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이성애”일까, 혹은 “이성애”란 존재하는가

며칠 전에 영화 [300]과 관련한 글을 한 편 올렸다. 수업시간에 제출한 쪽글이었고, [300]과 관련한 부분만 올리면서 [음란서생]과 관련해서도 적었다는 내용을 썼다. 엄밀하게 말하면 쓰다가 말았는데, [음란서생]은 결코 [300]처럼 얘기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음란서생]의 주요 등장인물 중, 연애의 한 축을 형성하는 인물은 윤서(한석규)와 정빈(김민정)인데 처음엔 이 둘의 관계를 “이성애”로 설정했다. 소위 말하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지칭하는 그런 방식으로, 안일하게. 이들을 “이성애”로 설정 해야만 [300]처럼 뭔가 “깔끔”하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텍스트 맥락에서도 그러하고 루인의 고민에서도 그러하고.

정빈과 윤서를 간단하게 “이성애”라고 부를 수 없었던 건, 계급과 신분 자체가 다른 둘 사이의 연애를, 단지 “여성”과 “남성”으로 간주되는 인물들이란 이유로 “이성애”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이 둘의 관계를 간단하게 “이성애”라고 부른다면, 이 둘이 지속적으로 연애를 하는 한 그 연애는 “신분과 계층을 뛰어넘는 지순한 사랑”이란 식의 언설로 반복되거나, 직접 이런 언설로 얘기하진 않는다 해도 은연중에 이런 암시를 할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이런 식의 설명은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신분과 계급 차이는 “이성애”라는 젠더-섹슈얼리티에 있어 부차적인 것으로, 젠더-섹슈얼리티만이 본질적이고 인간사에 있어 가장 강력하고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할 위험이 있었다.

과연 계급과 신분이 다를 때에도 “이성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종차별이 극심한 나라에서 다른 인종간의 “여성”-“남성” 연애, 민족차별이 극심한 나라에서 다른 민족간의 “여성”-“남성” 연애를 간단하게 “이성애”로 범주화할 수 있을까?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이른바 “연상녀-연하남”이란 관계를 “이성애”란 식으로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성애 규범”이 요구하는 조건에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여성”과 “남성”의 관계란 이유로 “이성애” 범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좀 더 힘든 이성애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성애”란 식으로 말하면 그만일까?

이런 질문/의문은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비이성애자”들은 젠더-섹슈얼리티로 인해 차별받고 있다는 언설을 통해 마치 “이성애”는 별 다른 어려움 없이 편하게 관계를 맺어간다는 식의 효과를 낳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성애”가 있다고 가정할 때, 장애인의 “이성애” 관계는 비장애인의 “이성애” 관계와 동일하게 “이성애”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부를 수 있다면 어째서이고 없다면 어째서일까?

“이성애”란 무엇일까? 소위 말하는 “이성애주의” 혹은 “이성애 규범”은 존재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고 작동하게 한다 해도, 이런 “이성애주의”나 “이성애 규범”이 말하는 그런 “이성애” 관계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가 요즘 하고 있는 고민 중 하나이다. “이성애”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다고 해서 정말 그런 “이성애”가 실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퀼트”처럼 엮어가며 구성하는 ‘정체성’을 젠더-섹슈얼리티로 환원하고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란 식으로 간단하게 규정하며 이런 가정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약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이성애”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자신은 mtf가 아니라 트랜스여성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자신은 트랜스여성이 아니라 mtf라고 말하는 사람의 연애, 즉 트랜스여성-mtf 관계는 “이성애”일까 “동성애”일까? 루인은 트랜스라고 얘기하는 편인데 그럼 루인의 연애는 “이성애”일까 “동성애”일까? 그냥 “퀴어”일까?

같은 젠더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동성애”, 다른 젠더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이성애”라고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를 끊임없이 “여성”과 “남성”의 관계로만 환원하는 방식, “여성”과 “남성”의 관계만을 “이성애”라고 설명하는 방식, 젠더는 오직 둘 뿐이고 그렇기에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란 방식으로 젠더-섹슈얼리티를 간단하게 구분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그런 관습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자 하면서도 [음란서생]을 분석하면서 간단하게 정빈과 윤서를 “이성애”로 가정하려는 루인을 깨달으며, 좀 많이 웃기다고 느꼈다.

더구나 루인에게 이들 관계를 “이성애”라고 명명할 권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루인이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남들은 “이성애”라고 간주할 때에도 자신들은 “이성애” 관계도 “동성애” 관계도 아니라고 얘기하는데. 뭔가 전선을 형성하고 싶어서, 너무도 간단하게 범주설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루인에게 계속해서 묻고 있다.

