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의 증명, 직접 말하기보다 삶으로 말하기: 이원 젠더, 여성의 몸

수업 시간에 <걸 혹은 보이, 나의 섹스는 나의 젠더가 아니야>와 <2의 증명>을 보고 토론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걸 혹은 보이>는 이원 젠더 및 여성의 몸을 직접 논하는데 <2의 증명>은 그렇지 않아 아쉽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해석에 다양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한데, 저는 <2의 증명>에서 충분히 많이 얘기하고 있다고 해석했고, 그 관점에서 쓴 토론글입니다. 즉 영화가 이원 젠더를 문제 삼으려는 기획으로 구성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관련 이슈를 직접 얘기하지 않아도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논의입니다.
2013/06/04 11:09
몸의 이원화, 여성의 몸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묘하게도 저는 <걸 혹은 보이, 나의 섹스는 나의 젠더가 아니야>보다 <2의 증명>이 더 ‘퀴어’하고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
저는 <2의 증명>이 몸을 둘러싼 논쟁에서 매우 ‘급진적’으로 혹은 제도에 ‘전복적’으로 ‘도전’하고 있다고 독해했어요. 정확하게는 이원/젠더화된 몸을 다시 사유하도록 하는 영화라고 해석했고요. 물론 영화 내용 어디에도 여성의 몸, 몸의 이원화를 언급하진 않습니다(트랜스젠더 영화가 이원 젠더를 반드시 언급하거나 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저 유정 씨가 호적 상 성별 변경을 신청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죠. 하지만 영화의 다양한 찰나에서 유정 씨와 주변 사람은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흔든다고 판단했어요.
우선, 가장 명확하게는 병원24 PD가 했던 얘기입니다. 말투는 남자고 옷은 여자고 골격은 남자고.. 라고 말하는 지점에서 PD는 유정 씨를 여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뉘앙스로 말합니다. 이런 반응은 정확하게 여성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어떤 몸이 여성의 몸이어야 하는가, 여성이기 위해선 어떤 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이 수업을 듣는 분이라면 아마도 PD의 언설에 어떤 불편이나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셨을 테고 바로 그 찰나에서 여성의 몸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지 않을까 합니다.
몸을 둘러싼 논쟁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초점을 맞춘 지점은 유정 씨의 욕망 혹은 바람이었습니다. 유정 씨는 호르몬 투여는 해도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은 하지 않은 상황에서 호적 상 성별 변경을 요청합니다. mtf/트랜스여성을 기준으로 현재까지의 판례에선 성별 변경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인우보증서를 가급적 많이 모아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하죠.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누가 여성인가라는 질문, 어떤 몸이 여성의 몸이어야 하는가라는 논쟁이 발생한다고 독해했습니다. 아마도 유정 씨는 자신이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생물학적 몸이라고 불리는 어떤 형태는 중요한 근거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호적 상 성별을 바꾸고 안정적 직장을 구하면 수술비를 모을 것이며 그러고 나면 반드시 수술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mtf/트랜스여성의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이 “이쁜이수술”과 같다는 것처럼요. 그리하여 유정 씨의 요구는 기존의 섹스-젠더 이원 규범을 슬쩍 무시하고 혹은 그런 규범을 “자신의 불행한/불쌍한 삶”으로 무화시키고 돌파하려는 것은 아닐까 했습니다. 물론 유정 씨가 기존의 이원 젠더 규범을 모를리 없지요. 아니까 인우보증서를 가급적 많이 받으려 했겠지요. 그럼에도 유정 씨의 행동은, 유정 씨의 행동이 말이 된다고 여기건 안 된다고 여기건, 유정 씨의 행동을 지지하건 그렇지 않건 여성의 몸을 다시 사유하도록 하는 찰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판사가, 유정 씨에겐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입증할 서류가 없어 성별 변경을 거부했을 때 아마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느낀 듯합니다(극장에서 봤을 때 제가 들을 수 있는 관객의 반응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안타까움에, 단순히 다큐멘터리 주인공 유정 씨를 향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몸을 다시 사유하도록 하는 비평적 해석이 동반하고 있거나 동반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건 여성의 몸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판사가 성별 변경을 허가했다면 음경이 여성/남성을 판단하는 근거가 아니라고 판결하는 거죠. 불허했다면, 실제 불허했는데, 여성의 몸이 어떤 외형이어야 하고 남성의 몸이 어떤 외형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환기시켜주고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 여성과 남성의 몸이 어떤 외적 형상을 지녀야 하는가는 어떤 계급적 토대, 경제적 토대를 갖추어져야 하는가란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어떤 계급(혹은 제정적 여유를 갖춘 상황)만이 법적 보장을 받는 젠더가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선 상당한 돈이 있어야 하고 안정된 수입을 벌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선 규범적 젠더에 맞춘 외모여야 하죠. 트랜스젠더 업소에서 일한다고 해서 외모가 자원이 아닌 건 아닙니다. 트랜스젠더 업소에서도 외모는 중요한 자원이며, 외모에 따라 호르몬 투여 정도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니까요. 그래서 유정 씨는, 수술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은 성판매를 하건 뭘 하건 외모를 바꾸라는 사회적 명령이라고 지적합니다.
