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단상: 생명과 윤리 이슈 – 질문만 던지기

얼마 전,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으리라. 동거묘가 있는 입장에선, 행여라도 냥이가 외출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동거묘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사건이 발생하는 일은 빈번하니 이번 일이 특별한 건 아니다. 이번 일로 유난스레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와 같은 사건이 특별할 게 없음을 새삼스레 깨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다른 많은 사건처럼 그 사건도 여성혐오를 동반했다. 많은 이들이 가해자로 가정하는 이를 비난했다. 이런 비난의 언설이 불편하여, 그 사건을 외면했다. 아울러 그렇게 비난하는 이들의 불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비난하는 행위를 통해 얻고자/보상받고자 하는 것이 무엇(윤리? 권력? 규범적 지위? 욕설 자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일각에선 채식-육식 논쟁이 벌어졌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논쟁은 어김없이 그럼 식물을 먹는 행위는 정당하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동물학대와 육식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언설에, 그럼 식물은 생명이 아니냐는 반론은 잊히지 않고 등장한다. 이 반론은 채식이 정치적 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 그때부터, 음식을 먹는 행위가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리라(즉,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듯).
 
비록 이런 반론의 일부는 혐오발화에 가깝지만, 나 역시 가끔은 묻고 싶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둘을 동일시해도 괜찮은걸까? 둘은 정말 대응관계에 있는 걸까? 채식하는 사람도 동물을 학대한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동물학대와 육식행위를 동일시할 때 놓치는 부분, 동물학대와 육식행위를 동일시하며 그 대안으로 채식을 얘기할 때 놓치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왜 채식이 대안이어야 할까? 난 잘 모르겠다.)
 
채식을 하는 이들 중 일부는 채식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얘기하며 채식행위와 육식행위에 윤리적인 위계(이른바 생명윤리)를 부여한다. 채식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것. (최근에 와선 이런 주장을 자중하는 분위기지만..) 하지만 이런 윤리는 늘 동물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생명과 식물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생명을 구분하고, 둘 사이에 우열관계를 만든다. 이 우열관계에서 죽어도 괜찮은 생명과 죽으면 안 되는 생명이 정해진다. 하지만 누가 이 둘의 위계관계를 정할 수 있는 걸까? 누구의 편의일까? 나를 비롯한 모든 판단은 결국 인간이 기준이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이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인간중심이 아닌 것이 어디있으랴. 그저 채식에 윤리적 우위를 부여하는 이들에게 육식이 문제인 것처럼, 동물-식물의 생명위계를 가정하는 언설 역시 논쟁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위계를 설정하겠다면, 생명윤리에서 식물의 생명을 하위에 둘 수 있는 근거를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설득력이란 게 매우 논쟁적인 영역이라, 실현할 수 없는 영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요청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남은 질문에 나는 언젠가 어떤 모색을 하고 싶다.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동물학대-육식행위-채식행위의 관계를 좀 다른 방식으로 고민 해야한다는 고민만 있을 뿐. 뭐, 누군가 울림을 주는 그런 글을 쓰거나 이미 관련 글이 있어 추천해준다면 너무 고맙고!

+
이 글은 콩단백이란 글과 같은 날 썼다. 그런데 이제야 공개하는 건, 내용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까먹고 있었다… ;;;;;;;;;;;;;;;;;;;;;

채식: 관계맺기

가끔 블로그 유입 검색어를 확인하면 재밌는 검색어가 많습니다. 최근 제 블로그에 집중해서 들어오고 있는 검색어는 “정신분열증 고양이 사진”… 응? 이건 거의 하루 동안 87명이 들어왔는데 도대체 왜… ㅡ_ㅡ; 꾸준히 들어오는 검색어는 “감동적인말” 근데 전 이런 말 안 쓰는데요? 저와 전혀 상관없을 법한 검색어는 상당히 많은 분들이 찾고, 이 블로그의 핵심어인 트랜스젠더, 루인, 채식 같은 건 하루에 두어 건 정도입니다.

채식 관련 검색어 중 재밌는 건 “채식주의자는 무얼 먹어야”란 게 있습니다. 심심찮게 들어오는 검색어입니다. 근데 제가 할 말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냥 대충 아무 거나 드셔도 괜찮습니다… 랄까? ;; 이 검색어가 구체적으로 무얼 찾고자 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처음으로 채식을 시작하며 관련 정보를 찾는 거라면, 저는 하나 씩 줄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첫 석 달 정도는 돼지를 안 먹고, 그 다음엔 닭을 안 먹는 식으로.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안 먹는 것, 식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겠다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으니까요. 채식 한 달 정도 하고 나서 너무 힘들어 관두고선,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나도 예전에…”란 후일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 생활로서 채식을 하기 위해서도 하나씩 바꿔나가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아요. 뭐, 급한가요? 🙂

저는 채식이 몸에 익어서일까요? 아님, 이젠 실수로라도 우유가 들어간 제품을 먹는다고 해서 개의치 않는 상황이라서 일까요? 이젠 음식선택으로 고민하는 경우는 적은 듯합니다. 대신 채식(나의 입장에선 비건vegan)을 하면서 가죽제품을 선물 받았다면 그건 사용하면 안 되는 걸까? 이런 부분이 늘 궁금합니다. 비건은 가죽제품도 사용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있죠. 하지만 채식이 고행이 아니라면, 상대방이 고심해서 고른 가죽제품 선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5년 전에 선물받은 지갑은 아무래도 가죽인 듯합니다. 그때도 나는 비건이었기에 가죽제품을 꽤나 망설였죠다. 그 전에 가죽제품을 사용하면 몸에 두드러기가 날 때도 있고 해서 더 망설였고요. 근데 정중하게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어요. 선물을 준 사람은 평소 감정표현을 잘 안 하고  늘 무뚝뚝했기에 그가 선물을 고르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그 가죽스러운 지갑은 인조가죽일 수도 있요어. 인조가죽도 썩 내키지 않지만요. 그럼에도 나는 그 지갑을 사용하기로 했고, 그렇게 5년 정도 지난 지금도 잘 쓰고 있습니다.