아…, 낚시 바늘만 잔뜩 던지곤 도망치는 글이다-_-;;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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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글에 답글을 쓰면서 두루뭉실했는데, 그 두루뭉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해요;;; 헤헤. 🙂

글쓰기 형식: 자모음과 종결어

문장의 종결어로 “~했군요”와 “~했네요”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방식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에서, 사이버 공간 역시 이런 성별 구분에서 자유롭지 않은데(ㄴㅇㅂ의 퍼스나콘이나 ㅆㅇ의 미니미, ㅍㄹㅊ의 아바타 등이 대표적일 듯), 굳이 이런 이미지가 아니어도 문장을 통해서, 원한다면 원하는 방식으로, 성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일본어에서 남성형 감탄사와 여성형 감탄사가 다르다고 배운 적이 있고, 프랑스에서 남성형 명사와 여성형 명사를 구분하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어의 경우엔, 종결어의 사용 방식을 통해 성별을 표현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이런 성별은 주민등록번호 상의 성별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장을 통해 성별을 판단하고 그렇게 그 글에 접근하는 편이다. 일테면 이웃 블로거인 토룡왕자님과 벨로공주님의 관계처럼(뜬금없이 뭔가 큰 스캔들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적는 편집기술 -_-;; 흐흐). 토룡마을을 둘러싼 블로거들 사이에서 종종 접하는 웃음을 표시하는 방법은 “껄껄”인데, 이 웃음소리는 소위 “남성적”이라고 불리는 방식이고 그래서 “호호”라는 방식으로 웃음을 표시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사람을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동시에, 이런 웃음 표현에서 나타나는 성별의 의미, 그리고 이런 웃음을 표현하는 방식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맥락들을 짐작할 수 있는 계기일 수도 있다.

이렇게 적는 건, 오후에 R과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새삼스럽게 떠올라서. 아마 “수술이 나를 증명하는 건 아니다”를 [Run To 루인]에 링크하면서 혹은 그 글과 관련해서 [Run To 루인]에 글을 쓰며 적은 것 같은데, 정말이지 한겨레21에 기고했던 그 글을 이곳에 링크하기 전까진, 루인의 성별이 드러나는 어떤 언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 다시 고민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문장 구성에 있어, 자모음 하나, 조사 하나를 선택 할 때에도, 언제나 어떤 고민 속에 있었다.

이 글을 시작하며 예로 든 것처럼, “~했군요”를 사용할지 “~했네요”를 사용할지에 있어 언제나 망설였다. “정말 그렇군요”라고 적을지 “정말 그렇네요”라고 적을지와 같은 고민 앞에서, “그렇군요”라고 썼다가, 슬그머니 지우고 “그렇네요”라고 바꾸는 식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혹은 적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이 고민하는 경험들과 궤를 같이 하는 지점이다. 다른 mtf/트랜스여성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한국사회에서 “여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공유하는 경우가 있다. 일테면 이마가 둥글다거나, 문장을 읽을 때 끝을 살짝 올린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마가 둥글지 않은 사람도 많고, 문장을 읽으며 반드시 끝을 올리진 않지만, 이런 관찰과 행동은, 끊임없이 자신이 주장하고 “증명”해야 하는 맥락의 효과/결과이다. 소위 mtf/트랜스여성의 “과잉 여성성”이나 ftm/트랜스남성의 “과잉 남성성”은 이런 맥락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고, 그렇기에 끊임없이 어떤 행동들을 관찰하고 그런 관찰 속에서 자신의 행동 유형을 만들어 간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재밌는 건, [트랜스아메리카]의 경우, 브리를 연기한 배우는, mtf/트랜스여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이미지, 행동 유형을 재현하는데, 이를 통해 mtf/트랜스여성의 “여성성” 뿐 아니라 소위 말하는 “여성성”까지 패러디하며 “여성성”의 구성을 보여준다.)

