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글은 어렵다 혹은 슬프다

어릴 때 “네가 무슨 글을 쓰냐”란 얘길 들은 적 있다. 글 잘 쓴다는 얘길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다. 평범한 축에는 드는지, 못 쓰는 축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와 글은 먼 당신이었다. 누구도 내가 글을 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3 때 1년 바짝 공부했고 수능 운이 좋아서인지 고향을 탈출할 순 있었지만 공부를 잘한다는 소릴 들은 적도 없다. 나 자신 내가 공부를 할 거라고 고민한 적도 없다. 수학과에 가고 싶다고 고민했지만 졸업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전망한 적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은 있었다. 그 일에 재능이 없었기에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막연한 환상 속에 살았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어떤 희망도 없는 상태.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상태.

그랬던 내가 글을 출판했다. 낯설었다. 글 쓰는 재주는 없지만 글 쓰는 것 자체는 좋아했다. 제대로 훈련한 적은 없지만 그냥 부담이 적었다. 운도 따랐다. 마침 트랜스젠더 이슈가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었다. 시사주간지에 처음으로 글을 실었고 그 해 겨울엔 반년간 학술지에도 글을 실었다. 이후 가끔씩 원고 청탁을 받았고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썼다. 출판을 경험하면서 글쓰는 방법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정하게 평가해서 내가 먼저 투고했다면 결코 실리지 못 했을 글도 출판되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내가 쓴 글이 어떤 상태인지 온전히 평가받은 적 없다.
출판한 글이 늘고, 블로그를 오래 하다보니 내가 쓴 글을 먼저 읽은 분을 만나곤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별볼일 없는 글인데도 재밌게 잘 읽었다는 평가를 해줬다. 글 자체가 괜찮기보단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에 좀 더 가까운 평가가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 및 퀴어와 관련한 이슈로 글을 쓰는 사람도 적고 출판된 글도 적으니 자연스럽게 드는 반가움이 아니었을까? 아무려나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친밀감을 형성하다보니 이후론 그냥 좋은 평가만 들었다. 대체로 좋은 평가만 들었지 문제점을 지적받을 기회는 적었다. 그 평가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글을 믿지 못 하는 것이 문제였다. 늘 ‘이런 글을 출판해도 괜찮을까?’를 고민했다. 늘 불안했고 불만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읽으면 허점이 너무 많은 글이었다. 그 허점을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텐데…
글 한 편을 어딘가에 투고했다. 지금까지와의 차이점은 크게 두 가지. 지금까지는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100% 출판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자료집 형태라도 출판을 전제했다. 아울러 언제나 청탁을 받았다. 청탁이 아니어도 요청이나 제안을 받곤 했다. 익명의 심사를 받아 출판한 <캠프 트랜스>도 내가 직접 찾아서 투고한 것이 아니었다. 한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 투고했다. 이번에 투고한 글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출판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누구도 내게 그 원고를 요청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찾았고 내가 알아서 투고했다. 나도 학제 방식에 조금씩 적응하는 것일까?
다시 냉정하게 평가하자. 지금까지 출판한 글을 기준으로 하면 최악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잘 쓴 글도 아니다. 나 자신 불만 가득하다. 일주일 정도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만 가득하다. 글을 쓰는데 얼추 일주일 정도의 시간 밖에 못 들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투고하지 않는 게 옳은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투고했다. 글쓴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평가를 받고 싶었다. 심사자는 익명의 원고를 접할 것이고, 나는 익명의 심사자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 평가를 받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투고하기엔 부끄러운 상태지만 투고하기로 했다. 내 글이 익명의 심사 제도에선 어떻게 평가 받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익명의 심사 제도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를 했달까.
글을 쓰긴 했지만 글을 썼다는 사건만 있고 증거는 없는 그런 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금 슬픈 건 그 글이 내 글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내가 쓴 글인데 내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학술지에 투고한 글이라, 학제의 형식에 맞추느라 그런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 글을 쓴다는 느낌보다는 투고라는 과정에 더 초점을 맞춰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는 즐겁지만 묘하게 내 글을 쓴다는 느낌은 적었다. 이 복잡한 감정은 무엇일까? 그 글은 이제 어떻게 될까? 출판되어도 그렇게까지 기쁘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은 무엇일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심사 결과를 받고 그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 그러니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오늘 투고한 글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잔뜩있다.

