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네스, 어느 트랜스젠더의 생애를 재해석하기.

#국내 포털 기준, 성인인증을 거쳐야 하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ㅡ_ㅡ;; 읽는 이의 입장에 따라 조금은 불편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단 소리죠.

Garfinkel, Harold. “Passing and the Managed Achivement of Sex Status in an “Intersexed” Person Part 1.” Studies in Ethnomethodology. By Garfinkel. Englewood Cliffs, N.J. : Prentice-Hall, 1967. 116-185.

1950년대 말이었나. 미국의 한 ‘여성’이 한 명의 정신과 의사(혹은 정신분석학자)와 한 명의 사회학자를 찾아갔다. 그는 두 명의 ‘전문가’에게 자신을 간성으로 소개하며, 남자아이로 자랐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면 트랜스젠더, 간성 관련 연구를 막 시작하던 무렵이다. 정신과 의사와 사회학자는 트랜스젠더와 간성 관련 해서 어느 정도 지명도를 획득하고 있었다. 그 ‘여성’은 다른 의사의 추천으로 이 둘을 찾아갔다.

아그네스(Agnes)란 이름으로 불린 그 ‘여성’은 당시 의학에서 상당히 새로운 존재였다. 고환과 음경이 소위 규범적 형태로 불리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가슴이 상당히 발달한 상태였다. 머리는 금발로 길었고 손이나 발이 조금 크긴 했지만 체형 역시 여성형이었다. 전문가라 불리는 두 명의 표현을 빌리면, 아그네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냥 여성’이란 점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문가라 불리는 두 인물의 이름은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와 해럴드 가펑클(Harold Garfinkel).

아그네스는 스톨러와 가펑클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생애사를 얘기했다. 가족들과 주변 이웃들 모두 자신을 소년으로, 남자아이로 키웠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한 번도 남자로 생각한 적은 없었으며, 항상 여성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이런 괴리감을 느끼며 자라다 어느 순간 이차성징으로 소위 남성형 성적 특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0대 중반이 될 무렵, 여성형 성적 특질도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의료적 조치도 취한 적이 없는데 에스트로겐이 고환에서 분비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그네스는 기뻤다고 한다. 여성으로 통하는 외모로 변하면서 여성의 성역할을 새롭게 배웠고 남들에게 여성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그네스의 고민은 외부성기형태였다. 남성형 외부성기는 그에게 상당히 불편했다. 이성애자인 아그네스는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때때로 성관계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외부성기형태를 말하길 원치 않았다. 외부성기형태 뿐만 아니라 소년으로 자라야 했던 역사도 말하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아그네스의 욕망은 실현하기 힘들었다. 외부성기형태 재구성수술은 그에게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여성처럼 보이길, 여성으로 통하길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normally, naturally”) 보이길 원했다. 남자로 자랐다는 역사, 간성이라는 몸의 조건, 십대 후반에야 여성다움을 배워야 하는 상황을 다른 이들이 알지 않길 바랐다. 아그네스는 이런 저런 고민을 스톨러와 가펑클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스톨러와 가펑클은 각각 아그네스와의 인터뷰에 뿌리를 둔 연구결과물을 출판했다.

첫 연구결과물이 출판되었거나 출판되기 직전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스톨러와 가펑클은 아그네스가 간성이라고 믿었다. 의료 조사 역시 아그네스가 간성이라고 판정했다. 아그네스는 에스트로겐이 자연스럽게 분비되었다고 증언했고, 이에 의사들은 분비기관이 고환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첫 만남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아그네스는 스톨러에게 자신은 10대 중반 즈음부터 에스트로겐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에스트로겐의 출처는 어머니였다. 아그네스의 어머니는 에스트로겐 약을 복용해야 하는 처방전이 있었다. 아그네스는 약국에 가서, 어머니의 처방전으로 약을 대신 사는 것처럼 말하며 약을 샀고, 그 약을 먹었다.

비록 4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이 일화는 상당히 많은 고민거리를 남긴다.