루인은 이런 강박이 별로 없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Run To 루인]에 글을 쓰면서, 이곳에서 루인을 표현하는 방법은 문장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이런 강박 속에서 글을 썼다. (어딘가에 기고한 글, 혹은 어쨌거나 “논문”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글을 읽을 때의 이미지는 또 다르긴 하지만.) 물론 루인은 조사는 물론 쉼표의 유무와 그 위치에 따라 완전히 미치는 인간이긴 하다. 며칠 전부터 메모를 해두고 써야지 하다가 결국 완성하지 않은 한 글에서도 적었듯, 일테면 왜 “이”가 아니라 “가”를 썼을까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쉼표를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와 같은 걸로 고민하기 시작하면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미치곤 한다. (그래서 루인의 글을 퇴고할 때면 전체적인 맥락을 잡는 것과 함께 이런 지점도 따지는 편이고, 출판한 글에서 이런 문제가 걸리면 한동안 그 글을 안 읽는 편이다.) 물론 상대방은 아무 의미 없이 그렇게 쓴 경우가 대부분이다. -_-;; (이러니 혼자 있다고 심심하지는 않다;;;)

아무튼, 이런 강박 속에서 문장을 구성하는 와중에, 여전한 강박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편하게 쓰기 시작한 건, 순전히 토룡마을 (이웃)주민들 덕분이다. 최소한 이런 이미지(성별에 있어)로는 비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매번 문장을 구성하는 순간순간 갈등하는 문제이지만,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는지와 함께, 루인이 어떤 식의 강박 속에서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지의 단면을 깨달은 건, 토룡마을 (이웃)주민들은 너무도 잘 알겠지만, 토룡마을을 놀러 다닌 결과랄 밖에. 그래서 아무리 바쁘다 해도 블로그를 멈출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뭔가 글이 시작과 끝이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인데-_-;; 아무려나, 그래서 문체라는 건, 말 그래도 그런 문장을 구성하는 사람의 어떤 지점과 고민을 보여주는 한 방식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배수아는 “타인의 말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착하여 총체적인 비판을 날릴 수 있는 용기의 근저에는 대개 한 인간이 그의 한 마디 발언을 통해서도 이 세계의 모든 정신을 빈틈없이 한꺼번에 반영해야 한다는 무리한 전제가 숨어 있는 듯하다.”고 비판했고(문맥상으론 조롱의 의미도 있고), 이런 비판이 의미가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론 하나의 문장 속에 그 사람이 의도했건 아니건 그 사람의 어떤 고민이 담길 수도 있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 소설에서 배수아의 문장은 정말이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사용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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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아메리카] 안 보신 분 중 관심 있으시면, 공유 가능 ;;;_M#]

법과사회 집담회, 이후+법으로서의 젠더/섹슈얼리티

01
블로그를 하면서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어느 날 어느 자리에 갔는데, 루인이라고 소개를 하자, [Run To 루인]의 그 루인이냐며 루인 블로그를 아는 사람을 만나는. 그럴 때면 어떨까 하는 상상.

그래서 지난 서울여성영화제 때의 일은 기쁘고 설레는 일이었죠. 키드님과 벨로님 그리고 아옹님, 세 분을 (루인의 입장에서) 만나진 못했지만 그렇게 어느 순간에 서로를 지나쳤고 그것을 글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건, 두근거리는 일이에요. 지금, 댓글과 블로그를 통해 만나는 분들을 만약 다른 방식으로 만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면 설레고요.

근데 어제 집담회에서 정말 이런 일이 생겼어요! [여/성이론]에 쓴 글을 읽고 블로그를 찾아 읽곤 한다는 말에, 한편으론 수줍었지만, 기쁘고 반가웠죠. 상상만 했지, 설마 일어날까, 반문했으니까요. 반가웠어요!

02
혹시나 하는 바람이 있었기에, 허전함이 몸 한 켠을 채우곤 했지만, 그래도 기뻤어요.

03
사람이 얼마나 올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토론도 의외로 활발하고 재밌었다. 주제 자체가 경우에 따라선 누구도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할 수도 있는 주제였고 ㅎㅁㅈ의 발제문과 달리, 루인의 발제문은 토론에 그다지 좋은 발제문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이 많은 얘기를 했다. 좋은 얘기들, 신나게 말 할 수 있는 그런 얘기들.

그런 와중에 가장 피하고 싶었지만 항상 직면하는 질문이 있었다. 만약 특별법을 제정한다면 요건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 법제정, 입법화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 편, 법이 필요한 지점들이 있기도 한데, 그렇다면 호적정정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요건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고민들. 법제정이 일종의 협상과정이라면 어느 지점에서 협상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법이란 애초 불가능하다면(어떤 의미에선 루인에게도 불리한 법인데) 어디서 어떻게 “합의”하고 조율할 것인가. 이런 고민 속에서 조금은 외면하고 싶은 부분이었기에, 질문을 받았을 때, ㅎㅁㅈ과 루인은 서로에게 먼저 대답하라고 미루기도 했다.

그런데,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라는 가정을 그대로 둔다면, 현재의 법체계와 제도를 둔 상태에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가정엔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협상할 수 있을까? 영국처럼 GID 판정만으로 성별을 변경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까? 아니면 지금과 같은 방식을 유지해야 할까? 어느 쪽도 불만스러운데….

