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수행성 쪽글

2012년 12월 5일, 수업시간에 제출한 쪽글입니다.
주디스 버틀러의 논문에 대한 쪽글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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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가 수행적 행위라는 말은 본질적 젠더 정체성이 있고 내재하는 핵심을 충분히 잘 표현하며 외화함이 아니라 반복 실천을 통해, 마치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행함이다. 젠더 범주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 행위의 효과다. 따라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젠더 범주의 의미는 형성[constitution]되고 변화한다.
물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젠더는 일종의 본질이다. 모든 사람은 당연히 여성-남성으로 태어나고 이렇게 평생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된다. 젠더를 사회적 변수로 얘기할 때 비트랜스 여성-남성만 얘기해도 충분하다고 여긴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하여 비규범적으로 젠더를 실천하는 사람은 예외 현상이다. ‘그들’을 논할 때만 언급하지 인간의 기본 범주로, 젠더 자체를 재사유할 밑절미로 인식하지 않는다. 보수 기독교를 포함하여 혐오 발화를 규범 삼는 곳의 언설은 이런 인식을 극대화한다. 트랜스젠더는 한국사회의 적법한[constitutional] 시민이 아니라 불법 ‘인간’이며 언제나 추방되어야 할 존재다. 트랜스젠더의 등장은 청소년의 젠더 정체성 형성에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트랜스젠더를 문제 삼고 혐오 폭력을 당연시 하는 사회가 아니라 트랜스젠더가 문제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익숙한 역설을 야기한다. 트랜스젠더가 청소년의 젠더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언설은 젠더 범주가 본질적 범주가 아니라 단속과 훈육을 통해서 구성[construction]하고 형성해야 할 범주란 점을 역설한다. 젠더 정체성이 정말 본질이고 불변의 범주라면 트랜스젠더의 등장이 끼치는 영향을 왜 두려워하는가? 젠더가 본질이 아님을 가장 잘 알고 있어서 끊임없이 단속하는 곳은 다름 아닌 가족과 학교다. 옷을 입는 방식부터 머리카락 길이, 걸음걸이, 자리에 앉는 방식 등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모두 규제하고 매(혹은 규범적 폭력)와 벌점 제도를 통해 통제하는 행위는, 젠더가 본질이 아니기에 가능하다. 젠더가 정말 본질이라면 그래서 “여자(남자)는 원래 그렇다”면 이런 훈육이 왜 필요하겠는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그래서 이원 젠더가 강고한 사회일 수록 젠더가 구성물임을 더 강하게 역설한다. 버틀러가 연극 무대의 트랜스베스타잇은 흥미로운 존재지만 버스 옆자리의 트랜스베스타잇은 혐오와 공포를 야기한다고 지적할 때(278), 이 혐오와 공포는 일정 부분 젠더의 형성 과정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젠더는 자연스런 본질이어야 한다고 강고하게 믿는 사회에서, 젠더의 형성 과정을 은폐해야 하는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그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과정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폭로는 규범의 취약한 구조를 직면하도록 한다. 이를 회피하고 젠더를 자연화하는 방법 중 하나가 혐오폭력이다. 하지만 혐오 폭력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젠더와 관련해서 알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우리가 타인의 겉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젠더 범주가 아니라 기껏해야 이 사회가 규정하는 젠더 스타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인의 젠더 범주가 아니라 타인의 젠더 실천을 해석하는 나의 인식체계를 알려 줄 뿐이다. 젠더는 역사적으로 조건짓고 제한된다는 버틀러의 언설을 확장하면, 한 인간의 일생에 걸쳐 알 수 있는 일관된 젠더는 없다. 특정 시점의 젠더 실천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전 생애의 고정된 범주로 이해하는 순간, 젠더는 또 다시 이원론으로 수렴되고 고정된 본질로 환원된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젠더 이론은 여성과 남성의 권력 관계 뿐만 아니라 여성-남성 이분법으로 인간을 환원할 때 발생하는 폭력과 억압 역시 탐문해야 한다(274). 이원 젠더에 온전히 들어맞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