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페미니즘 사상』: 매우 짧은 리뷰

인종차별주의와 연관된 공포가 상당히 가시적으로 대상화된 흑인의 몸에 투사된 관념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 동성애공포증에 깔려있는 공포는 누구나 게이나 레즈비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231)

혐오범죄는 개인을 처벌함으로써 가시적인 동성애의 사례를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사례로 인해 나머지 동성애자들을 벽장 속에 가두어 두는 효과가 발생한다. 게다가, 동성애가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인식되자, 동성애를 공적이고 합법화된 공간에서 제거하려는 전략이 의도된다. 동성애자 결혼금지법은 동성애의 “확산”을 멈추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232)

에이즈 담론에서 아프리카, 동물, 표면상 일탈적으로 보이는 섹슈얼리티가 서로 연결된다는 점은 이러한 관념들이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Hammonds 1986; Watney 1990). 폴라 기딩스가 논의한 대로, “믿을 만한 학회지에서도 예컨대 녹색원숭이와 흑인여성을 연결한다거나 에이즈의 기원이 아프리카 성매매여성(흑인여성의 오염된 성기)에게 있다고 추정하려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계속해서 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에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낸다”(Giddings 1992, 458). (246-247)

그 이후 윌리암스는 포르노그래피가 성관계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라고 논의한다. 윌리암스는 포르노그래피를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재연하는 “사유관습”이라고 보게 되었다. 윌리암스에게 포르노그래피는

관음증적인 응시주체로 하여금 상상력을 펼치며 관찰대상의 주체성을 말소해버리는 자동감각에 탐닉하게 한다. 온전한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듣고 대화하고 상대를 돌보는 대신에 그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감각으로 대체해 버리는 사유습관인 것이다. … 대상은 진압되어 이러한 감각이 투사되는 유순한 “사물”이 된다.(Williams 1995, 123) (249)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박미선, 주해연 옮김. 서울: 여이연, 2009)을 읽고 있습니다. 저는 섹슈얼리티와 성정치를 다룬 6장을 가장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포르노그래피를 사유습관으로 분석한 윌리암스의 통찰은 매우 매력적이라는. 에헷.

한국에 페미니즘 이론 공부할 때 보통 로즈마리 통의 『페미니즘 사상』을 많이 사용했는데요(요즘도 그런가요?). 저는 콜린스의 책이 훨씬 좋다고 느껴요. 기초입문으로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고 콜린스의 책을 읽는다면 무척 좋을 듯. 통의 책은 젠더를 중심으로 여타의 범주를 덧붙이며 설명합니다. 젠더는 이런데 계급에서는 저렇고, 인종이 더해지면 또 다르고 …. 어떤 보편적인 젠더(혹은 ‘여성’)를 가정하고 그 기준에 계급이나 인종을 더하며 다양성을 만드는 식이죠. 사실 많은 이들의 글이 이렇고요. 하지만 콜린스의 책은 덧붙이기 식의 설명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설명합니다. 최소한 세 가지 범주, 젠더-인종-계급의 교차점, 그리고 (이성애)섹슈얼리티의 교차점들에서 이들이 서로 얽혀 있음을 매우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전 이 책이 다양한 범주의 교차점을 분석하는 글쓰기나 방법론의 역할모델로, 교차점에서 사유하는 방식의 역할모델로 매우 좋다고 판단해요.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콜린스는 트랜스젠더를 여러 번 언급합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분석 범주는 아닙니다. LGBT를 나열할 때만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트랜스젠더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요? 반면 흑인 레즈비언 인식론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는. 하하.

+또 다른 리뷰가 어딘가에 실릴 예정입니다만 … 아하하;;;;;;; ㅠ_ㅠ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일 뿐인가?

[이태원 살인사건] 2009.09.28.월. 18:10. 아트레온 5관 7층 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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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영화제인 SeLFF의 자막 작업으로 읽은 거 말고, 가장 최근 영화관에 간 건 … 무려 3월 15일. 허억. 바쁘다는 핑계로, 학회 일이 있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도 했거니와 주말에 영화관을 가지 않으니 이런 사태가 발생했네요. 흑. ㅠ_ㅠ

이 영화는 어떻게든 극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이태원을 배경으로 한다니까요. 물론 어느 기사에서 얼핏, 이태원UN 클럽에서 촬영한 것 외엔 모두 세트장에서 촬영했다는 정보는 이미 읽었어요. 영화의 실질적인 배경이 이태원은 아닌 거죠. 하지만 이 영화는 이태원이 주제어, 핵심어더군요. 암튼, 제목에 끌려 영화관에 갔습니다. 매우 오랜만에.

