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 절대강좌, 래퍼 루인에서 발라디어 루인으로 변신

상반기 주요 일정이 거의 끝났다. 이룸 절대강좌가 월요일에 끝났고 목요일에 최종 원고만 투고하면 된다. 그러고 나면… 서평을 하나 써야 하지만 그래도 일단 한숨 돌린다.
이룸 절대강좌는 상당히 긴장한 강의였다. 2월 말 KSCRC 강의 이후 첫 강의기도 하고 내가 잘 모르는 이슈기도 했다. 무려 “퀴어+성매매”에서 트랜스여성의 성매매를 다뤘으니까.
강의를 시작하며 가벼운 얘기로, 제가 성매매도 잘 모르고, 이곳엔 성매매 이슈 전문가가 무척 많으시고요… 제가 퀴어도 잘 모르고, 이곳엔 퀴어 이슈를 잘 아는 분이 여럿 계시고요… 제가 트랜스젠더도 잘 모르고.. 그런데 트랜스젠더 이슈는 한국에 전문가가 거의 없어서 여기도 없는 듯하네요.. ㅠㅠ ..라고 말했는데, 정말 이런 심정이었다. 난 성매매 이슈를 강의할 만큼 공부하지도 않았고 퀴어 이슈도 잘 모르고 트랜스젠더 이슈도 잘 모른다. 그럼 왜 강의를 한다고 했느냐면… 뭐, 인생 그런 거지. 그저 트랜스젠더 성매매 이슈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하고 싶은 얘기라고 해서 별 것 아니다. 한국 성매매 이슈에서 트랜스젠더는 전혀 논의가 안 된다는 점,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성적 노동을 하는 존재로 소비되고 유통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이런 말 할을 두 시간에 걸쳐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하다. 사실 구체적으로 무슨 얘길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기억이 안 나… 그저 별 무리는 없었던 듯하여 다행이다 싶다. 아무려나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성매매 이슈는 무척 중요함에도 거의 논의가 안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자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어떤 식으로건 시작을 했다는 점만으로 좋은 일이다. 그것을 내가 했다는 게 에러지만. 앞으로 다른 더 많은 트랜스젠더 연구자가 나올 테니까.. 뭐… ;ㅅ;
그나저나 어제 강의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래퍼 루인에서 발라디어 루인으로 변신했다는 것! 후후후
평소 뿐만 아니라 긴장하면 말이 빨라지고 시간이 촉박하다 싶으면 말이 무척 빨라져서 누군가가 “루인이 랩한다”고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지난 오송에서 발표할 때 (순전히 동시통역하시는 분들의 요구에 따라)말을 천천히 했다. 이를 계기로 발표를 하거나 강의를 할 때면 말을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늘 천천히 하는 건 아니고, 시간이 촉박한데 할 얘기가 많으면 조급함에 말이 빨라지면서 랩을 하지만..;;; 암튼 래퍼에서 발라디어로 변신의 가능성이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발라디어로 변신에 성공하면 만담꾼으로 변해야 할텐데… 일전에 수잔 스트라이커의 강좌 동영상을 본 적 있다. 영어를 못 하니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저 강의하는 모습이 궁금해서 찾았을 뿐이다. 근데 놀라웠던 건 사람들이 시종일관 웃는데 있다. 무슨 개그를 하는 건지, 어떤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할 얘기를 다 하다니.. 이런 모습이 부러웠다. 개그는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타고다는 것이라던데.. 흠…

