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 비밀스런 햇살(서사, 지역어-동일시)

[밀양] 2007.06.14.18:45, 아트레온 9관 11층 D-10

01
언젠가 누군가가 루인에게 그랬다, 걸음 좀 똑바로 걸으라고.

영화 초반, 흔들리는 카메라. 카메라를 따라 흔들리는 영상. 앞으로 걸어가는 영상. 곧 이어, 이신애(전도연 분)의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모습. 이제 막 도착한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 전단지를 붙이러 돌아다닐 때의 비틀거리는 걸음. 이 걸음이 등장하는 순간, 이신애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팔에 붉은 꽃이 피었다. “이신애를 위한 철야기도”를 한다는 장소에 돌을 던지고 돌아온 신애는 얼음을 준비해서 대접에 담고, 사과를 준비해서 거실에 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깎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씹으며 먹는 모습. 그러다 목이 막힌다는 듯한 표정. 종종 루인도 음식을 먹는데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경험을 한다. 그런 순간이었을까. 그러다 카메라는 손으로 향했던가. 팔에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영화 속에서 종종 불편했던 부분들은 이 장면 하나로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신애는 무얼 먹은 걸까. …둘 다였을까.

마지막, 머리를 자르는 장면. 미장원을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거울을 보며 직접 머리를 자르는 장면. 서늘하게 빛나는 햇살이 가위 날에서 더 눈부시고. 가위소리가 서걱서걱 들렸다. 거울에 비친 목의 모습. 가위로 머리를 자르는 와중에 목을 자를 것만 같았다. 서걱서걱, 서늘한 가위질 소리 사이로 목에서 붉은 꽃이 필 것만 같았다.

…이 세 장면만 기억난다. 만약 영화를 부분만 잘라서 얘기할 수 있다면, 이 세 장면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리라 싶다.

02
만약 이 영화 감상문을 어제 밤에 썼다면 01에서 끝났으리라. 영화관을 나서며 이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걸었다. 추천하고 싶은 만큼이나 추천하기 꺼려지는 영화라고, 지금에야 중얼거린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부분적으로만 기억한다는 전제 하에.

03
지금 상황이 고통스럽다면 그건 현재 상황 자체가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어서라고 자주 중얼거린다. 그래서 “구원”은 “잘 될 거야”란 말과 같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현재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라고, 고통을 고통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라고 고민한다.

영화관으로 가는 길에 “종교적 믿음과 정치”와 관련한 어떤 이야기를 떠올렸다. 몇몇 페미니스트들, 여성학선생님들이 이젠 종교에 귀의하기 시작했다는 얘기. 이 얘기를 전해준 누군가는, 종교를 믿기 시작하면 정치는 이제 끝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말에 동의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 얘기가 떠올랐던 건 우연일까 싶을 정도로 영화와 묘하게 닮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구원과 관련한 내용으로 읽지는 않았다. 내용은 읽지 않고 제목만 대충 봤던 관련 기사들의 상당수가 “구원” 혹은 “종교” 운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가?

종교만 놓고 봐도, 이 영화에서 기독교(?, 혹은 천주교?)란 종교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불교였어도 무방하리라. 다만 어떤 종교냐에 따라 행동과 세세한 부분은 달라지겠지만, 큰 줄거리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루인에게 이 영화는 자기 서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란 질문으로 다가왔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신애는, 고통스럽게 경련하다 우연히 본 부흥회 현수막을 통해 종교에 귀의한다. 그전까지, 하나님이 어딨느냐고, 눈에 보이는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한 이신애는 이제 연애를 하는 것처럼 설레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몰랐던 시절을 부끄럽게 얘기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얘기한다. 그렇게 종교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서사로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교회 사람들과 있을 땐 이렇게 자신을 얘기하지만 혼자 있을 땐, 여전히 고통스러워한다. 교회 사람들과 있을 때 한 얘기는 거짓이고 혼자 있을 때의 고통이 진실이란 말이 아니라, 둘 다 진실이다. 종교에 귀의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행복하다는 말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하는 행동이며, 어떻게든 현재 상황을 다른 식으로 방향 전환하려는 노력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종교에 몰두하는 순간의 망각[집중은 동시에 망각이자 외면이니까]이 주는 행복은, 바로 그 행복의 크기만큼 망각의 고통을 준비하고 있다.