퇴고의 즐거움 + 책이 나오긴 할 텐데…

15일까지 급하게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있다. 사실 급하게 마감하면 안 되는데 멘붕 같은 일이 생겨 그렇게 되었다. ㅡ_ㅡ;;; 암튼 8월 초부터 글쓰고 퇴고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데…(라는 건 거짓말. 그 사이에 책장 정리도 조금 했고 부산에도 2박3일 갔다 왔다, 내일은 세미나도 있다;; )

원고지 150매 이내로 써야 하는 글인데 열흘 정도 시간 동안 ‘제대로’ 완성할 수는 없는 법. 그럼에도 완성해야 하는 상황. 다행이라면 그 전에 원고지 60매 분량의 초고가 있었다. 초고 내용을 확장하고 빠졌던 부분을 보충하는 식으로 얼추 이틀 만에 150매 분량을 만든 다음 계속해서 수정하고 있다. 아울러 다음주에 친구가 원고를 한 번 검토해주기로 해서 조금은 안심하고 있기도 한데…
퇴고하면서 좀 웃긴 것이… 초벌 원고에서 ㄱ문장과 ㄴ문장 사이에 좀 더 조밀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서너 문장을 추가한 곳이 여럿있다. 그런데 추가한 문장을 ㄱ, ㄴ문장과 조금 더 잘 어울리고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수정하다보니 결국 ㄱ문장과 ㄴ문장만 남았다. ㅡ_ㅡ;;; 추가한 문장을 모두 덜어냈다는 얘기. 혹은 ㄱ문장+추가한 서너 문장+ㄴ문장을 버무려서 두어 문장을 전면 수정하거나. 크크크.
아울러 초고에 추가하며 멋들어진 문장을 몇 개 썼는데 그 중 상당수를 지웠다. 내용과 안 맞거나 했던 얘기 또 하는 느낌이거나 굳이 없어도 무방하거나. 솔직히 아쉬워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지만(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퇴고하며 살린 것도 있지만) 이런 욕심이 가독성을 떨어뜨리거나 난잡한 느낌을 줄까봐 염려되어 뺐다. 지금 내 수준에 문장 멋 낼 상황은 아니잖아. 내용 전달이라도 제대로 하면 다행이지.
지금 글이 출판될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서 내용과 관련해서 밝힐 수 있는 게 없네… 출판되길 바라고 있지만 어떻게 될까나…
글의 완성도는 아직 모르겠지만 한 가지 자부하는 것은 있다. 이 글이 출판된다면 아마도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인식론으로 작품 분석을 시도한 첫 번째 글이지 싶다. 작품 속 트랜스젠더 인물을 분석한 논문은 더러 있지만 트랜스젠더 인식론으로 작품을 분석한 글은 못 읽은 듯하다. 물론 나의 공부가 짧아 모든 논문을 다 검토한 것은 아니니 이렇게 단언할 순 없지만(혹시나 있으면 제보 부탁해요!).
아무려나 글을 쓰는 과정은 언제나 즐겁다. 자학하는 과정,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과정조차도 즐거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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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가을부터 겨울, 알라딘-자음과모음 인문웹진에 다른 분들과 함께 글을 연재했지요. 기억하시나요? 전 화학적 거세를 괴물과 엮어서 썼고요. 그 글이 드디어 책으로 나올 듯합니다. <성의 정치, 성의 권리>란 제목이고요. 그 사이 내용을 좀 수정해서 웹진 연재 판본과 단행본 판본은 좀 달라요. 전면 뜯어고친 부분도 있고요. 흐흐흐. 한 동안 출판사에서 방치했는데 ;ㅅ; 출판사 교정 작업에 들어갔고 저자소개도 넘겼으니 오는 가을엔 정말 나오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책이 나와봐야 바뀌는 것은 저자의 이력서 한 줄 뿐. 출판과 관련한 일을 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기분이 복잡해요. 출판한다는 것은 어떤 실천일까요? 정말 출판 작업은 운동일까요? 어떤 출판이 운동일까요? 정의와 관련한 책을 내고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또 고민을 좀 바꾼다고 해서 꼭 운동은 아니니까요.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준 이웃 D에게 고마움을 전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