01
내가 읽는 소설의 반은 장르소설이다. 판타지건, 추리소설이건 뭐건.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은 꽤나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소재가 살인사건인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언제나 불쾌함을 떨칠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죽은 이는 언제나 대상으로만 남겨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떻게든 죽은 이를 삶을 영위한 생명으로 다루려고 애써도 어쩔 수가 없다. 살인으로 죽은 이는 언제나 피사체로 묘사될 뿐이다. 이것이 불편해서 불만이었다. 혹시 [옥스포드 살인방정식]을 읽은 분 계시는지? 이 소설은 올해 읽은 소설 중 최고에 속한다. 인간에게 애정을 품는 척하지만, 이 소설은 오직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만 관심이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부분은 이 지점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과 관련 있는 이가 아니면, 등장 인물 중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작가는 매우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다. (혹시나 앞으로 읽을 분을 위해 여기까지만 쓰지만, 읽었다면 무슨 뜻인지 알 듯.)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이의 역사는 사건 해결이라는 측면에서만 중요하다. 그 외의 역사는 필요없다. 이 장면은 죽은 이의 애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상처의 무게는 무시된다. 헤집어서 어떻게든 증거를 잡으려고 애쓴다. 물론 한 마디 한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이라고. 이것 뿐이다. 죽은 이 역시 이 과정에서만 등장한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사건을 증거하는 피사체로 등장한다. 죽은 이의 몸은 주한미군의 폭력, 주한미군과 관련 있는 한미행정협정(SOFA)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한 증거로만 등장한다. 죽은 이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은 말이 없다. 법정의 방청석에서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직접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은 억울한 한국, 한미행정협정의 부당함으로 인해 피해만 당하는 한국의 상징이 된다.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은 애인은 조사해도 혈연가족은 조사하지 않는다. 이미 다 조사한 것처럼 다른 형사가 대신 설명할 뿐, 혈연가족을 조사하는 장면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애인만 조사한다. 당연하다. 혈연가족은 한국의 억울함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상당히 매력적인 정치학을 펼칠 수 있음에도 매우 평이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아니 평이한 게 아니라 상당히 문제가 많은 영화가 되었다.

02
이미 다 알고 있는 걸까? 이 영화의 주요 공간은 법정과 경찰 취조실이다. 영화 제목에 굳이 이태원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이 영화의 제목을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미국국적소지자 살인사건” 정도려나? 그럼에도 이태원을 제목에 사용한 건 이유가 있다.

감독은 이태원을 주한미군 지역, 미국국적소지자, ‘외국인’들의 공간, 혹은 “점령지”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안타깝다. 이태원을 주한미군의 점령지이자, 한국의 피식민 상태의 상징으로 파악하는 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운동권문학에서 주로 사용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시가 끔찍할 수 있습니다. 미리 경고합니다.*

혹시 밤 두 시나 세 시경 異胎院에 가보았나

불야성이 어떤 곳인지
치외법권이 어떤 것인지
산발한 반 토막 꿈 어지럽게 흩어지고
이 지상 가장 점잖은 척 음흉한 나라
희고 검은 씨앗, 누워 받는 곳
異胎院, 식민지 일번지 혹시 가보았나
-고광헌 「異胎院」(1985) 중에서.

이태원의 공식 한자 표기는 梨泰院인데 고광헌이 異胎院이란 한자 표기를 사용한 건 이태원의 역사때문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정은 일본남성의 아이를 가진 비구니와 여성들을 조선남성의 아이를 가진 여성들과 구분하기 위해 따로 모여 살게 했는데, 그 지역이 현재 이태원이다. 異胎院은, 한자를 통해 알 수 있듯, ‘외국인의 아이를 밴 자궁’이란 뜻이다. 1980년대 중반 즈음부터 반미운동을 펼친 이들은 바로 이를 이용해서 한국이 미군의 점령지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異胎院이란 표기를 사용했다.

2009년의 극장가에 걸린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이태원을 이해하는 입장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이태원을 영화 제목으로 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태원을 영화 제목으로 걸었다는 건, 이태원을 한미관계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영화에서 이태원은 매우 단순한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저 미국국적의 사람들이 한국인을 살해했지만 한미행정협정으로 살인죄에 따른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상징일 뿐이다. 영화에서 이태원은 사람이 사는 동네가 아니다. 유흥가이자 한미행정협정의 보호를 받는 미국인의 특권을 상징할 뿐이다.

