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설명하는 과정들

지금 이 시간에 학과연구실에 있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문득 낯설다고 느낀다. 아, 그래, 겨울을 지내면서 이 시간이면 玄牝에 돌아가 있곤 했다. 방을 덥히는 시간이 필요했기에(잠들 땐 보일러를 껐기에, 잠들기 한 두 시간 전에는 꼭 玄牝에 도착해야 했다) 9시가 넘으면 돌아가곤 했는데, 봄이 지나갈 때까지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름인 걸. 여름이면 더욱더 늦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아마 [트랜스아메리카]를 대여섯 번은 읽은 듯 하다. 만약 단순히 좋아하는 영화를 이 정도 읽었다면, 좀 읽었거나 그럭저럭 많이 읽은 셈이다. 하지만 분석하려고, 비평하려고 읽었다면? 고작 여섯 번 정도 읽고 비평하겠다고 나대는 셈이다. 부끄럽다.

이런 부끄러움들이 계속된다. 요즘 들어 부쩍, 긴장감은 떨어지고 페티쉬만 늘었다고 중얼거리고 있다. 공부도 안 하면서 열심히 한 것 같은 과거만 상기하며, “그래도 좀 했어”라고 자기 위안이나 하고 있는 삶. 이런 자신을 깨닫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어졌다. 초등학생시절 30번 정도 읽은 소설책이 있다. 옛 말쌈에 100번은 읽어야 비로소 그 책의 말뜻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뜻을 대충은 혹은 얼핏 엿본 적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고작 대여섯 번이라니. 그렇다고 다른 거라도 열심히 하느냐면 전혀 아니다. 엄살이 아니라 건조한 자기 평가.

개별연구수업을 준비하며 버틀러와 ㅌㄹ ㅁㅇ의 책 서평을 몇 개 찾았는데, 서평을 읽으면서 상당히 당황했다. 정녕 서평자와 루인은 같은 책을 읽은 것이란 말이냐!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세 번 정도 읽었는데, 서평자가 언급하는 비평이 루인의 비평과 너무 다를 때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임에도) 당황하고 좌절한다. 도대체 무얼 읽은 것이냐. 읽긴 읽은 것이냐!

아무려나, 하고 싶은 말은, [트랜스아메리카]를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와 다시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너무 달랐다. 처음엔 단순히 횡단서사로 읽었다. [Run To 루인]의 어느 글에도 이렇게 해석하며 적었고. 미국을 횡단하는 내용과 성별을 횡단[이른바 성전환]하는 내용이 겹쳐있는 정도의 영화로 간주했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읽으며, 이 영화의 주제는 다르게 다가왔다. 최근의 결론 중 하나는, (프로서의 지적과 비슷한데) 트랜스젠더에게 “성전환”은 수술과정이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통합과정, 서사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것. 이 영화는 비록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하기위해 뉴욕에서 LA로 가지만, 이 과정은 단지 수술을 하러 가는 작업이 아니라,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과 소통하고 죽었다고 부정한 부모들과 화해하는 작업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며 엔딩크레딧을 읽다가, 흥미로운 인물 두 명을 발견. 한 명은 케이트 본스틴(Kate Bornstein)이고 다른 한 명은 리키 윌킨스(Riki Wilchins). 아마 영화자문을 했지 않을까 싶다. 이 두 명이 유난히 반가운 건, 트랜스와 관련한 공부를 시작할 초기에 정말 좋아하며 읽었던 저자들이기 때문이다. 본스틴은 트랜스/젠더 이론가이자 연극배우고, 윌킨스는 트랜스/젠더(혹은 젠더퀴어) 이론가이자 젠더 활동가이다. 둘 다 글을 쉽게 쓴다는 점에서 영어라도 부담스럽지는 않다는 장점도 있다. -_-;;; 흐흐.

본스틴의 주요 저작은 자서전이기도 한 [젠더 법외자Gender Outlaw](무법자가 더 와 닿는 표현이지만 법외자가 좀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최근의 고민은 이 책의 제목의 의미인데, 젠더 법외자란 말은 젠더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실제 책의 내용도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 한땐 이런 표현이 좋았지만, 좋아할 수는 있어도 동의하긴 힘들다. 트랜스젠더를 젠더 법외자로 얘기할 경우, 젠더 사회의 바깥-즉, 현재의 사회제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존재, 초월적인 존재로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스틴의 경우 실제 경향이 좀 있다. 물론 작년에 읽고 다시 안 읽었다는 점에서 지금 이 글의 신뢰도는 상당히 떨어짐!)

