주제로 해도 괜찮나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왠지 원고지 80~100매 정도의 논문으로 쓰면 될 걸 A4 100매 분량으로 쓰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서론이야 관습적으로 “1.연구배경, 2.문제제기, 3.연구내용, 4.연구방법”이라고 쓰고 본론을 적었는데, 막막. (물론 이것도 개별연구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수정했음.)
고민은 현상학적 분석과 담론적 분석을 연결하고 우울증적 젠더정체성 형성(이렇게 뭔가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사실 잘 모르는 말들이라는 거… 이제 공부해야 한다는 거… ;;;;;;;;;;)을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들 사이의 접점을 명확하게 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딴짓하기 바빴다(?!?!?!?!?!?!) 오늘이 개별연구수업인데 어제야 목차를 짜겠다고 작정을 한 것도, 이들 사이의 접점을 좀처럼 잡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론 명확한 듯 하면서도 그것을 목차로 구성하기엔 어려웠다고 할까. 그러면서도 요즘 읽고 있는 글들이 있고, 이번 학기 개별연구를 통해 읽고자 하는 글들이 있기에 그 책과 논문들을 중심으로 목차를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떤 골격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고 든 느낌. 본론을 4개의 장으로 구성한다면 1장과 2장은 그런대로 틀을 갖춘 느낌인데 정작 루인의 아이디어와 논의가 가장 많이 들어갈 3장과 4장은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지만, 그런 얘기들을 논문에서 했다간 자칫 붕 뜨는 내용이 되기 쉽고 그래서 전체적인 맥락에서 겉돌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을 뺄 수도 없었는데, 어쨌거나 논의를 위해선 그 내용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선은 조금은 겉도는 내용을 둔 체 개별연구에 들어갔다.
물론, 개별연구에선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도 같이 해야 했지만, 논문 목차를 통해 버틀러 얘기를 상당 부분 할 수 있기 때문에 발제 준비는 상당히 부실하게 했다;;;
아무튼, 이렇게 목차를 짜서 서둘러 수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목차는 좀더 골격을 갖출 수 있었다. 전체적인 틀은 많이 안 바뀌었고, 다만 각각의 챕터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이냐를 더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자칫 각각의 챕터들이 겉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얘기들도 많았고 곧 정리해야 할 내용들이다.
잘하면 내년 1월 초, 좀 더 걸리면 내년 7월 초 즈음이면 나오겠지. 우선은 내년 1월을 예상하고 있다.
천천히 가는 거야.
[논문] 저항의 맥락화: Lila Abu-Lughod “The Romance Of Resistance”
관련 글: 저항의 낭만화(한나님의 글)
※카테고리는 그다지 신경쓰지 마세요;;;;;
제목: The Romance of Resistance (여기)
출처: American Ethnologist, Vol. 17, No. 1. (Feb., 1990), pp. 41-55
종종,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어디서 들어본 것, 혹은 언젠가 어느 수업 시간에 배운 것만 같은 것일 경우,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서 아는 척 하려는 루인과 만난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무섭다고 느끼는 건 익숙해지는 것이다. 학년 구분 없는 수업시간에 4학년이 1학년 보다 유리한 점은 4학년이 1학년 보다 더 많이 안다거나 책을 더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답안을 작성하는 방법, 공부를 하는 방법 등이 익숙할 가능성 때문이다. 전공수업일 경우엔 그 전공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에, 1학년 보다는 4학년이 더 익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무서운 건 이 지점이다.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자주 듣다보니 자주 접하다 보니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맥락인지 모른체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 그렇게 익숙하기만 할 뿐인데 마치 안다고 믿게 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일테면, 젠더라는 단어가 그렇다. 여성학 수업을 몇 번 듣고 나면 혹은 여성학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고 나면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익숙해서 그저 일상어처럼 사용하기 쉽다. 루인 역시 너무도 자주 그러하고. 하지만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의 어떤 맥락을 알고 있다는 걸까?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자주 사용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는 언어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던 이유엔 “젠더”라는 단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루인의 전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전히 젠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여성학기초 과목을 들으면 젠더를 아주 간단하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으로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지만, 당시 기말 답안지엔 이 문장을 A4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적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선 이토록 단순한 설명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요즘의 고민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위에 링크한 한나님의 글을 읽으며,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행위성을 안다고 착각했지만, 그동안 무얼 안다고 믿었던 걸까.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싶었고, 얼추 일주일 전 즈음에 이 논문을 읽었다. 그러며 남은 화두는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라는 말.
뒤통수를 맞은 것만 같은 느낌은, 이 말에서 비롯한다. 그동안 행위성 혹은 저항을 한 개인이 그 사람의 맥락에서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읽으면서, 그것이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전복”이란 의미가 아님은 분명히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권력의 작동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고민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항 혹은 행위성을 통해 권력의 징후를 읽어 내지 않았다면/않고 있다면, 도대체 무얼 안다고 믿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한다는 말 혹은 어떤 앎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렇게 작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이론적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하는 건 언제든 자신을 투명한 위치로 간주할 위험성이 있고, 자신이 무슨 문제를 범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는 말은 무겁게 다가왔다. 어떤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은 이것에서 비롯한다.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 들었던 그 복잡한 감정-혹시나 공포범죄를 경험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이런 불안이 싫음과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은 정확하게 이런 감정이 발생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옷이라는 것, 옷을 입는다는 것의 의미와
저자의 또 다른 지적은 저항이란 언제나 맥락적이라는 지점이다. 즉, 모든 저항의 행위가 모든 문화적인 가치를 전복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선 저항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다른 지점에선 권력을 지지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트랜스젠더는 성별이분법을 강화한다는 말과 성별이분법을 초월한다는 말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 하리수를 향한 비난 중 하나는 하리수는 이성애 성별이분법을 더욱더 강화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의 비난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민등록번호 1번/3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1번/3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주민등록번호 2번/4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2번/4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이런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에서 하리수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했다. 성별 혹은 젠더가 (어떤 의미에서) 임의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것으로 느껴졌지만, 방송을 통해 하리수는 이른바 “여성”이라는 그 어떤 이미지를 “여성보다 더 여성답게” 재현했고 그래서 기존의 성별이분법을 더 강화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하리수의 행동은 동시에 이른바 “여성성”(혹은 “남성성”)이라는 젠더가 몸에 부착해 있는 본질적인 속성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처럼 저항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Abu-Lughod는 이걸 훨씬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 ㅠ_ㅠ)
그러니 저항 혹은 행위성은 맥락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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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Butler가 현상학을 비판하는 지점 역시 이 지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버틀러의 글 혹은 이론은 현상학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버틀러는 종종 현상학을 비판하는데, 현상학은 담론이 작동하는 측면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 말이 현상학으론 담론의 작동을 얘기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버틀러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은 Abu-Lughod가 저항을 낭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말고 권력을 징후하는 것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제안과 상당히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