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트랜스젠더, 장애, 인터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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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는 젠더의 의료화를 비판하는 논문에서 장애와 트랜스젠더의 접점을 모색한다.
젠더는 인간을 인식하는 장치인 동시에 의료 진단 범주다. 젠더는 의학의 진단 범주로 등장했고, 병리현상 혹은 이상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처음 쓰였다. 즉,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젠더란 범주가 필요했다. 타고났다고 여기는 몸과 일치하지 않는 자기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내적 자기 인식을 명명하기 위해 젠더를 사용했다. 그래서 젠더는 언제나 의료병리화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트랜스젠더가 사회에 일으키는 ‘트러블’은 사회적 인식 뿐만 아니라 몸의 형태를 포괄한다. 누가 여성인가, 누가 남성인가와 같은 질문은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을 가르는 기준 자체를 흔든다. 하리수 씨가 여성이라면 여성의 몸을 이루는 ‘생물학적 공통 경험’은 무엇일까? 하리수 씨가 여성이 아니라 여전히 남성이라면 하리수 씨가 재현하는 여성성(혹은 어떤 다른 방식의 성성)의 물적 토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트랜스젠더는 그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몸과 젠더의 관계를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변호사인 스페이드는 젠더의 의료화를 비판하면서, 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을 법적으로 풀어가는 방법 중 하나로 미국장애인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미국장애인법에서 정의하는 장애 개념을 확장해서 적용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선 불가능한 전략이다.
이 전략으로 승소한 스페이드는 장애와 트랜스젠더의 공통점을 한 가지 제시한다. 그것은 단 한 가지의 몸과 정신만을 규범으로 특권화하고 그 외의 몸과 정신은 모두 배제하는 인위적 조건을 ‘위반’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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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거는 몸을 규범화하는 장치 중 하나인 인터섹스의 수술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
인터섹스가 태어나면 의학은 이 태아를 여성 아니면 남성에 적합한 몸이 되도록 수술한다. 이 수술은 현재 의학의 표준 처방이다. 드레거에 따르면 의사들은 인터섹스나 그 부모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때때로 엉뚱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본인이나 자식이 인터섹스란 얘기를 들으면 본인이나 부모는 그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고 혼란만 느낄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사들/의학계의 믿음이다. 많은 인터섹스 당사자와 지지자는 이를 비판한다. 이를 테면 암에 걸린 사람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상태(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 환자는 혼란을 겪을 테니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로 의사가 수술을 한다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의료 윤리의 문제인데도 인터섹스에겐 기본적 의료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드레거는 비판한다.
인터섹스 관련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의사가 얘기하는 혼란(당사자나 부모, 가족이 겪을 것으로 예상하는 혼란)이 사실은 의사 자신의 것이란 의심이 든다. 인터섹스란 존재 자체가 의사에겐 혼란스러움이란 뜻이다. 그래서 “인터섹스 조건은 당사자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사자의 문화를 위협한다.”(30)는 케슬러와 드레거의 지적은 매우 정확하다. 규범적 몸을 만들려는 기획이 인터섹스를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 수술을 최상의 처방으로 만든다.
03
이것은 며칠 후에 있을 강의를 위한 메모. 더 자세한 것은 강의 때. 🙂
주제는 ‘의료기술과 비규범적 몸’이며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장애, 그리고 의료기술의 관계를 모색할 예정이나 실패할 가능성이 97.5%라 남은 2.5%에 희망을 걸어야 함… ㅠㅠ

[기고-인권오름] [나와 당신의 거리]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눈치 챈 분도 있을 듯합니다. 요즘 제가 쓰는 글에서 어떻게든 엮으려고 애쓰는 지점은 퀴어와 장애 이슈입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작년부터 둘의 연관 관계를 모색하며 짧게라도 글에서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가장 큰 영향은 2009년 가을부터 시작한 장애-퀴어 세미나고요. 굳이 기원을 찾아가면 트랜스젠더 이슈와 장애 이슈의 고차점을 고민하도록 한 화장실 이슈네요.
문제는 저 자신이 아직 충분히 정리한 상황이 아니란 점입니다. 저도 단편적 아이디어와 고민으로 둘을 엮어내고 있죠. 그래서 내용이 너무 서툴고, 저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글에서 계속 언급하려고 하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 안에서 충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한두 줄이라도 꾸준히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고민을 정리하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죠. 제 오랜 습관 중 하나는 고민을 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펜과 손가락으로 한다는 것. 그래서 글을 쓰지 않을 때면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펜과 손가락이 움직이지 앟으면, 고민도 한두 문장의 단편으로 그칩니다. 크크. ;;;
암튼. 며칠 전 인권오름에 글을 하나 실었습니다. 욕심이 과해 망했지요. 엉엉. 마감 문제만 아니었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한 글입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최초 기고버전. 청탁을 받고 원고 마감일까지 보낸 첫 번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체 기획 내용을 담아서 수정해달라는 요청에 따른 수정 버전입니다. 기획 연제의 큰 주제는 “나와 당신의 거리”입니다. 전 글에서 직접 거리나 공간을 언급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거리나 공간을 느낄 수 있길 바랐죠. 하지만 이런 글은 내공이 장난이 아닌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작업!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망했죠. 크크. ㅠㅠ 그래서 거리 얘기를 분명하게 담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장애 이슈와 퀴어 이슈의 교차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황에서 저의 한계입니다. 언젠간 좋아지겠죠,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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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률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포털 메인에 실린 어느 기사는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인데, 공포와 위험은 그 거리를 좁혔다. 물론 사람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사회가 ‘다르다’고 가정하는 몸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떠올랐다.


02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구체적 현실이다.