메모: 김지혜,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이미 몇 번 읽었고, 제가 쓴 글에서 여러 번 인용했지만, 며칠 전 수업 자료라 다시 읽었습니다. 내용이 압축적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쟁점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성찰과 아이디어로 가득한 글이고요. 읽으며 이번에 유난히 좋은 구절을 따로 메모했습니다. 이번에 유난히 좋았다는 건, 다른 날 읽으면 또 다른 구절이 더 좋기도 하단 뜻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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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페미니즘> 제19권 2호(2011)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김지혜
배타적 영역 설정은 성별 이론들 사이의 논쟁에 등장하는 공간적 사유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보니 짐머만(Bonnie Zimmerman)은 “‘영토’나 ‘경계’와 같은 공간적 비유들이 페미니즘과 레즈비어니즘이라 불리는 단일한 공간“이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고 지적한다(166). 각각의 성별 정치학들을 고정된 공간의 점유로 이해할 때, 유동적 관계성은 조망될 수 없다. 젠더 이론들의 영역을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각각의 영역을 단일하고 동질적인 범주로 전체화함으로써 내부적인 이질성과 다양성을 삭제하게 된다.(55)
가령, 재니스 레이몬드(Janice Raymond)와 쉴리아 제프리스(Sheila Jeffreys)는 트랜스젠더리즘을 페미니즘의 존립과 정치적 목적을 훼손하는 반(反)페미니즘으로 단언한다. 그러나 에미 코야마(Emi Koyama)가 분명히 말하듯이, 트랜스젠더의 실존이 위협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젠더를 본질화하고 양극화하며 이분화하는 세계”이다(“Whose Feminism”  704). 트랜스젠더 주체성은 “여성 억압과 경험의 보편성”을 가정하며 “권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위협적인 것이다(ibid).(56)
헤스포드의 발상은 공리처럼 굳어진 역사적 해석이 어떤 특정 집단의 편집된 기억일 수 있으며 그들의 서사 속에서 다른 집단/시각의 역사가 은폐되고 침묵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60)
할버스탬의 퀴어적 세대론은 비평적 젠더 이론들 사이의 오래된 적대적, 배제적 관계를 지양할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을 제공한다. 젠더 변이(gender variance)나 출생 시 부과된 젠더와의 불화(gender dysphoria)는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페미니스트들은 젠더퀴어 주체나 트랜스젠더들을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내면화된 트랜스 혐오를 세대 격차로 은폐하곤 한다. 그러나 재생산적 시간성을 해체한다면 새로운 세대로부터의 배움과 성찰도 가능하며, “과거에 대한 대안적인 독해로부터 대안적인 미래”가 그려질 수 있다(104).(64)
주디스 로버(Judith Lorber)는 탈젠더(degendering)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젠더의 이원적 범주가 바로 여성의 불평등을 양산하는 구조라고 말한다(82).(66)
젠더 정치학의 연대는 권력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민감한 의식과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70)
동일성에 기반한 정체성의 정치학으로부터 탈피해서 동일시의 정치학으로 연대한다면, 비평적 젠더 이론들은 더 많은 지점에서 교차하면서 자신들의 프레임과 세계를 탄력적으로 풍요롭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71)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토크 인 씨어터 후기

지난 일요일(2013.05.26.),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토크 인 씨어터2: 퀴어 레인보우’ 세션으로 발제를 하였습니다. 저녁 8시부터 두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를 보고 행사를 진행했고요.
다큐멘터리는 <걸 혹은 보이, 나의 섹스는 나의 젠더가 아니야>와 <2의 증명>이었습니다. <걸 혹은 보이>는 프랑스 감독의 다큐멘터리로 네 개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ftm/트랜스남성의 경험을 교차로 보여주는 다큐입니다. 꽤나 경쾌하고 다양한 경험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2의 증명>은 홍유정 씨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한국 상황에서 국가의 젠더 관리, 의료기술, 계급, 트랜스젠더 등이 교차하는 찰나를 잘 포착하고 있고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다큐를 함께 보고 얘기를 나누는 자리라 발제 준비가 애매하긴 했습니다. 물론 기획자께서 방향을 잘 잡아줘서 그 방향대로 준비하긴 했지만요.
행사 자체는 재밌었습니다. <2의 증명>의 두 감독님 스이, 케이 님이 촬영하며 든 고민을 짧게나마 들을 수 있었고, 최근 ftm 관련 법원 판결(외부성기재구성수술 없이 호적 상 성별정정 허가)에 대한 한가람 변호사의 얘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스이 감독님의 발언 중, 다큐를 찍었지만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토론자로 미리앙 포제르 Myriam FOUGÈRE(<레즈비어니즘: 급진적 페미니스트true 감독), 자레이 싱애코윈타 Jaray SINGHAKOWINTA (태국 국립개발행정연구원 교수)가 나왔는데요. 싱애코윈타는 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는 안 되고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꿀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논평했습니다. 아울러 태국은 트랜스젠더에게 호의적이지만 호적 상 성별을 바꿀 수 없고, 한국은 호의적이진 않은데 바꿀 수 있는 상황으로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포제르는 이원젠더가 여성에 대한 차별이란 점을 지적하며 영화제와 영화 내용을 연결하는 발언을 했고, <2의 증명>이 참 고통스럽다며 미국은 1970년대 의식고양을 통해 의식이 바뀌었는데 한국은…이라는 얘기도 했고요. -_-;; 관객 질문 역시 좋았는데, 한 분은 트랜스젠더 이슈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바랐고, 김은실 선생님은 두 영화에서 드러나는 네트워크 유무의 차이, <2의 증명>에 나타난 계급 이슈 등을 지적해줘서 좋았습니다.
(좋은 행사를 기획한 기획자 및 진행자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제가 두 영화를 어떻게 읽었는지는 일차로 발제문에 있으니 참조하시고요(writing 메뉴에 있습니다).
덧붙여 <2의 증명>이 드러내는 부정적 감정과 계급 이슈를 좀 더 조밀하게 읽고 싶습니다. <2의 증명>은 단 한 번의 유머도 없이 소위 ‘부정적 감정’으로 불리는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것이 어떤 불안안 정서를 야기하면서 감정에 관한 흥미로운 퀴어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계급 이슈는, <2의 증명>을 보신다면 알 겁니다. 보는 내내 “이건 계급이슈야”라고 몇 번을 반복해서 얘기했으니까요. 그냥 보기엔 <걸 혹은 보이>가 더 매력적일지 몰라도 전 <2의 증명>이 더 좋았습니다. 할 얘기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프고도 또 퀴어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