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하게, 평범하게

영화 <2의 증명> 관련 발제문을 쓰면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강조하고 싶은 구절 중 하나는 다음이었다.
홍유정 씨는 혹은 나를 비롯한 트랜스젠더는 애써 저항하려는 것도 아니고 위반하려는 것도 아니다. 딱히 규범에 더 열심히 순응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살려고 애쓸 뿐이다. 그런데 그냥 사는 것이 어렵다(홍유정 씨가 특별히 운이 나쁜 게 아니다). 그냥 사는 것이 반드시 규범적으로 사는 건 아니다. 반드시 규범에 부합하지 않으며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홍유정 씨는(혹은 일부 트랜스젠더는) 평범하게/규범적으로 살고 싶어도 규범적으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규범을 위반한다. 홍유정 씨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기 위해 신분증을 회복했지만 이것은 삶을 더 어렵게 했다. 여성으로 살고자 했지만 사회는 이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주변 사람들은 홍유정 씨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악용한다. 그냥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욕망일 뿐만 아니라 규범적으로 살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삶을 참으로 고단하게 만든다. <2의 증명>은 바로 이 찰나를 그려낸다.
퀴어 실천에 있어 내가 가장 주목하는 지점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분명한 저항이나 전복 행위가 아니다. 이를 테면 수염에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걷는 것과 같은 일, 어디서 공공연하게 나는 변태라고 말하는 일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난 어떤 행동이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지 위반하는지 모호한 상태, 혹은 순응하고 있는데 그 순응이 기존 질서를 자꾸만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행동에 더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위반으로 분석해도, 순응으로 분석해도 논쟁적일 주제를 얘기하는 게 더 좋다. 그것이 기존 규범을 더 날것으로 탐문할 수 있도록 하고, 규범의 다른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혹은 어쩌면 내 삶이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애매함이 내 삶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많은 곳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통하고 이것은 내게 많은 긴장을 야기한다. 나의 긴장과 무관하게 나란 존재는 기존 질서에 쉽게 편입되고 또 빗겨난다. 바로 이 찰나가 내 촉이 가장 민감한 지점이다. 물론 이렇게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이지만 피곤하지 않은 삶이 어딨으랴… 그냥 다들 이렇게 사는 걸..

메모: 김지혜,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이미 몇 번 읽었고, 제가 쓴 글에서 여러 번 인용했지만, 며칠 전 수업 자료라 다시 읽었습니다. 내용이 압축적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쟁점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성찰과 아이디어로 가득한 글이고요. 읽으며 이번에 유난히 좋은 구절을 따로 메모했습니다. 이번에 유난히 좋았다는 건, 다른 날 읽으면 또 다른 구절이 더 좋기도 하단 뜻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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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페미니즘> 제19권 2호(2011)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김지혜
배타적 영역 설정은 성별 이론들 사이의 논쟁에 등장하는 공간적 사유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보니 짐머만(Bonnie Zimmerman)은 “‘영토’나 ‘경계’와 같은 공간적 비유들이 페미니즘과 레즈비어니즘이라 불리는 단일한 공간“이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고 지적한다(166). 각각의 성별 정치학들을 고정된 공간의 점유로 이해할 때, 유동적 관계성은 조망될 수 없다. 젠더 이론들의 영역을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각각의 영역을 단일하고 동질적인 범주로 전체화함으로써 내부적인 이질성과 다양성을 삭제하게 된다.(55)
가령, 재니스 레이몬드(Janice Raymond)와 쉴리아 제프리스(Sheila Jeffreys)는 트랜스젠더리즘을 페미니즘의 존립과 정치적 목적을 훼손하는 반(反)페미니즘으로 단언한다. 그러나 에미 코야마(Emi Koyama)가 분명히 말하듯이, 트랜스젠더의 실존이 위협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젠더를 본질화하고 양극화하며 이분화하는 세계”이다(“Whose Feminism”  704). 트랜스젠더 주체성은 “여성 억압과 경험의 보편성”을 가정하며 “권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위협적인 것이다(ibid).(56)
헤스포드의 발상은 공리처럼 굳어진 역사적 해석이 어떤 특정 집단의 편집된 기억일 수 있으며 그들의 서사 속에서 다른 집단/시각의 역사가 은폐되고 침묵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60)
할버스탬의 퀴어적 세대론은 비평적 젠더 이론들 사이의 오래된 적대적, 배제적 관계를 지양할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을 제공한다. 젠더 변이(gender variance)나 출생 시 부과된 젠더와의 불화(gender dysphoria)는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페미니스트들은 젠더퀴어 주체나 트랜스젠더들을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내면화된 트랜스 혐오를 세대 격차로 은폐하곤 한다. 그러나 재생산적 시간성을 해체한다면 새로운 세대로부터의 배움과 성찰도 가능하며, “과거에 대한 대안적인 독해로부터 대안적인 미래”가 그려질 수 있다(104).(64)
주디스 로버(Judith Lorber)는 탈젠더(degendering)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젠더의 이원적 범주가 바로 여성의 불평등을 양산하는 구조라고 말한다(82).(66)
젠더 정치학의 연대는 권력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민감한 의식과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70)
동일성에 기반한 정체성의 정치학으로부터 탈피해서 동일시의 정치학으로 연대한다면, 비평적 젠더 이론들은 더 많은 지점에서 교차하면서 자신들의 프레임과 세계를 탄력적으로 풍요롭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71)