04
그리고 이건 발제문. 몇 시간 만에 거의 날림으로 쓴 글.

주최: 법과사회 대학원생 모임 집담회
장소: 서강대학교 다산관 603호
일시: 2007.04.21.19시
주제: 젠더/섹슈얼리티의 입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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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서의 젠더/섹슈얼리티
루인(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runtoruin@gmail.com)

※이 글은 “성전환자 성별변경을 둘러싼 법적 논의들”(이대대학원신문 제55호, 2007.03.12.)을 토대로 대폭 수정한 글입니다.

우선 전에 방송에서 듣기에 성전환을 하시는 분들의 경우 때로는 주미등록증을 바꾸어서 들고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지 알고싶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현행법상으로는 그러한 행위는 공문서위조로 처벌받는데, 이러한 경우까지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거든요.
-한 법대 학부생이 메일로 보낸 질문에서

2006년 6월 22일 대법원은, 대법원 판례로는 처음으로 성전환자의 호적정정 신청을 허가하는 판결을 했다. 이 판결이 있은 지 넉 달 정도 지나, 근 1년에 걸쳐 준비한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을 10월 12일 발의했고, 현재는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이 특별법은 모든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호적상의 성별 변경 및 개명을 원하는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즉, 이 법안이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트랜스젠더들이 겪고 있는 여러 경험들 중 일부인 호적정정과 개명, 그리고 이와 관련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다.

특별법이 요구하는 성별변경의 요건은 “1. 의료법 제2조에 정한 의사 2인 이상(정신과의사 1인을 포함)의 소견서, 2. 생식능력이 없을 것, 3. 혼인관계에 있지 않을 것,” 이렇게 세 가지이다.

특별법의 요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여러 논의들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요건이 너무 적거나 느슨하다며 이제 아무나 호적상의 성별 변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와는 달리 지나치게 규제하고 제한하는 것 아니냐며 비판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다분히 후자의 입장에서, 이 법안 내용에 상당히 비판적인데,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특별법이 가지는 자체의 한계 때문이다. 일테면, 요건 2호는 “생식능력이 없을 것”을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호르몬 투여만으로도 생식능력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호르몬을 일정 기간 이상 투여하면 된다는 건지, 그럼에도 성기재구성수술을 해야 한다는 건지, 무정자증이나 “불임”이라면 호르몬 투여 등의 의학적 조치가 없어도 된다는 건지, ftm의 경우 호르몬 투여도 없었지만 완경으로 “생식능력이 없”다면 된다는 건지 모호해서 결국 판사의 재량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법을 구체적으로 혹은 좀 더 엄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하나는 왜 입법운동이어야 하는가이다. 입법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방식은 결국 더 많은 규제조건들을 만들거나 명문화한다는 점, 기존의 법안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다는 점 등의 한계가 있다. 모든 입법운동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호적상의 성별 변경 등과 관련한 특별법은 호적정정은 필요하지만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법적 요건에 부합하도록 요구하거나 원천 배제한다. 그리하여 “진성트랜스젠더”이기 위한 “조건”, “자격심사기준”을 더 많이 그리고 더 까다롭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트랜스젠더의 성별 변경과 관련한 문제는 현재의 특별법이나 입법운동방식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경험들과 겹쳐 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의사는 아이를 1번/3번 아니면 2번/4번으로 구분하고, 그렇게 국가에 등록하고 관리하는 체계-주민등록제도와 호적제도가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들이 호적상의 성별 변경을 요구하는 토대란 점에서, 문제는 법안을 제정해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호적법과 주민등록법 등 관련법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근본’적인/‘효과’적인 “해결”일 수 있다. 입법운동은 사실상 기존의 법을 문제시하지 않으며 기존의 법/담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법을 만든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식에 문제제기하는 것은 별로 없으며(있다고 해도 결국 기존의 법/담론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고) 호적정정이 쉬워졌다고 해서 다른 불편들까지 해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국사회는 취직 등에 있어 주민등록초본 등 개인정보를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다. 성별변경과 관련한 기록이 주민등록초본엔 남고(최근, 임시방편으로 요청이 있을 경우, 기록을 지울 수 있다고 하지만 원칙적으론 남는다), 그리하여 입사원서를 제출하는 것은 곧 “나는 트랜스젠더이다”라고 커밍아웃/아웃팅하는 격이다. 트랜스젠더임을 말하지 않고 입사했다가, 한참 후에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퇴사 혹은 “권고사직”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이러한 기록은 “나를 뽑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재 계류 중인 특별법이 지금의 내용으로 통과되어도, 이렇듯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오히려 호적상의 성별 변경을 더 어렵게 만들거나, 쉽게 만든다고 해도 그에 맞추어 끊임없이 새로운 입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입법으로 “해결”할 것이며 무엇까지 법으로 통제할 것인가.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질문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주민등록증을 교환하는 것이 불법인데 그것을 처벌할 것인지 말 것인지와 같은 질문구조, “주민등록증 교환이 당연하다고 여기는지”와 같은 질문구조는 현재의 사회제도의 작동을 은폐한다. 이런 식의 질문구조는 주민등록증을 교환하며 살아가야 하는 구조를 얘기하지 않으며, 불법이지만 처벌을 할 것인지 고민이다는 말은 법 자체를 그대로 둔 체, 법이 가지는 문제점, 주민등록증이나 국가가 공인하는 개인 신분증명서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사회문화제도적인 측면에는 질문 하지 않는다(트랜스젠더들에게 신분증은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배신하는 것이란 점은 별도로 하고). 취직할 때 호적등본을 제출하는 것, 술집에서 나이를 검사 한다며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문화적인(그리하여 제도적인) 맥락부터 얘기하지 않는 건, 국가에서 인지한 합법적인 존재들을 (은유로서 그리고 문자 그대로) 불법체류자로 확정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들의 주민등록증 교환 행위는, 한국 사회에서 주민등록증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징후하는 현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법안폐지운동이 더 괜찮냐면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법안폐지운동은 사실상 입법운동과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법이라는 담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법(만)을 최종심급으로 여긴다. 입법운동이 법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략이라면, 법안폐지운동은 법이 있어서 문제라고 얘기하기에 법에 도전하는 것 같지만, 결국 법의 권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방식이며 이런 방식 자체가 법/담론의 효과이다. 현재의 삶은 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입법운동과 법안폐지운동은 별로 다르지 않다.