전 어쩌면, <2의 증명>에서 유정 씨의 삶의 다면적 측면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점은 많이 아쉽다고 해도, 이원 젠더나 여성의 몸을 둘러싼 논쟁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점은 확실히 좋았습니다. 직접 언급했다면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지점이 협소해질 수 있으니까요.
암튼 전 그랬어요..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접할 수 있는 건 확실히 즐거워요. 헤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토크 인 씨어터 후기

지난 일요일(2013.05.26.),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토크 인 씨어터2: 퀴어 레인보우’ 세션으로 발제를 하였습니다. 저녁 8시부터 두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를 보고 행사를 진행했고요.
다큐멘터리는 <걸 혹은 보이, 나의 섹스는 나의 젠더가 아니야>와 <2의 증명>이었습니다. <걸 혹은 보이>는 프랑스 감독의 다큐멘터리로 네 개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ftm/트랜스남성의 경험을 교차로 보여주는 다큐입니다. 꽤나 경쾌하고 다양한 경험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2의 증명>은 홍유정 씨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한국 상황에서 국가의 젠더 관리, 의료기술, 계급, 트랜스젠더 등이 교차하는 찰나를 잘 포착하고 있고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다큐를 함께 보고 얘기를 나누는 자리라 발제 준비가 애매하긴 했습니다. 물론 기획자께서 방향을 잘 잡아줘서 그 방향대로 준비하긴 했지만요.
행사 자체는 재밌었습니다. <2의 증명>의 두 감독님 스이, 케이 님이 촬영하며 든 고민을 짧게나마 들을 수 있었고, 최근 ftm 관련 법원 판결(외부성기재구성수술 없이 호적 상 성별정정 허가)에 대한 한가람 변호사의 얘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스이 감독님의 발언 중, 다큐를 찍었지만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토론자로 미리앙 포제르 Myriam FOUGÈRE(<레즈비어니즘: 급진적 페미니스트true 감독), 자레이 싱애코윈타 Jaray SINGHAKOWINTA (태국 국립개발행정연구원 교수)가 나왔는데요. 싱애코윈타는 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는 안 되고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꿀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논평했습니다. 아울러 태국은 트랜스젠더에게 호의적이지만 호적 상 성별을 바꿀 수 없고, 한국은 호의적이진 않은데 바꿀 수 있는 상황으로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포제르는 이원젠더가 여성에 대한 차별이란 점을 지적하며 영화제와 영화 내용을 연결하는 발언을 했고, <2의 증명>이 참 고통스럽다며 미국은 1970년대 의식고양을 통해 의식이 바뀌었는데 한국은…이라는 얘기도 했고요. -_-;; 관객 질문 역시 좋았는데, 한 분은 트랜스젠더 이슈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바랐고, 김은실 선생님은 두 영화에서 드러나는 네트워크 유무의 차이, <2의 증명>에 나타난 계급 이슈 등을 지적해줘서 좋았습니다.
(좋은 행사를 기획한 기획자 및 진행자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제가 두 영화를 어떻게 읽었는지는 일차로 발제문에 있으니 참조하시고요(writing 메뉴에 있습니다).
덧붙여 <2의 증명>이 드러내는 부정적 감정과 계급 이슈를 좀 더 조밀하게 읽고 싶습니다. <2의 증명>은 단 한 번의 유머도 없이 소위 ‘부정적 감정’으로 불리는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것이 어떤 불안안 정서를 야기하면서 감정에 관한 흥미로운 퀴어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계급 이슈는, <2의 증명>을 보신다면 알 겁니다. 보는 내내 “이건 계급이슈야”라고 몇 번을 반복해서 얘기했으니까요. 그냥 보기엔 <걸 혹은 보이>가 더 매력적일지 몰라도 전 <2의 증명>이 더 좋았습니다. 할 얘기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프고도 또 퀴어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