2의 증명, 직접 말하기보다 삶으로 말하기: 이원 젠더, 여성의 몸

수업 시간에 <걸 혹은 보이, 나의 섹스는 나의 젠더가 아니야>와 <2의 증명>을 보고 토론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걸 혹은 보이>는 이원 젠더 및 여성의 몸을 직접 논하는데 <2의 증명>은 그렇지 않아 아쉽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해석에 다양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한데, 저는 <2의 증명>에서 충분히 많이 얘기하고 있다고 해석했고, 그 관점에서 쓴 토론글입니다. 즉 영화가 이원 젠더를 문제 삼으려는 기획으로 구성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관련 이슈를 직접 얘기하지 않아도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논의입니다.
2013/06/04 11:09
몸의 이원화, 여성의 몸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묘하게도 저는 <걸 혹은 보이, 나의 섹스는 나의 젠더가 아니야>보다 <2의 증명>이 더 ‘퀴어’하고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
저는 <2의 증명>이 몸을 둘러싼 논쟁에서 매우 ‘급진적’으로 혹은 제도에 ‘전복적’으로 ‘도전’하고 있다고 독해했어요. 정확하게는 이원/젠더화된 몸을 다시 사유하도록 하는 영화라고 해석했고요. 물론 영화 내용 어디에도 여성의 몸, 몸의 이원화를 언급하진 않습니다(트랜스젠더 영화가 이원 젠더를 반드시 언급하거나 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저 유정 씨가 호적 상 성별 변경을 신청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죠. 하지만 영화의 다양한 찰나에서 유정 씨와 주변 사람은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흔든다고 판단했어요.
우선, 가장 명확하게는 병원24 PD가 했던 얘기입니다. 말투는 남자고 옷은 여자고 골격은 남자고.. 라고 말하는 지점에서 PD는 유정 씨를 여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뉘앙스로 말합니다. 이런 반응은 정확하게 여성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어떤 몸이 여성의 몸이어야 하는가, 여성이기 위해선 어떤 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이 수업을 듣는 분이라면 아마도 PD의 언설에 어떤 불편이나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셨을 테고 바로 그 찰나에서 여성의 몸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지 않을까 합니다.
몸을 둘러싼 논쟁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초점을 맞춘 지점은 유정 씨의 욕망 혹은 바람이었습니다. 유정 씨는 호르몬 투여는 해도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은 하지 않은 상황에서 호적 상 성별 변경을 요청합니다. mtf/트랜스여성을 기준으로 현재까지의 판례에선 성별 변경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인우보증서를 가급적 많이 모아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하죠.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누가 여성인가라는 질문, 어떤 몸이 여성의 몸이어야 하는가라는 논쟁이 발생한다고 독해했습니다. 아마도 유정 씨는 자신이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생물학적 몸이라고 불리는 어떤 형태는 중요한 근거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호적 상 성별을 바꾸고 안정적 직장을 구하면 수술비를 모을 것이며 그러고 나면 반드시 수술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mtf/트랜스여성의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이 “이쁜이수술”과 같다는 것처럼요. 그리하여 유정 씨의 요구는 기존의 섹스-젠더 이원 규범을 슬쩍 무시하고 혹은 그런 규범을 “자신의 불행한/불쌍한 삶”으로 무화시키고 돌파하려는 것은 아닐까 했습니다. 물론 유정 씨가 기존의 이원 젠더 규범을 모를리 없지요. 아니까 인우보증서를 가급적 많이 받으려 했겠지요. 그럼에도 유정 씨의 행동은, 유정 씨의 행동이 말이 된다고 여기건 안 된다고 여기건, 유정 씨의 행동을 지지하건 그렇지 않건 여성의 몸을 다시 사유하도록 하는 찰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판사가, 유정 씨에겐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입증할 서류가 없어 성별 변경을 거부했을 때 아마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느낀 듯합니다(극장에서 봤을 때 제가 들을 수 있는 관객의 반응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안타까움에, 단순히 다큐멘터리 주인공 유정 씨를 향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몸을 다시 사유하도록 하는 비평적 해석이 동반하고 있거나 동반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건 여성의 몸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판사가 성별 변경을 허가했다면 음경이 여성/남성을 판단하는 근거가 아니라고 판결하는 거죠. 불허했다면, 실제 불허했는데, 여성의 몸이 어떤 외형이어야 하고 남성의 몸이 어떤 외형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환기시켜주고요.
그리고 바로 이 지점, 여성과 남성의 몸이 어떤 외적 형상을 지녀야 하는가는 어떤 계급적 토대, 경제적 토대를 갖추어져야 하는가란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어떤 계급(혹은 제정적 여유를 갖춘 상황)만이 법적 보장을 받는 젠더가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선 상당한 돈이 있어야 하고 안정된 수입을 벌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선 규범적 젠더에 맞춘 외모여야 하죠. 트랜스젠더 업소에서 일한다고 해서 외모가 자원이 아닌 건 아닙니다. 트랜스젠더 업소에서도 외모는 중요한 자원이며, 외모에 따라 호르몬 투여 정도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니까요. 그래서 유정 씨는, 수술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은 성판매를 하건 뭘 하건 외모를 바꾸라는 사회적 명령이라고 지적합니다.
전 어쩌면, <2의 증명>에서 유정 씨의 삶의 다면적 측면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점은 많이 아쉽다고 해도, 이원 젠더나 여성의 몸을 둘러싼 논쟁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점은 확실히 좋았습니다. 직접 언급했다면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지점이 협소해질 수 있으니까요.
암튼 전 그랬어요..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접할 수 있는 건 확실히 즐거워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