종교를 통해 서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지만, 종교적인 언어[반드시 종교일 필요는 없다고 느낀다, 심리상담소에 갔을 수도 있고 정신분석을 받을 수도 있었다]로 현재 상황을 전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니 종교적인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배신당했을 때, 그때의 무너짐. 영화를 읽는 내내, 이신애가(혹은 루인이)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계속 불안했다. 울음에 체한 것 마냥, 울지 못한 상태로, 울음이 몸에 축적되어 가는 상태로 그렇게 지낼 때, 결말은 뻔하다. 적어도 루인에겐 그랬다. 붉은 꽃 피어나는 장면이 나왔을 때, 온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결국 이렇게 되는 구나, 싶었다.

04
이 영화를 읽으며 기묘한 경험을 했다. 영화 초반부터 이신애와 동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행동에서만 튕겨난 것이 아니라 이신애가 대사를 할 때에도 종종 동일시에 실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일까? 대사가 나올 때면 이신애보다는 이신애와 같이 있는 밀양사람들 혹은 종찬(송강호 분)에 더 쉽게 밀착하고 있었다.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밀착하고 있는 모습. 이신애가 혼자 있고, 혼잣말을 할 때면 상관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얘기 할 때면 거의 항상 그랬다.

이 영화에서 죽은 준을 제외하면, 서울지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신애가 유일하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밀양이라는 공간에서 이신애의 상황을 설명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밀양지역어는, 영화 초반에 종찬이 설명하듯, 부산지역어와 거의 같다. 자동차를 수리하러 온 종찬의 첫 말투를 들었을 때, 루인은 온 몸이 간지러워지는 걸 느꼈는데, 그 말투는 루인이 19년 동안 매일같이 사용한, 그리고 지금도 부산에 가면 너무도 익숙하게 듣는 그 말투였다. 몸이 기억하는 말, 몸이 너무도 익숙하게 사용하는 말, 지금도 혈연가족과 전화를 할 때면 툭툭 튀어나오곤 하는 그 말투.

부산지역어를 사용하는 영화는 많은 편이다. 하지만 루인이 읽은 적지 않은 영화들 중에서, 여러 지역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나 [밀양]처럼 서울지역어와 부산/밀양지역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영화는 더욱더. 바로 이 지점에서 동일시와 튕겨남을 동시에 경험했다. 일테면 [미녀는 괴로워]에서 루인이 동일시한 한나는 서울지역어를 사용하지만, 영화 속 다른 인물들도 한나와 비슷한 말투를 사용하기에 딱히 튕겨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밀양]은 완전히 달랐다. 이신애와 동일시하는데도, 대사를 할 때면, 종찬이나 다른 밀양사람들에게 더 익숙함을 느꼈다.

그래서 찾아보니 송강호의 고향이 김해란다. 부산 바로 옆에 있는. 이건 상당히 재밌는 일인데, 루인이 더 익숙하게 느낀 말투는 비전문배우들(즉 밀양에서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밀양말투가 아니라 전문배우인 송강호의 말투였다. 영화를 읽었다면 눈치 챈 분도 있겠지만, 소위 부산말투라고 여기는 부산지역어를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한 사람들은 밀양사람들이 아니라 송강호였고. 김해출신의 송강호는 서울에서 연극이나 영화를 찍으며 몇 년 이상을 지냈을 테고, 그렇게 지내며 부산지역어를 사용할 일이 있으면, 부산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더 부산지역어스럽게 말투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지금 부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부산지역어스러운” 말투. 그리하여 지금 부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특성화시킨 송강호 식의 부산지역어가 “더 진짜”같은. (“특성화”시키고 “과장”해야지만 “진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루인 역시 몇 년을 서울에서 살며 부산지역어를 특정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기는 마찬가지고.

사실 루인이 만나는 범위에서, 송강호/종찬이 사용한 말투 정도의 억양을 요즘의 부산에서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송강호/종찬이 사용한 말투는 루인이 ‘부산사람들은 이러이러한 억양을 사용하지’, 라고 기억하는 바로 그 특성을 부각하고 있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동일시를 못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밀접하다고 느낀 건지도 모른다.