그래서다. 영화관에 있는 내내 괴로웠다. 영화가 끝나고 나선 더 괴로웠고.
(괴로워 하는 나 자신이 가증스럽기도 하고.)

03
영화는 매우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있지만 이 역시 매우 짧게 언급하고 끝난다. 다름 아니라 인종정치, 아니 혈연정치다.

영화에서 살인범으로 지목된 이는 두 명. 한 명은 한국인 아버지를 둔 미국국적의 알렉스다. 다른 한 명은 멕시코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미국국적의 피어스다. 피어스는 그나마 어머니의 국적이 언급되지만 알렉스는 어머니의 국적이 언급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감독의 인종정치에서, 더 정확하게는 혈연정치에서 아버지가 한국인이면 어머니의 국적과 인종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까? 알 수 없다. 영화를 읽는 내내 궁금했다. 도대체 알렉스의 어머니의 국적과 인종은 무엇일까? 하지만 오직 아버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알렉스의 아버지만 나온다. 결국 아버지들의 싸움이다. 멕시코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어스의 부재하는 아버지와 한국인 아버지의 피를 받은 알렉스의 끊임없이 등장하는 (힘 있는)아버지의 대립일 뿐이다. 이것은 죽인 이게서도 마찬가지다. 죽은 이를 설명하는 몇 안 되는 내용 중엔 3대 독자란 말도 있다. 이 말에 감독의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영화 초반에 피어스를 본 박대식 검사는 “미국인이 왜 저래?” 인가 “한국인이 왜 저래?”인가, 암튼 얼굴 모습으로 인종을 구분한다. 그때 검사 옆에 있던 이가 멕시코인 미군과 기지촌에서 일한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라고 설명한다. 외모로 인종과 국적을 구분하는 것도 매우 논쟁적인 이슈지만, 나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만약 피어스의 아버지가 백인미국남성이었다면, 난 좀 의심했을 것이다. 1980년 전후는 그런 시기였기 때문이다. 기지촌 ‘성노동자’가 백인미국남성과 결혼할 가능성은 매우 적은 시기였다. 1950년대부터 시작한 국제아(혹은 ‘혼혈아’로도 불리는) 이슈는 이태원과 기지촌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미국에 가서 살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한국에서 산다면 그 차별이 극심해서 이태원이나 기지촌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한다.

피어스는 미국국적에 미군이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걸까? 별로 그렇지도 않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상, 비록 한미행정협정으로 상당한 특권을 누린다고 해도, 국제아란 지위는 미국국적보다 중요하다. 미군은 피어스가 한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알렉스의 돈 많은 아버지와 변호사 집단은 알렉스가 한국혈통이란 이유로(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영화 내내 노골적이다) 피어스를 범인으로 몬다. 그럼 간단하니까. 하지만 영화는 이 이슈를 외면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형사 중 한 명이 미군의 인종차별 태도를 언급하긴 한다. 하지만 한국인이 국제아와 외국인을 차별하는 태도는 싹 무시한다. 박대식 검사가 피어스 편을 드는 것 같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박대식은 범인을 가리는 게 중요할 뿐이니까(이 태도만은 그나마 괜찮다). 그래서 마치 인종차별은 한국에 없다는 듯, 혹은 피어스는 미국국적이니 국제아라도 한국에선 차별을 받지 않을 거란 듯.

여기서 나는 괴로웠다. 피어스와 알렉스 둘 중 한 명, 혹은 둘 모두가 살인범이어도 미국국적 소지자고 그 중 한 명은 돈 많은 아버지를 둔 덕분에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런데 이 과정을 혈연과 아버지의 싸움으로 바꾸고, 한국인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하는 감독의 태도에도 화가 났다. 죽은 이의 가족은 슬픔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될 뿐이란 점음 너무 불편했다. 메시지를 위해 사건을 이용했다는 느낌 밖에 안 든다. 그래서 영화관에 있는 내내, 영화가 끝나서도 괴로웠다. 주한미군의 폭력 문제, 한미행정협정의 부당함을 알리는 방법이 정녕 이것 밖에 없었던 걸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성찰하고 더 복잡하게 고민할 수는 없었던 걸까? 이런 식의 인식론에 문제제기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그에게 무의미한 걸까? 정말 묻지 않을 수 없다.

