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삐리스러운 방식으로 문단으로 시작하자.
루이 알튀세르는 호명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한다고 설명했다. 경찰이 “어이, 거기 당신”이라고 부를 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보는 찰나, 그 개인은 국가/경찰의 이데올로기에 적합한/적법한 주체가 된다는 주장이다. 어떤 부름에 호응하는 행위 자체가 그 부름을 자신의 일부로 구성하는 행위, 혹은 그 부름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란 점에서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버틀러는 알튀세르의 설명을 확장하며, 주체는 양심과 죄의식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국가의 법을 대리하는 경찰의 호명에 호응하는 행위는, 해당 법에 자신이 조금도 위배되지 않음, 해당 법질서에 자신이 알맞게 살고 있음을 호소하는 행위기도 하다. 즉 법의 부름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음, 양심에 어긋남이 없음을 표출하는 방식이 ‘뒤돌아보는 행동’이다. 그러니 양심과 죄의식은 주체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그런데 양심과 죄의식이 반드시 해당 이데올로기의 적법한 주체로 구성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양심과 죄의식은 지배 규범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지만, 그래서 지배 규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도록 유도하지만 때때로 그렇지 않은 삶을 살도록 하는 동력도 된다. 비규범적 존재가 지배 규범에 적법한 존재로 살지 못 하는 삶의 양식으로 인해 어떤 ‘죄의식’을 느낀다고 해서, 그 죄의식은 규범에 투항하도록 하기보다 비규범적 삶을 강화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규범적 존재 역시 양심과 죄의식으로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원가족과 나의 관계에 관한 얘기다. 나는 원가족이 요구하는 이성애규범적 실천에 부합하지 못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 적 없고, 도대체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공부를 하겠다며 빈둥거리고 있다. 원가족이 알고 있는 정보의 범위에서 나는 연애를 하지 않고 있으며, 그리하여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결혼할 의지도 없다. 나의 이런 행동은 원가족이 나를 비난하거나 어떤 식으로건 압박할 근거로 작동한다. 끊임없이 관련 압박을 행사하고 규범적 미래를 확언받고자 한다. 한때 나는 이런 압박이 그저 부당한 억압이라고 해석했다. 요즘은 그저 좀 슬픈 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원가족의 어떤 욕망이거나 원가족이 느끼는 어떤 불안이란 점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원가족은 ‘완전한 가족’은 아니라도 그럭저럭 어디 전시하기에 아쉽지는 않은 가족을 구성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 하나가, 나를 제외한 원가족이 구성하고자 한 규범적 가족 구성 욕망을 실현할 수 없도록 한다. 내가 구멍이다. 내가 틈이다. 내가 결격사유다.
원가족의 욕망을 지배 규범적 욕망의 내면화란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런 설명은 부당하다. 나 역시 기존 질서의 어떤 지점에 동조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마치 원가족의 욕망만 질서 유지 욕망이란 식으로 싸잡는 건 부당하다. 아울러 욕망은 이렇게 ‘규범 위반 vs 규범 순응’이란 식으로 간단하게 구분할 수 없다.
아울러 나는 원가족의 욕망과 그것에 부합할 의지가 없는 내 태도로 인해 어떤 슬픔과 미안함을 느낀다. 규범적 실천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나와 오랜 시간 관계를 엮어온 어떤 집단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 한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낀다. 이 미안함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양심을 자극하고 어떤 의미에서 죄책감을 야기한다. 이 양심, 이 죄책감은 원가족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 내가 나를 범주화하고 있는 어떤 명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즉, 지배 규범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나의 죄책감은 나의 범주를 구성하고 강화하는 토대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른 의미에서, 지배 규범의 주체가 된다.
오늘이 아버지 첫 제사다. 제사는 음력이라 양력 기준으로는 이미 1년이 넘었다. 죽음과 애도가 또 다른 주체를 구성하고 있다. 좀 더 정교하게 글을 쓰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