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러웨이, [한 장의 잎사귀처럼]

다나 J. 해러웨이 & 사이어자 N. 구디브 [한 장의 잎사귀처럼] 민경숙 옮김, 서울: 갈무리, 2005 [Donna J. Haraway, How Like a Leaf: An Interview with Thyrza Nichols Goodeve, New York & London: Routledge, 2000]

해러웨이 글은 읽기 수월한 편은 아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미국 학자들 중 읽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 몇 명 있긴 하다. 버틀러가 그렇고 해러웨이가 그렇다. 하지만 버틀러는 인식론이 낯설어서 어렵다고 느낄 수는 있어도 문장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 반면 해러웨이는, 아직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루인에겐, 좀 많이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해러웨이를 읽다보면 문장의 어려움 보다는, 용어의 낯설음으로 인해 어렵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학문 간의 구분이 분명하고, 고등학생 시절 문과를 나오면 과학이나 수학을 모르는 게 당연한 것 같고, 이과를 나오면 문학을 모른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맥락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해러웨이가 어렵다면, 생물학을 비롯한 다양한 과학 분야의 언어들을 같이 사용하기 때문일 것 같다는 고민을 잠깐 했다. 사람들과 어떤 얘기를 나눌 때면 가끔씩 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나 상상력으로 설명할 때가 있는데(일테면 미적분이나 위상수학 등등), 이럴 때면 내용 자체는 무척 쉬운데 수학용어를 사용해서 사람들이 당황하고, 그래서 어렵다고 반응하는 걸 몇 번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이 낯설어서 어느 순간부터 수학을 매개로 하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실 해러웨이를 읽다보면 *의외로* 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어렵다. 근데 이 책이 어려운 건, 내용의 어려움보다는 번역으로 인한 것 같다. 이 책은 해러웨이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될 수도 있을 책인데, 번역서를 읽고 있으면 영어본을 찾아서 대조하면서 읽고 싶은 충동이 든달까. -_-;;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예전에 해러웨이의 다른 책,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번역한 사람인데, 수업발제로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실린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으며, 처음엔 번역문을 읽다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번역본을 포기하고 눈물을 머금으며 영문을 꺼냈던 적이 있다. 근데 영문을 읽으니 무슨 소린지 알겠더라는 슬픈 전설이… ;; 그래도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비해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어느 정도는 읽힌다. 하지만 마냥 번역자를 탓하기가 어려운 건, 해러웨이 자신의 문장이 번역하기 쉬운 문장이 아닌 이유도 있고, 번역 자체가 쉬운 일도 아니니까.
수업발제를 위해 번역을 몇 번 하면서, 번역자를 탓하거나 번역이 별로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번역에 문제제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루인의 번역문이 떠올라서-_-;;; 흐흐흐.

루인에겐 해러웨이가 각별한데, 비단 루인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 트랜스 연구에서도 해러웨이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트랜스 연구의 중요한 출발점이랄 수 있는 샌디 스톤(Sandy Stone)의 논문 “제국의 역습”이이 해러웨이의 글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스톤은 해러웨이의 제자이기도 하다), 해러웨이의 “괴물”이 트랜스에서 해석하는 괴물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겹치기도 한다. 처음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었을 때, “이건 거의 트랜스연구이기도 하잖아”라고 맥락 없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트랜스와 관련해서 루인이 처음으로 쓴 논문 역시 “사이보그 선언문”에 상당히 빚지고 있고.

하이데거가 구영어인 thencan, 즉 “to think”와 thancian, 즉 “to thank”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사유”와 “감사”가 공유하고 있는 어원이 가장 깊은 의미의 사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전개시킨 곳이 바로 이 부분이지요.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사유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사유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언제나 그가 읽었거나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들과 다른 것을 발전시키고 있는 거니까요.
그러므로 최고의 감사는 사유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심오한 배은망덕은 사유하지 않음이 아닐까?
– 54~55:구디브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감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도 없는 거지요. 질병은 관계입니다.
– 131: 해러웨이

그리고 나서 카피(the copy)와 실물(the original)의 문제라는 견지에서 코드화되지요. 어떤 것을 본다는 과정은 언제나 보는 것을 잘못 본다는 문제를 수반해요. 그것은 똑같은 것인가? 혹은 다른 곳에 옮겨진 똑같은 것인가? 그 카피는 정말로 실물의 카피인가?
-170~171: 해러웨이

[회절을 설명하며] 빛이 작은 틈새를 통과하면, 통과한 광선들은 분산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히 알기 위해 한 끝에 스크린을 놓으면, 그 스크린 위에 광선이 지나가는 길의 기록을 얻게 되지요. 이 “기록”은 틈새를 통과하는 그 광선들의 길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반사를 얻는 게 아니라 길의 기록을 얻는 거지요.
(…)
저는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핀을 그 컨텍스트로부터 옮긴 게 아녜요. 그 안전핀에 훨씬 더 많은 의미와 컨텍스트들이 있으며, 일단 당신이 그것들에 주목하면 그냥 누락시킬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말하자면, 단지 회절 시킨 거지요. 당신은 그 “간섭”을 등록해야 해요. 이것이 나의 작업방식이며, 내가 즐기는 방식이라고 느낍니다. 그것은 하나의 물건 속에서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단순한 일이지요. 다른 의미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게 아니라, 결론이 단 하나의 진술이 되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겁니다.
-172, 174: 해러웨이