이 말이 입법운동도 법안폐지운동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입법운동이 필요한 지점들이 있고 법안폐지운동이 필요한 지점들이 있다. 하지만 특별법의 경우, 의사의 소견서를 요구하는 요건 1호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의 성별을 둘 중 하나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의료체계를 통한 국민국가의 기획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 더구나 이런 요건은 성별과 성별에 따른 규범을 의사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 만약 어떤 트랜스여성이 자신은 여성이라고 얘기하는데, 의사는 여성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비록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실제 한 트랜스여성은 정신과상담이 끝날 즈음 바지를 입고 갔다가,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신과상담을 연장해야 했다. 자신이 주장하는 여성성(혹은 남성성)과 의사가 요구하는 여성성(혹은 남성성)이 일치하지 않을 때, “진성” 트랜스젠더임을 결정하는 건 결국 의사(를 매개하는 어떤 담론)가 요구하는 규범성이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한국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젠더규범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도 이런 규범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언제나 상당한 긴장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유일한 법을 기준으로 하지 않기 위해, 현행 법/담론을 유일한 조건이 아닌 여러 법/담론들 중 하나로 상대화하는 방식의 운동은 어떻게 진행할 수 있을까? 법의 효용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법을 상대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이런 고민은, 젠더나 섹슈얼리티가 이미 담론의 구성물임을 숨긴다. 법 이전, 담론 이전의 어떤 젠더나 섹슈얼리티가 있다는 걸 전제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 얘기하는 젠더는 “오직 둘 뿐이고 의사의 할당에 따라 불변하는 것”이란 수식어를 숨긴 것이며, 법조문이 없다면 젠더나 섹슈얼리티의 표현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믿음 역시 현행 법/담론의 효과이다.

“남성”으로 통하는 외형의 사람이 치마를 입으면 안 된다는 법제도는 없지만, “남성”으로 더 잘 통하는 사람이 치마를 입고 돌아다닐 때면, 항상 혐오폭력의 위협을 동시에 느낀다. 아니 치마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자체가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이미 규범적인 법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말한다. 법조문(입법운동/법안폐지운동)이 아니라 젠더나 섹슈얼리티 자체도 이미 법/담론을 통한 해석으로 경험하고 있다면, 입법운동은 무엇을 입법하는 것이며, 법안폐지운동은 무엇을 폐지하는 것인가. 법조문에 있건 없건, 혹은 삭제하건 상관없이, 자연적인 것으로 그리하여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그 어떤 젠더/섹슈얼리티를 고민하는 것이, 법을 둘러싼 논의일 지도 모른다.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