아그네스의 경험은, 이차 성징이 발생하기 직전부터, 혹은 그 즈음부터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신체 외형에 좀 더 근접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10대에 호르몬 투여를 원하는 경험적/’생물학적’ 근거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의료적 조치에 반대하는 적잖은 논리 중엔 “10대는 성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시기이니 성인이 되면 그때 시작하도록 하자.”란 주장이 있다. 문제는, 20대에 호르몬을 시작하면 10대에 시작하는 것보다 효과가 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mtf/트랜스여성이면 남성형 성적 특질이 두드러질 가능성이 상당하고, ftm/트랜스남성이면 여성형 성적 특질이 두드러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의료적 조치를 시작하는 시기가 늦을 수록 사회에서 ‘이질적이고 어색한 존재’로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10대엔 호르몬을 비롯한 의료적 조치를 해선 안 된다는 주장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란 티가 나야 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이차 성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후 의료적 조치를 시작할 경우, 더 많은 수술을 해야할 가능성이 크단 점에서 ‘성’을 바꾸려면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각오를 하라는 의미기도 하다. 그럼 언제 의료적 조치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10대는 성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시기”란 식의 언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점이다. 10대에만 혼란스러운 게 아니다. 혼란은 평생 경험한다.

아그네스와 인터뷰한 가펑클의 글을 읽으면 음경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음경에서 어떤 성적인 감각을 느끼지 않으며 결코 발기하지 않는다고 가펑클에게 말한다. mtf/트랜스여성과 음경/페니스의 관계는 대체로 이와 같다. 적잖은 자서전, 공적 인터뷰와 같은 글에서 음경은 부인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너무너무너무 끔찍할 뿐이라 쳐다도 보기 싫다는 식이다. 자신의 외부성기를 쳐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반응은 트랜스젠더의 자기 몸 인식에 있어 널리 알려진 방식이기도 하다. “아이러니”는,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할 때 음경 혹은 페니스를 뒤집는 기술을 선택하면서 발생한다. 소위 여성형 외부성기형태를 갖추기 위해 음경 혹은 페니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하지만 너무도 필요한, 없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또한 항상 존재하는 “아이러니.”

“아이러니”란 단어는 가펑클이 아그네스를 평가하며 사용했다. 이것은 가펑클의 한계이자, 가펑클과 아그네스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다. 공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개개인들의 관계에서 나누는 얘기에 상당한 간극이 있는 건 당연하다. 음경 혹은 페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공적으론 끔찍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성적인 쾌락을 포기하길 꺼리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음경 혹은 페니스에 부여하는 통상적인 의미(남자의 상징)가 아니라 단순한 신체기관, 살덩어리, 성적 기관으로만 이해하기도 한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해들이 모든 자리에서 통용되는 건 아니다. 트랜스젠더, 성전환의 진정성 혹은 완성을 측정하는 핵심적인 기준이 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의 여부인 문화에서 외부성기는 끔찍해서 없애야만 한다. 여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성적 감각에서 중요하다는 식의 언설은 ‘진정성’을 의심하게 한다. “너 진짜 트랜스젠더 맞아? 너 가짜지?”란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한국에선 “군대 가기 싫어서 트랜스젠더인 척 하는 거지?”라는 반응을 유발한다. 이런 문화적인 상황에서 공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내용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아그네스가 스톨러와 가펑클에게 자신의 음경이 끔찍하다고 말하는 걸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가펑클에겐 “아이러니”겠지만 아그네스에겐 전략적 발화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아그네스가 가펑클과 스톨러에게 자신을 간성으로 소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전략적 발화라고 해서, 음경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고민은 ‘여자’와 ‘규범’이다. 가펑클은 아그네스에게 여자로 보이고 통하길 원하는 거냐고 질문한다. 아그네스는 가펑클에게 자신은 여자로 보이거나 여자로 통하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길 원한다고 말한다. 가펑클은 아그네스의 이 말이 혼란스러운 듯 하다. 나는 아그네스의 이 말이 상당히 멋지다고 느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펑클이 정의하는 여자와 아그네스가 정의하는 여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펑클에겐 여자라는 어떤 원본, 진짜 여자라는 상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가펑클이 ‘여자처럼 보인다’라는 말은 ‘진짜 여자,’ ‘생물학적 여자’를 모방하고 따라하길 원한다는 말과 같다. 가펑클의 말은 아그네스가 ‘여자’도 ‘여성’도 아니지만 어쨌든 ‘여자처럼’ 보일 수는 있다는 걸 암시한다. 아그네스는 여자처럼 보이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길 원한다고 답하는데 이때 여자는 이미 결정된 요소가 아니다. 누구나 여자처럼 보일 수 있고, 트랜스여성이라고 해서 여자처럼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얼마나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느냐이다. 이럴 때 핵심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한 사회의 젠더 규범을 얼마나 잘 인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소위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여성’이라고 해서 ‘여자처럼’ 보이는 데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패했을 때 받는 타격의 정도는 각자가 다를 것이다. 아마도 아그네스, 혹은 트랜스젠더라면 그 타격은 훨씬 크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통하는 게 중요한다. 아그네스의 이 말은 젠더 이론에서 30년 정도 지나서야 비로소 논의를 시작하는 말들을 암시한다.