광고를 게재했던 집단과 관련 있을 누군가는 한동안 동성애를 “반대”하는 1인시위를 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찬반으로 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세상에서 퀴어는 사람이 아니란 뜻일까? 나는 우연히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앞을 지나간 적 있다. 판넬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으며, 약간의 분노와 실소와 어이없음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분노보다는 그저 그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가 느끼는 근거 없는 불안, 그 불안을 퀴어에게 덤터기 씌울 수 밖에 없는 그의 취약함에 그가 조금 불쌍했다.

그 사람 앞을 지나가며 나는 연민과는 또 다른 어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또 너무 멀었다. 내가 트랜스젠더 활동가란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욕을 했을까? 아님 그저 얼어붙었을까? 내게 안전하지도 않지만 위험하지도 않은 그 거리를 걸으며 나 혼자 조금 심란했다. 그가 인간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는 그 자리, 나만 혼자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1인시위자에게 무관심한 사람과 1인시위자가 신경쓰이는 나와 1인 시위자는 서로 다른 공간을, 현실을 겪고 있었다.


03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과 1인 시위 내용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장애인이나 퀴어가 존재하지 않느냐면 그렇지 않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함께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내가 1인 시위자 앞을 지나간 것처럼, 내가 간과하고 있는 이들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간과해서 그저 없는 것처럼, 나와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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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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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 같은 건 없다.
루인(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 runtoruin@gmail.com)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어느 신문에선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율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문득 오래 전 유행한 노래가 떠올랐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 내 왼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죠 /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왼손”(<새끼 손가락> 김승진 노래)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더 구체적 현실이다. 현실이란 각자의 입장에서 구성되니, 현실과 망상이란 구분은 불가능하다.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그 현실이 배제한 사람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조우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배제하는 대상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규범의 불안한 토대를 타인에게 덤터기 씌운다. 이것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비규범적 존재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퀴어는 언제나 일상 생활에서 제 삶을 살아가지만, 이것이 문제될 것 없다. 퀴어의 몸은 뭔가 다르고, 규범적 이성애자의 몸만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강박이 퀴어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우발적 사고만이 불안을 조성하지 않는다. 사고의 결과,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건강’ 강박이 낙인을 만들고, 몸의 위계를 만든다. 문제는 퀴어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도 아니다. 기준을 알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건강’ 강박, ‘규범’ 강박이 문제다. 퀴어만 아니라면, 장애인만 아니라면 ‘건강’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근거없고 실체 없는 믿음이 문제다. 비장애인만, 규범적 이성애자만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건강과 행복에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비가 내린다. 이번엔 어떤 비가 내릴까? 타인을 배제하는 공포가 반영된 비가 내릴까? 하지만 ‘건강’한 몸 같은 것, ‘정상’적인 몸 같은 것, 그런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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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 구분에서 어떤 논쟁이 있었을까?

ps.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절묘한 행복. 제게 이런 행복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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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에 쓴 글의 두 배 확장판(트윗은 140자니까, 이건 280자? ;; ) 정도의 메모입니다.

서구 역사에서 걸인, 정신병자, 장애인, 퀴어/LGBT, 좁게는 트랜스젠더의 역사는 상당히 겹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 장애 연구자는 걸인의 역사와 장애인의 역사는 동의어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다른 이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장애 역사에 등장하는 이들의 일부는 트랜스젠더거나 동성애자와 겹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겹친다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몸의 역사와 경험을 알려주죠. 이런 역사를 읽을 때마다 저는 궁금합니다. 어떤 맥락에서 이들이 별개의 범주로 나뉘었을까?

물론 성과학과 의료기획 속에서 특정 진단명을 만들고 그 진단명에 따라 개인을 특정 범주에 수렴한 역사가 있긴 합니다. 그래서 너는 동성애자, 너는 트랜스젠더, 너는 장애인 등으로 개인의 복잡한 상황을 어느 단일 범주로 수렴하죠.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건, 이 과정에서 의학과 각 범주에 속하는 개인은 어떤 식으로 관계 맺었을까요?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있는 개인들은 어떤 식으로 의학을 활용했을까요? 그리고 이런 분류를 적극 활용하여 분리를 강화한 집단은 없었을까요? 이 사이에서 각 범주에 속하는 이들은 어떤 논쟁을 벌였을까요?

범주에 관심이 많은 저로선 종종 이런 부분이 궁금합니다. 물론 이런 범주 논쟁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변수가 있고, 그 변수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긴 합니다. 이를테면 트랜스젠더 논의에서 범주와 정신병 논쟁은 계급과 인종 논쟁에 가깝습니다. 미국 정신병 진단목록에 있는 성동일성장애(트랜스젠더임을 진단하는 명칭)를 삭제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정신병이 트랜스젠더를 병리화한다고 이런 해석에 거부하는 집단과 정신병이건 뭐건 간에 상관없고 정신병 진단으로 의료보험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집단. 즉, 상당부분 계급 논쟁이며, 미국에서 계급과 인종은 상당히 겹친다는 점에서 인종논쟁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범주용어인 트랜스젠더 역시 거의 항상 중산층 백인들이 주로 사용하고, 하위문화에선 게이란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는 점도 흥미롭죠. 그래서일까요? 레즈비언의 역사를 다룬 할버스탐 같은 이는, 미국 레즈비언 논쟁사는 계급논쟁사라고 요약하기도 했습니다.

특정 범주 내에서 이렇게 계급과 인종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면, 동성애-트랜스젠더-장애-노숙자 등과 같은 범주 구분에도 어떤 유사한 정치학이 작동하지 않았을까요? 현재는 짐작만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간 글로 쓸 수 있겠죠. 언제가 언제일 지는 저모 모르지만요. 아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