먼저 그런 비판을 하지 않으면 바보처럼 보일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저는 정말로 고약한 인종정치가 이와 똑같은 원칙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자신들이 인종차별주의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먼저 고의적으로 인종주의자라고 부르는 거지요. 그것은 마치 인종차별주의가 몇 가지 진술로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다양한 진언(眞言)으로는 인종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어요. 혹은 이 논문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종을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한 후 다시 앉아서 그런 주의를 해주었으니까 이제 나는 자유다 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인종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지요. 달리 말하자면, 나는 거기에 있지 않으니까 나는 자유다 라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84~185: 해러웨이

목격은 보는 것이고; 증언하는 것이며;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것과 묘사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묘사한 것에 심적으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245~246: 해러웨이

[논문] Susan Stryker “My Words To Victor Frankenstein …”

Susan Stryker “My Words To Victor Frankenstein Above The Village Of Chamounix: Performing Transgender Rage” GLQ, vol.1 (1994)

메리 셸리를 읽고 나서, 스트라이커의 논문 제목을 읽으려 했을 때, 이전엔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제목의 의미를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샤뮤니(Chamounix)는 괴물과 빅터가 만나, 빅터를 떠난 괴물이 그 후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빅터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곳이다. 그러니 제목 “샤무니 마을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하는 나의 말들”은, 괴물이 빅터에게 하는 말이자, 스트라이커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스트라이커는 괴물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 논문은 바로 이런 감정에서 출발한다.

이 논문이, 처음으로 읽은 스트라이커의 논문은 아니다. 그간 몇 편의 논문들을 읽었지만, 그 중 몇 편은 읽기 쉬운 편은 아니었다. 짧은 몇 편의 글은 읽기 쉬웠지만, 어떤 글들은 수월한 영어는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 논문 “My Words”는 정말이지 읽는 내내 감동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이다. 여러 많은 문장들이 감동의 도가니지만, 단 한 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비록 그 한 마디가 이 글을 요약하진 않지만.

할 수 있는 한 무례하게 나는 말한다: 나는 트랜스섹슈얼이다, 고로 나는 괴물이다.(240)

아무려나, 트랜스 관련 글을 읽고자 한다면,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이 글을 꼭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프랑켄슈타인] 혹은 괴물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오숙은 옮김, 서울: 미래사, 2002
Mary Shelley, Frankenstein, London: Penguin Books, 2003/1818/1831

[프랑켄슈타인]을 읽어야지 했던 건 꽤나 오래 전이라고 기억한다. 하지만 언제나 “나중에”란 말로 미루기 일쑤였다. 그러다 5월 어느 날, 수잔 스트라이커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을 먼저 읽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책을 사고 한 달이 흘러서야 읽을 시간이 생겼고, 오랜 만에 읽는 소설책이었다.

사실, 루인에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주는 이미지는 기껏해야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이었다. 그러니 소설책으로 읽은 [프랑켄슈타인]은 낯선 내용이었다. 물론 다른 책을 통해,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이며, 괴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소설을 읽으며, 내내 괴물에 감정이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괴물의 고백과 감정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경험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니 (…)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기쁨에서 몰아내었소. (…) 그들은 날 멸시하고 미워하오. 인적 없는 산과 황량한 빙하가 내 피난처요.(152-153)

아무리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도, 우선 그들의 언어를 완전히 습득하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고, 언어 지식이 있다면 그들에게 내 흉측한 모습을 무시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소. 내가 보기에도 내 일그러진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인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깨닫게 된 사실이오.(171)

내 생김새는 소름이 끼쳤고 체구는 거대했소.(191)

괴물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샤뮤니 언덕에서 얘기하는 내용들, 인용하지 않은 너무 많은 구절들로 읽는 내내 숨이 막혔다.

“내 생김새는 소름이 끼쳤고 체구는 거대했소”가 특히 와 닿은 건, 이 말이 마치 mtf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ftm과 달리 mtf들의 경우, 소위 “남성체형”이라는 몸의 형태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일테면 넓은 어깨, 근육이 있는 팔이나 다리, 각진 얼굴 등등. 호르몬으로 몸의 형태가 변할 때에도 이러한 체형 때문에 “트랜스젠더란 사실”을 들키기 쉽고 그래서 혐오범죄에 노출될 가능성도 상당하다. 트랜스젠더 중 ftm보다 mtf가 더 두드러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한다면, 그건 이런 체형이 한몫하는 셈이다. 물론 이는 그 사회에서 “남성”의 체형은 이러이러해야 하고, “여성”의 체형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란 인식에 기인하고.

메리 셸리야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괴물을 만드는 과정은,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들이 수술을 하는 과정과 닮아 있고, 괴물의 고백과 빅터의 반응은 트랜스젠더의 고백과 의사의 반응처럼 들린다. 그러니 아마, 두고두고 읽을 책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