이런 글을 읽을 때 속상한 건 하나다. 아그네스의 본명도, 그가 남긴 글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여러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분석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닮았다.

온다 리쿠, [구형의 계절]: 젠더는 소문이다

읽은 걸로는 세 번째(혹은 네 번째) 소설이자, 온다 리쿠의 작품 출판 순서상으론 두 번째 소설인 [구형의 계절]은, 첫 번째 소설인 [여섯 번째 사요코]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시작하면서 환상소설의 형식으로 전개하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청춘성장소설 정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읽은 세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10대며 학교를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근데 다른 작품들 상당수도 그렇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세 작품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이런 선택은 꽤나 적확하다고 느꼈다.

“현실”과 “환상”이란 모호한 경계를 타고 있는 작품들은, “현실”이 “환상”보다 더 “환상”적이고, “환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임을 (조금은 서툴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선 어떤 “현실”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이런 선택이 성공적인 것도 아니고, 남겨진 “현실” 공간은 더 “환상”적인 곳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어쩌면 “현실”이라고, 돌아와야 할 곳이라고 여기는 곳이 “환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 아이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시기로 불리는 청소년기 혹은 10대 시기와 잘 어울린다. 10대만이 질풍노도의 시기이고, 20대가 되면 안정을 찾는다거나, 10대가 정말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 사회가 이런 식으로 10대를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나이는 소설의 이야기 및 형식과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다. 번역자는 이 소설을 장르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장르구분과 그런 경계를 무시하거나 흐리는 작품이라고 얘기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고. (온다 리쿠의 소설에서 장르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누가, 어떤 작품이 그렇지 않겠냐 만은.)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10대 성장물이거나, 추리소설형식과 환상소설형식 등의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는 것이기보다는, 소문과 젠더에 관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요 소재는 소문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이렇게 전해들은 소문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변형되는 소문과, 소문을 믿으며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들과, 소문(이럴 때 소문은 소원/바람이기도 하다)이 정말 이루어져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소문을 전파하는 사람들(출처 혹은 내막을 밝히는 부분에선 아쉬웠지만, 이 역시 분명한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느끼진 않았다). 이 소설을 소문이라는 측면에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인데, 이 과정에서 소문을 전파하는 혹은 수용하는 방식이 성별(“남성”과 “여성”)에 따라 얼마나 다른지를 또한 분명하게 얘기한다. 일테면, (소설을 읽어야만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겠지만 :P) “5월 17일에 오는 사람”을 “남학생”들은 침략자, 그래서 몰살하러 오는 사람으로 수용하고 전파하는 반면, “여학생”들은 데리러 오는 사람으로 수용하고 전파한다는 식이다.

