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열댓 번은 봤지만 <내가 사는 피부>는 다시 봐도 재밌다. 읽을 거리가 넘쳐나서 아직도 몇 번은 더 재밌게 볼 수 있겠다 싶다. 이런 텍스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런 흥미로운 텍스트를 만든 감독에게 고맙고, 이런 텍스트로 글을 쓰겠다고 한 나 자신에게 안심한다. 물론 서너 번 봤는데 지겨웠다면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
영화 <내가 사는 피부>는 많은 평론가가 지적하듯 두 가지 다른 텍스트를 얘기한다. 하나는 피그말리온과 그 조각상 갈라테이아, 다른 하나는 프랑켄슈타인과 이름 없는 괴물/피조물. 영화 속 의사 로베르트는 자신이 (재)창조한 존재 베라/비센테와 애증의 관계를 형성한다. 괴물을 추적하듯 그렇게 로베르트는 베라/비센테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지듯 그렇게 베라/비센테를 사랑한다. 그런데 각 텍스트에서 자아가 구성되는 방식은 무척 흥미롭다.
로베르트는 자신이 제작한 대상에게 모든 감정을 쏟으면서, 베라/비센테를 통해서만 자기 삶의 의미, 자아를 확인할 수 있다. 베라/비센테는 로베르트가 제작한 외모와 비센테로 살았던 긴 삶의 공존을 모색하며 자신의 자아를 구성한다. 이때 자아는 어떤 의미인가? 각자의 자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결코 동시성을 갖지 않는다. 로베르트는 베라/비센테가 갈/노르마의 자아를 갖춘 존재길 바라고 그렇게 대한다. 베라/비센테는 베라에 오염된 비센테, 혹은 베라와 비센테의 경계 구분이 불가능한 혼종으로 살아간다. 로베르트가 베라/비센테에게서 비센테의 역사를 깨달은 것은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할 때였다. 사람 간 관계에서 서로가 기대함에도 기대에 어긋나는 자아로 마주할 때 이 관계는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KSCRC 강의에서 <내가 사는 피부>를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강좌에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아하하. ㅠㅠ
뭐, 이번엔 진짜로 강사가 나타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으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