저는 늘 이런 순간이 고민입니다. 그래서 배수아의 소설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일종의 화두처럼 저를 따라다닙니다.

“혹은 내가 결코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한 그릇의 굴라쉬 수프에 주사위 모양의 고깃덩이가 들어 있을 때, 내가 채식주의자임을 그가 잊은 사실을 가볍게 지적하는 것이 수프 접시의 국물을 떠먹기 전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먹은 다음이어야 하는가.”

언제가 가장 좋을까요? 사실 한 입 떠먹고 나서 지적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한 입 떠먹기 전에 지적하는 것도 크게 문제될 건 없죠. 결코 정성을 무시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매순간,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채식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게 좋을까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답이 어딨겠어요. 🙂

채식과 채식주의는 반드시 일치해야 할까?

종종 채식을 채식주의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걸 알고 나면, “채식하세요?”라고 묻기보다는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다. “주의자ist”라는 무거운 접미사를 사용하는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주의ism란 부담스러운 접미사를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채식을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채식주의에 반드시 채식이라는 행위가 필요한 걸까? 채식을 해야만 채식주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채식을 하는 사람에게 “채식주의자세요?”라고 묻는 건, 채식을 하는 사람은 어떤 계기와 정치적 신념 같은 게 반드시 있다는 선입견 때문일 터. 여기서 선입견이란 말이 반드시 부정적인 늬앙스는 아니다. 그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채식이 소비되고 유통되는 어떤 방식이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일 뿐. 채식은 어떤 신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통념은 채식과 채식주의ism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 둘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있을까?

언젠가 이곳 [Run To 루인]에서 “육식하는 채식주의자vegan”란 상상력으로 채식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했을 때(http://goo.gl/amhT 심심하면 http://goo.gl/q2zP 도;; ), 나는 동물과 식물이란 구분 자체를 문제제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려 3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이와 관련해서 고민을 더 진전한 건 아니다. 채식은 내게 그냥 습관일 뿐, 채식이 매우 분명한 정치학으로 내 삶에 등장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내가 채식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곤 한다. 적어도 혼자 다닐 때,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냥 안 먹는 게 많은 사람일 뿐이다. 농반진반으로 나는 편식주의자일 뿐이라고, 정치적으로 편식한다고 말하면서. 하하.

그렇다고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라는 구절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니다. 고민하지 않을 뿐, 이것은 나의 몇 가지 화두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 다시 든 고민은, 채식과 채식주의가 반드시 일치해야 할까? 그러니까 요즘 들어 나의 고민은 채식이라는 어떤 행위와 채식주의라는 어떤 인식론을 구분할 수 있다면(한시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채식을 하지 않는다고 채식주의자로 자처하지 못 할 이유는 뭔가?’다. 이런 고민은 몇 해 전에 읽은 한 선생님의 글이 떠오르면서 촉발했다. 중산층인 대학 교수는 맑스주의자일 수 있는데, 페미니즘/페미니스트는 여성이라는 특정 젠더로 제한하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적인(혹은 논쟁적인) 인식이라고 지적한 글이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당사자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어떤 운동은 소위 말하는 ‘당사자’만 할 수 있는가? ‘당사자’는 정말 자신의 ‘경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걸까?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운동은 트랜스젠더만 해야 하는 걸까? 트랜스젠더는 정말 트랜스젠더 운동을 가장 잘 할 수 있고, 트랜스젠더 이론을 만드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할까? 당사자 정체성이라는 것이 분명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만, 앞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당사자와 비당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고민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예 당사자주의에 바탕을 두고 질문하면,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의료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사자 앞에서 나는 당사자이기 힘들고, 트랜스젠더는 당연히 이성애자며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당사자 앞에서 나는 곤란한 당사자거나 당사자이기 힘들다. 이럴 때 누가 당사자일까? 간단하게 말해 어떤 경험이나 (정체성)범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다시 채식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채식주의자일 필요는 없고, 채식주의자가 반드시 채식을 할 필요도 없다고 믿는다. 물론 이 말이 성립하기 위해선 채식과 육식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어디서부터는 채식이고 어디서부턴 육식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만(http://goo.gl/q2zP). ;;; 채식과 채식주의를 구분하려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의 현재 상황 때문이다. 나는 과거엔 어떤 이유에서 채식을 했지만, 지금은 그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가 현재로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서, 현재의 내겐 채식을 시작한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아울러 나는 내가 채식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대충 먹는 사람이라고 말하길 더 선호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 나는 채식주의자에 해당한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범주와 다른 사람들이 내게 붙여주는 범주 사이에서(물론 타인이 붙여주는 범주를 내가 사용할 때도 적지 않지만;; ) 갈등하며, 새롭게 든 고민은 ‘채식 혹은 채식주의가 당사자주의일 필요가 있을까?’다. 그래서 채식과 채식주의라는 구분을 설명하는데,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표현이 다시 한번 유용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채식주의라고 불리는 어떤 인식론, 세계관은 뭘까? 글쎄.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다. 비건인 사람도, 육식을 하는 사람도 모두들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설명하면서 서로 열심히 논쟁하다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