물론 이런 식의 분석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온다 리쿠는 이런 식의 말들을 고스란히 차용해서 소설을 진행하지만, 바로 이런 식의 설명에 따라 성별이 모호해지는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이런 언설 자체에 균열이 발생한다. 주인공 격(이 소설에서 분명한 주인공은 없지만)인 미노리가 그렇다. 여학교를 다니는 미노리는, “남학생”과 대화를 하는 상황에선 “여학생”이라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학생”들과 있을 때면 “여학생들은 저렇다니까”란 식으로 자신을 “여학생”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말이 미노리가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여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읽기에 따라선 “여학생/여성”이나 “남학생/남성”이란 식의 구분으로 자신을 얘기하지 않음을(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 없음) 의미한다. 동시에, “여학생은 이러이러하고 남학생은 저러저러하다”란 식의 말들은 규범적인/관념적인 말일 뿐이란 걸 의미한다. 미노리가 가장 친한 친구와 싸우는 장면에서, 같은 반 친구들은 놀라며 말리는 척 하다간, 교실 문을 닫고 싸움이 중단되지 않길 바라고 누가 이길지 내기 하는데, 이는 성별에 따른 편견에 기대어 소설을 진행하는 동시에 균열을 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말들이 만들어낸 성별역할 혹은 성별에 따른 어떤 성격은, 이 소설의 주요 소재인 소문과 겹치면서, 사실상 “여성은 이러이러하고 남성은 저러저러하다”란 식의 언설들이, 소문처럼 출처도 없고 원본도 없으며, 반복해서 말하는(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 믿음임을 얘기한다. 소문이란 게, 원본이나 원형, 출처를 찾기가 힘들고 사실상 그런 것이 없듯, 그저 돌고 도는 말을 통해 진실인 것처럼 여기듯, 젠더 역시 이러하다. 그래서 (최근에 읽은 한 논문의 논리를 슬쩍 빌리자면) “소문은 젠더와 같다/젠더는 소문과 같다”란 비유는, “젠더는 소문이다”란 직유법으로 얘기할 수 있다.

물론 루인의 많은 독후감이 그러하듯, 이런 감상 역시, 엄청난 “오독”일 수도 있지만-_-;;,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젠더는 소문이다”란 문장이 떠오른 건 사실.

“난 트랜스는 아니지만 트랜스로서 살아가며 여러 불편을 경험하고 있다.”

“난 트랜스는 아니지만 트랜스로서 살아가며 여러 불편을 경험하고 있다, 란 말을 어떻게 하면 모순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중얼거렸다. 어제 오후 뜨거운 태양 아래서 걷다가.

앞의 “트랜스”와 뒤의 “트랜스”가 다른 의미라고 얘기하면 되지 않으냐고 말할 수도 있을 테다. 앞의 “트랜스”가 한 개인의 정체성을 “트랜스”로만 환원해서 나이도 초월하고 학벌이나 학력, 계급이나 계층도 초월한 존재란 의미라면, 뒤의 “트랜스”는 한 개인의 부분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거라고. 하지만 “난 트랜스는 아니지만 트랜스로서 살아가며 여러 불편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중얼거렸을 때, 앞의 “트랜스”와 뒤의 “트랜스”는 거의 비슷한 맥락과 의미였다.

어떤 사람은 성전환수술을 하고 호적상의 성별정정을 했지만 자신은 트랜스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을 “넌 트랜스젠더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 상황에서 이 사람에게 트랜스라는 범주/정체성을 덮어씌우는 건 곤란하다. 이럴 때 이 사람은 “난 트랜스는 아니지만 트랜스로서 살아가며 여러 불편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얘기하겠지. 하지만 “난 트랜스는 아니지만 트랜스로서 살아가며 여러 불편을 경험하고 있다란 말이 모순이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중얼거렸을 땐 단지 이런 상황만을 염두에 둔 건 아니다.

나의 직관에선 너무도 자명한데, 다른 사람에겐 자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순이거나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여겨져서 많은 설명이 필요로 한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난 트랜스는 아니지만 트랜스로서 살아가며 여러 불편을 경험하고 있다.”란 말도 이런 상황인 걸까?

“난 트랜스는 아니지만 트랜스로서 살아가며 여러 불편을 경험하고 있다란 말이 모순이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란 말을 조금 바꾸면, 트랜스젠더(transgender)는 아니지만 트랜스젠더화된(transgendered) 상황에 있는 이들의 경험을, 성별이분법으로 환원하지도 않고 트랜스/젠더 이론으로 얘기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가 될 것 같다. 물론 조금 다른 의미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