+ 혹은 송강호는 송강호가 기억하는 혹은 특성화하는 방식의 부산지역어를 사용하는데 반해, 밀양사람들은 영화에서 일부러 서울지역어 혹은 서울말투를 사용하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화라는 매체이기 때문에 감독이나 스탭들이 “자연스럽게” 말하길 요구했겠지만, 정작 카메라 앞에서 그러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다보니 송강호가 “더 부산지역어스럽고” 밀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덜”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다른 한편으론, 서울지역에서 부산지역어를 들었기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고.

05
기말논문이 텍스트분석인데, 이 영화로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텍스트로 분석하려면 못해도 대여섯 번은 읽어야 할 텐데 그렇게까지 읽을 엄두가 안 난다.

근데, 소위 영화평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 상당수가 이 영화를 상찬하지 못해 안달인 느낌인데,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비록 이 글에서 쓰진 않았지만 불편한 지점도 적지 않고.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순박 혹은 “순정”이라고 불리는 폭력

[좋지아니한가家] 2007.03.08. 19:40, 아트레온 7관 9층 I-5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중 읽고 싶은 영화는 세 편. [훌라걸스], [행복을 찾아서] 그리고 지금 이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이 영화감독의 전작인 [마라톤]은 아직 안 읽었다. 그래서 어떤 감독인지 모르는 상태이며, 이런 의미에서 루인에겐 신인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감독이지만, 개봉하기 전부터 몇몇 영화 관련 매체에서 많이도 띄운 영화기도 했다. 물론 관련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관련 기사가 많이도 나온 건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에 흥미가 생긴 건, 김혜수가 나온다는 거(물론 김혜수의 열혈 팬은 아니다, 그저 90년대 후반 라디오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 처음 알았는데;; 그때의 인상이 상당히 좋아서 아직까지 김혜수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이 재밌다는 거 정도랄까? “좋지 아니 한가”와 “좋지 아니 한 家”를 동시에 의미 하고 있어서 재밌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포일러는 기본
이 영화를 읽던 와중에, 불현듯 모든 판단을 중지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코미디 정도의 장르일 이 영화는 불현듯 아주 불쾌한 영화로 바뀌었는데, 그건 아들 역할을 하는 용태(유아인 분)가 하은(정유미 분)에게 하는 말에서 비롯한다. 영화 초반에 용태는 하은의 집 앞에 가선, 하은이 원조교제(혹은 ‘청소녀’ ‘성판매’)를 하는 걸 알고, “창녀 같은 X야”라고 외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불쾌함은 그 다음에 찾아가선 뜬금없이 “모든 걸 다 용서 할께”라는 말로 바뀌고 그러고선 매일 찾아가선 용서한다고 말한다.

누가 누굴 용서하고, 누가 누굴 용서할 권리/권력이 있으며, 하은은 무슨 잘못을 한거지?

이 불쾌함 때문에, 용태의 이런 태도는 후반에 뒤집힐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걸 기대했다. 즉 마치 용태 자신에게 하은을 용서할 권리/권력이라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과도한 기대였고, 감독은 이런 용태의 태도를 끝까지 끌고 가고 이것을 사랑에 따른 “순정” 혹은 “순수함”으로 포장한다. 쳇. 불편함은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천진함 혹은 순수함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그렇게 의미화하는 것에 따른 해석이다. 얼마 전, 우연히 동영상을 한 편 보다가 중간에 끈 적이 있다. 그 동영상은 일본 방송 프로그램을 편집한 내용이었다. 우선 한 명의 흑인(지금 이 글에서 흑인이라는 말은 사실상 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사는 사람들을 싸잡아 획일화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이다, 다만 그 사람의 국적이 안 떠올라서;;;)이 나와서 자신의 나라는 스페인(?) 혹은 유럽의 어느 나라가 사실상 700년 가까이 침략해서 지배했지만 사과 한 마디 안 했다면서 일본이 한국을 35년 간 침략한 건 비교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한국인으로 추정하는 사람(그 사람은 정말 “한국인”일까?)이 35년이 아니라 36년이라고 정정하며 ‘차분’하게 식민지 기간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침략했다는 그것 자체에 문제제기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그 “흑인”은 ‘언성을 높이며’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읽다가 짜증나서 닫았는데, 그 짜증의 이유는 댓글들에 있었다. “한국인”은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데 “흑인”은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말한다는 내용들. (물론 일본식민지 경험과 관련해서 상상 가능한 댓글들 역시 수두룩했고!)

