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도 상영한 적 있는 <마법의 성별>Juggling Gender(저글링 젠더, http://goo.gl/82FmG )엔 수염난 여성, 제니퍼 밀러(Jennifer Miller, http://goo.gl/ggRgR )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구글링하면 이미지를 바로 찾을 수 있다.) 학부 수업 때 이 영화를 소개받았는데, 그 수업에선 젠더를 저글링하는 것, 젠더를 수행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젠더란 몸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지적을 했다.
기본적으로 수염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남성성과 밀접하고 특히 권력과 밀접하다. 남성의 수염(혹은 털)은 권력이나 권위 등을 상징하고 여성의 털은 수치심을 상징한다는 말은, 적어도 이곳에 오는 분들에겐 익숙할 듯하다. 그래서 여성에게 허용되는 털은 머리카락 정도고 남성에겐 거의 모든 털이 공공에 노출되어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털 혹은 수염과 남성성의 관계는 몸의 생물학적 작용이지만 사회적 의미가 가장 노골적이고 흔하게 전시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수업 시간에 <마법의 성별>를 소개한 선생님은 다른 시간에, 다음의 숙제를 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꼼꼼하게 다 적어서 내라는 것.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젠더화된 삶을 살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를 위한 예시로 ‘남성이라면 아침에 면도를 할 것이고’라고 말했다. 이 찰나, 나는 잠시 두려움을 느꼈다. 면도를 하는 사람은 남성인가? 이런 식의 예시가 <마법의 성별>과 충돌하는데 왜 그 찰나를 포착 못 하는 걸까?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아니 여전히 수염을 남성성으로 해석하는 관념에 자유롭진 않다.
물론 수염과 남성/남성성이 밀접하기에 관련 코드로 유머를 만들기도 한다. 이를 테면 얼마 전에 본 <뮤지컬 드랙퀸>엔, 드랙퀸 지화자가 대기실에서 면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대체로 여성의 몸에 나는 일상적 수염으로 독해되기보다 트랜스여성의 ‘남성 생물학의 흔적’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독해된다. 혹은 여성의 몸에 나는 수염이라고 해도 숨겨야 할 것이기에 재빨리 깎아야 하는 것이거나. 물론 나는 이런 식의 장면을 사랑하는데, 내겐 이 장면이 일종의 해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삶이기도 해서, 낄낄 웃는다.
수염과 남성/남성성의 관계와 관련해서 계속 질문하는 건, 수염이 나고 면도를 하는 행위는 남성의 어떤 성적 특질, 문화적 실천을 수행함이가란 질문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슈는 언제나 글을 통해서만, 아니 글에서도 에둘러서 말하지만 나로선 가장 스트레스 받는 주제기도 하다. 해학이면서 스트레스다.
영화 <마법의 성별>를 봤을 때, 해당 수업 선생님은 젠더 수행성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런 부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는 게 수행인데 뭘 새삼스럽게.. 그보다 밀러가, 나는 여성이어서 수염이 난다,고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자칫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내게 이 말은, 기존의 관념 자체를 다시 독해하도록 하는 발언이다. 여성이어서 수염이 난다. 그것도 잔수염이 나는 게 아니라 덥수룩하게 난다. 이럴 때 면도하는 행위, 수염의 의미를 남성과 붙여서 설명할 수 있을까? 면도와 수염이 아무리 비트랜스남성이 압도적으로 겪는 일이라고 해도(정말 압도적 비율의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미를 단순하게 붙이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골드키위새 작가의 <우리집 새새끼> 초반에 작가가 수염난 모습을 보여줘서, 댓글에 작가의 성별을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해 작가는 여성도 수염 나는 것 아니냐고 당황한듯 혹은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매력적인 순간이다.)
<마법의 성별>를 처음 본 게 2000년대 중반이다. 그 이후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는 그 영화의 주인공 밀러처럼 수염을 기르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떤 사람에겐 남성의 수염으로 독해되겠지만 내겐 mtf 트랜스젠더의 수염이고 그리하여 다른 정치적 의미를, 혹은 다른 어떤 가능성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아니 정치적 의미 같은 건 나중 문제고 그냥 수염으로 어떤 장난을 치고 싶다는 바람을 품곤 한다. 이것을 내가 실현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호르몬투여를 한다면, 그땐 수염을 기르고 돌아다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이제, 이런 실천은 나 혼자의 독단적 판단으로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해봐도 재밌겠다는 어떤 상상.
아무려나 나는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아서 수염 흔적이 있는 게 아니다. mtf 트랜스젠더라서 수염 흔적이 있다(당연하게, 모든 mtf/트랜스여성에게 수염 흔적이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의 수염 흔적은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흔적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