케슬러와 맥켄나의 『젠더』: 1970년대 젠더 이론을 추적하기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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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 젠더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

원래 계획이라면 지난 달에 다 읽었어야 했다. 중간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런 이유는 모두 핑계다. 정말 열심히 읽었다면 열흘이나 늦을 리가 없으니, 그냥 게을러서 늦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세 편 정도의 관련 글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닐 테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기고 쓰고 싶은 글이 생긴다면 ‘좋은 책’이지 않을까? 즉, 어떤 형태로건 독자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인 건 분명하다. 다 읽었는데도 할 말이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에 가까우니까. 그렇다면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은 어떨까? 세 가지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페미니즘이건 트랜스젠더이론이건 퀴어이론이건 뭐건 간에, 내게 1970년대는 초기에 해당한다. 이론과 논의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번창했다기 보다는 싹이 트기 시작하는 시기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쓰면, 1950년대 중반 ‘젠더역할’이란 용어를 의학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며 ‘섹스역할’과 구분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즈음 트랜스젠더 개인(Virginia Charles Prince)과 의학에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섹스와 젠더 구분을 1960~1970년대 페미니즘에서 적극 받아들였고, 젠더는 페미니즘 논의의 중심이 된다. (논의하는 사람에 따라 1930년대의 마가렛 미드를 섹스-젠더 구분의 시발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1970년대까지의 섹스-젠더 구분 논의는 상당히 단순했다고 이해했다. 앤 오클리(Ann Oakley) 식으로, 섹스는 용기처럼 변하지 않지만 젠더는 용기에 담는 내용물처럼 변할 수 있다는 정도랄까? 혹은 성전환수술의 토대를 닦은 존 머니(John Money)나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처럼 섹스가 변할 순 있지만, 지정한 젠더를 강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정도?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1970년대까지는 섹스-젠더를 분명하게 구분할 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란 이분법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기란 인상이 강했다. 이것이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변한다는 게 내 앎의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1979년에 처음 나온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들은 시종일관 이분법을 당연하게 가정하는 이론들을 꼼꼼하게 비판하며 이분법을 가정하지 않는 이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책은 내가 알고 있던 1970년대 미국 젠더 논의의 지평을 넓혀줬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분했고, 마지막 결론을 기대했다.

한편, 이 책은 당시의 범주인 트랜스섹슈얼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이유기도 하다. 트랜스섹슈얼을 다루지 않는 젠더 이론이었다면 나중에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젠더 이론을 다루는 동시에 트랜스섹슈얼의 경험도 다루고 있어 예정보다 일찍 읽었다. 다루는 정도도 한 챕터가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한 챕터에선 집중해서 분석한다. 그리고 트랜스섹슈얼을 다루는 장면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케슬러와 맥켄나는 두 영혼의 사람(버다치)은 젠더 이분법을 위반하거나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트랜스섹슈얼은 이분법을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성전환수술은 트랜스섹슈얼들이 이분법을 내면화하고 강화하는 실천의 하나란 것이 저자들의 주장 중 하나다. 이런 큰 주장때문에, 수술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섹슈얼로 설명하는 이들의 경험은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 다른 부분에선 매우 영민한 저자들이 트랜스섹슈얼을 분석할 땐 왜 이렇게 막힌 걸까 싶어 안타까웠다. 이분법을 강화하느냐 하지 않느냐란 논쟁은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분법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기 전 나는 무척 기대했다. 제목도 “Toward a Theory of Gender”(젠더 이론을 향하여)로, 이분법의 한계에 갖히지 않는 새로운 젠더 이론을 제시할 거란 기대를 부풀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 기대는 금물. 간단하게 요약하면, 젠더를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해서 접근하면 차이는 당연할 수밖에 없기에 이런 구분 자체를 질문하고 이분법을 몸에 익히는 과정 자체를 질문하는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끝. ㅡ_ㅡ;; 1970년대 후반엔 상당히 새롭웠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어떤 사람들에겐 이 정도의 논의만으로도 신선할 거 같다(젠더는 양성평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상당하니까). 하지만 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겐 무척 진부할 따름이다. 아니, 내용이 진부한 게 아니라 나의 기대가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난 케슬러와 맥켄나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읽고 싶었지, 문제제기를 읽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논문 한 편으로 써도 충분할 주장을 도대체 왜 책 한 권 분량으로 쓴 거냐고!!”라고 구시렁거렸다. 흐흐.

이 책을 읽던 초기엔 이 책이 무척 흥미진진했다. 다 읽고 나니 어쩐지 허탈하다. ;;;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1970년대 젠더 논의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책이란 점이다. 아울러 버틀러와 같은 이의 주장이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활발하게 진행한 이론적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즐거웠다. 젠더 이론을 다루는 수업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괜찮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