루인이라고 그렇게 느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사는 지역마다 감정이나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에 따른 반응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20년을 살고 대학부터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루인은, 루인의 말투로 인해 종종 씨니컬하다, 공격적이다, 라는 얘길 많이 듣는 편이다. 한동안은 루인도 스스로를 그렇게 설명하곤 했고 지금도 종종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지만 이는 단순히 루인 개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얘기들을 듣는 와중에 깨달은 건, 재밌게도 정작 부산에선 이런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며 문득 떠올랐다. 지역에 따른 말투의 차이를.

부산에서 살다보면 종종 서울지역어를 비꼬는 얘길 자주 듣는다. 현재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추적하면, 대충 “말투가 곱상한 것이 재수 없다”란 반응이 핵심이었다. 여기엔 당연히 양성이라는 성별이분법이 작동하며, “머시마가 재수 없게 말투가 그게 뭐냐”라는 반응들. 이에 반해 서울에 살며 자주 들은 혹은 방송을 통해 듣는, 부산이나 경상도 지역의 말투나 언어에 관한 내용은 공격적이고 쌈질 하는 것 같음이었다. 즉, 부산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꼭 싸우는 것 같다는 반응들. 물론 루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공격적이거나 씨니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루인의 말투나 루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지역색을 배제할 수 있을까? 적어도 루인이 아는 한 루인의 말투가 공격적이라고 말한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비부산, 비경상도 지역 출신이었다. 이것을 일반화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한국이라는 지역에서도 지역에 따라 말투가 다르고, 그래서 어떤 지역에선 일상적인 말투가 다른 지역에선 공격적이고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로 여겨진다.

그 “흑인”의 말투가 감정적이거나 공격적이라고 여겨진 건, 댓글을 단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하기 방식에 비추어 발생하는 반응이고, 여기에 한국의 극심한 민족주의, 일본에 가지는 열등감, 그리고 그 사람이 “흑인”이라는 것이 겹치며 발생한 반응임을, 동영상 아래 달린 댓글에서 느꼈기에 더 이상 그 동영상을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용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어떤 “순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루인에겐 용태의 행동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용태에겐 애시 당초 하은의 감정이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제멋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하은의 상황에 관심 없기로는 감독도 마찬가지인데 감독은 그저 엄마가 아프지만 약값도 없는 가난한 상황의 하은이라는 정도의 설명만 한다.) 용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순정” 혹은 “순박함”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행동양식에 자신을 맞춤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하은은 “원조교제”를 한다는 이유로 용태의 모든 행동은 더욱더 정당화 된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이 영화는 유쾌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하은의 반응은 언제나 무관심이고 그래서 용태의 행동은 튕겨나갈 뿐이다. 이 영화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점에 있는데, 하은의 무반응은 용태의 말을 수긍하는 동시에 무시한다. 즉, “그래서 뭐?”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좋아한다는 용태의 말에 좋아하면서도 용태의 비난과 “용서”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용태의 행동이 얼마나 불편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낳는다. 용태의 아버지 창수(천호진 분)의 동영상을 본 후 하은을 찾아가 신경질을 내고 혼자서 나자빠지는 장면은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착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사실은 제멋대로의 행동일 뿐임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 이런 도덕적 판단에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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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가족이 새롭지 않았는데, 이 영화 속 가족구도가 새롭다면 이는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지, 영화 속의 가족구조 자체가 새로워서는 아니다. 새롭다니? 너무도 익숙한 걸.

이 영화를 읽고 나왔을 때 이 영화를 가장 재밌게 읽으려면 다섯 번은 읽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캐릭터마다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고, 용선(황보라 분)이란 인물은 참 매력적인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시작하며 등장하는 용태와 하은의 관계는 다른 지점을 읽지 못하게 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다시 읽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읽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