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순박 혹은 “순정”이라고 불리는 폭력

[좋지아니한가家] 2007.03.08. 19:40, 아트레온 7관 9층 I-5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중 읽고 싶은 영화는 세 편. [훌라걸스], [행복을 찾아서] 그리고 지금 이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이 영화감독의 전작인 [마라톤]은 아직 안 읽었다. 그래서 어떤 감독인지 모르는 상태이며, 이런 의미에서 루인에겐 신인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감독이지만, 개봉하기 전부터 몇몇 영화 관련 매체에서 많이도 띄운 영화기도 했다. 물론 관련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관련 기사가 많이도 나온 건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에 흥미가 생긴 건, 김혜수가 나온다는 거(물론 김혜수의 열혈 팬은 아니다, 그저 90년대 후반 라디오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 처음 알았는데;; 그때의 인상이 상당히 좋아서 아직까지 김혜수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이 재밌다는 거 정도랄까? “좋지 아니 한가”와 “좋지 아니 한 家”를 동시에 의미 하고 있어서 재밌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포일러는 기본
이 영화를 읽던 와중에, 불현듯 모든 판단을 중지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코미디 정도의 장르일 이 영화는 불현듯 아주 불쾌한 영화로 바뀌었는데, 그건 아들 역할을 하는 용태(유아인 분)가 하은(정유미 분)에게 하는 말에서 비롯한다. 영화 초반에 용태는 하은의 집 앞에 가선, 하은이 원조교제(혹은 ‘청소녀’ ‘성판매’)를 하는 걸 알고, “창녀 같은 X야”라고 외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불쾌함은 그 다음에 찾아가선 뜬금없이 “모든 걸 다 용서 할께”라는 말로 바뀌고 그러고선 매일 찾아가선 용서한다고 말한다.

누가 누굴 용서하고, 누가 누굴 용서할 권리/권력이 있으며, 하은은 무슨 잘못을 한거지?

이 불쾌함 때문에, 용태의 이런 태도는 후반에 뒤집힐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걸 기대했다. 즉 마치 용태 자신에게 하은을 용서할 권리/권력이라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과도한 기대였고, 감독은 이런 용태의 태도를 끝까지 끌고 가고 이것을 사랑에 따른 “순정” 혹은 “순수함”으로 포장한다. 쳇. 불편함은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천진함 혹은 순수함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그렇게 의미화하는 것에 따른 해석이다. 얼마 전, 우연히 동영상을 한 편 보다가 중간에 끈 적이 있다. 그 동영상은 일본 방송 프로그램을 편집한 내용이었다. 우선 한 명의 흑인(지금 이 글에서 흑인이라는 말은 사실상 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사는 사람들을 싸잡아 획일화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이다, 다만 그 사람의 국적이 안 떠올라서;;;)이 나와서 자신의 나라는 스페인(?) 혹은 유럽의 어느 나라가 사실상 700년 가까이 침략해서 지배했지만 사과 한 마디 안 했다면서 일본이 한국을 35년 간 침략한 건 비교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한국인으로 추정하는 사람(그 사람은 정말 “한국인”일까?)이 35년이 아니라 36년이라고 정정하며 ‘차분’하게 식민지 기간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침략했다는 그것 자체에 문제제기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그 “흑인”은 ‘언성을 높이며’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읽다가 짜증나서 닫았는데, 그 짜증의 이유는 댓글들에 있었다. “한국인”은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데 “흑인”은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말한다는 내용들. (물론 일본식민지 경험과 관련해서 상상 가능한 댓글들 역시 수두룩했고!)

루인이라고 그렇게 느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사는 지역마다 감정이나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에 따른 반응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20년을 살고 대학부터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루인은, 루인의 말투로 인해 종종 씨니컬하다, 공격적이다, 라는 얘길 많이 듣는 편이다. 한동안은 루인도 스스로를 그렇게 설명하곤 했고 지금도 종종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지만 이는 단순히 루인 개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얘기들을 듣는 와중에 깨달은 건, 재밌게도 정작 부산에선 이런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며 문득 떠올랐다. 지역에 따른 말투의 차이를.

부산에서 살다보면 종종 서울지역어를 비꼬는 얘길 자주 듣는다. 현재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추적하면, 대충 “말투가 곱상한 것이 재수 없다”란 반응이 핵심이었다. 여기엔 당연히 양성이라는 성별이분법이 작동하며, “머시마가 재수 없게 말투가 그게 뭐냐”라는 반응들. 이에 반해 서울에 살며 자주 들은 혹은 방송을 통해 듣는, 부산이나 경상도 지역의 말투나 언어에 관한 내용은 공격적이고 쌈질 하는 것 같음이었다. 즉, 부산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꼭 싸우는 것 같다는 반응들. 물론 루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공격적이거나 씨니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루인의 말투나 루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지역색을 배제할 수 있을까? 적어도 루인이 아는 한 루인의 말투가 공격적이라고 말한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비부산, 비경상도 지역 출신이었다. 이것을 일반화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한국이라는 지역에서도 지역에 따라 말투가 다르고, 그래서 어떤 지역에선 일상적인 말투가 다른 지역에선 공격적이고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로 여겨진다.

그 “흑인”의 말투가 감정적이거나 공격적이라고 여겨진 건, 댓글을 단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하기 방식에 비추어 발생하는 반응이고, 여기에 한국의 극심한 민족주의, 일본에 가지는 열등감, 그리고 그 사람이 “흑인”이라는 것이 겹치며 발생한 반응임을, 동영상 아래 달린 댓글에서 느꼈기에 더 이상 그 동영상을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용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어떤 “순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루인에겐 용태의 행동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용태에겐 애시 당초 하은의 감정이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제멋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하은의 상황에 관심 없기로는 감독도 마찬가지인데 감독은 그저 엄마가 아프지만 약값도 없는 가난한 상황의 하은이라는 정도의 설명만 한다.) 용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순정” 혹은 “순박함”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행동양식에 자신을 맞춤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하은은 “원조교제”를 한다는 이유로 용태의 모든 행동은 더욱더 정당화 된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이 영화는 유쾌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하은의 반응은 언제나 무관심이고 그래서 용태의 행동은 튕겨나갈 뿐이다. 이 영화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점에 있는데, 하은의 무반응은 용태의 말을 수긍하는 동시에 무시한다. 즉, “그래서 뭐?”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좋아한다는 용태의 말에 좋아하면서도 용태의 비난과 “용서”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용태의 행동이 얼마나 불편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낳는다. 용태의 아버지 창수(천호진 분)의 동영상을 본 후 하은을 찾아가 신경질을 내고 혼자서 나자빠지는 장면은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착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사실은 제멋대로의 행동일 뿐임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 이런 도덕적 판단에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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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가족이 새롭지 않았는데, 이 영화 속 가족구도가 새롭다면 이는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지, 영화 속의 가족구조 자체가 새로워서는 아니다. 새롭다니? 너무도 익숙한 걸.

이 영화를 읽고 나왔을 때 이 영화를 가장 재밌게 읽으려면 다섯 번은 읽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캐릭터마다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고, 용선(황보라 분)이란 인물은 참 매력적인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시작하며 등장하는 용태와 하은의 관계는 다른 지점을 읽지 못하게 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다시 읽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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