그래서 최근 자주 중얼거리는 윌킨스의 말이 더 와 닿는다: “사람들은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했다고 얘기하지만, 젠더시스템이 나를 위반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이런 인식이 현재로선 더 매력적이다. 윌킨스의 이런 말을 통할 땐, 젠더나 젠더시스템을 고정된 의미로 가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젠더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젠더시스템이 문제이며, 위반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제도라고 접근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윌킨스의 말이 더 와 닿는 건, 젠더와 관련한 논의를 하다보면, 적지 않은 경우에 트랜스젠더를 사례로, 논의의 주제/대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와 젠더 규범을 강화한다”는 말과 “트랜스젠더는 이성애 젠더 규범에 문제제기하며 젠더를 초월한다”란 식의 언설들 모두, 트랜스젠더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개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개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협상하고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이런 논쟁에선 말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개개인들은 “보수적”이기만 한 것도 “진보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윌킨스의 말은 바로 이런 식의 논쟁에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했다”라는 말에서 나는 사례로, 논의의 주제로 존재하며 규명해야할 대상은 “나”가 되지만, “젠더시스템이 나를 위반했다”고 말하는 순간, 규명할 대상은 “나”에서 “젠더시스템”으로 바뀌고, 논쟁의 주제 역시 “젠더시스템”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경험’을 통해 때때로 기존의 논의 자체를 바꿀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말이 좋은 이유는 석사논문과 관련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주기 때문이다. 보통은 석사논문의 아이디어도 [Run To 루인]에 적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적기가 애매하다. 아직은 막연한 상태라 개념어만 남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

아무려나 내일 마감인 기말논문의 초고를 오늘에야 간신히 끝냈는데, 초고 상태가 엉망이다. 그러니 엄청난 수정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초고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한숨을 돌리고 있다. 월요일이 지나 화요일이 오면, [Run To 루인]도 좀 더 활발하겠지. 월요일까지 써야할 글이 두 편 더 있고 월요일 저녁엔 위그출판회의가 있으니까. 그럼 이제 슬슬 玄牝으로 돌아가야지.

[거침없이 퀴어킥] 자료집

지난 6월 6일 위그의 기획으로 열린 [거침없이 퀴어킥]의 자료집을 위그블로그(wigbook.tistory.com)에 링크했어요. 그날 못 오신 분들 참고하세요. 🙂

위그 페이지는 여기
자료는 여기서도(이 링크는 다소 불안정할 수 있으니 위그 블로그에서 받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요.)

+기존 자료 파일 링크가 깨져서 새로 추가합니다. http://goo.gl/rEjpm (2013.02.08.)

제8회 퀴어문화축제 포럼

거침없이 퀴어킥
: 여자, 여성성, 기만, 환상

일시 : 2007년 6월 6일 오후 3시
장소 : 마녀(홍대)
주관 : 위그(WIG)

사 회 :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
기조발제 : 타리(WIG 활동가)
토 론 자 : 케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
운조 ( [성은 젠더, 이름은 트랜스](여이연, 근간) 저자)
한무지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운영위원)
변혜정 (섹슈얼리티 연구자)

트랜스젠더와 입양

관련 기사
트렌스젠더 입양 찬반 양론 후끈
性만 바꾸면 입양 문제없어
“난 이미 완벽한 여자…더이상 왈가왈부 말라”
노회찬 “하리수 입양추진 돼야”

사실 기사를 읽으면서, 별로 논평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럴 수 없게 만드는 몇 가지 지점 때문에. (첫 번째 기사만 읽었고 나머지는 관련 기사라서 같이 링크했을 뿐.)

01. 첫 번째로 링크한 기사만 읽고 있으면, 아동의 인권과 관련해서 한국이 세계 1위 같다. 아니 한국을 따라갈 나라가 있을까 싶다. 언제부터 아동의 인권에 이렇게 관심이 많으셨는지. 한국의 아이들은 참 좋겠다. 아동의 “인권”엔 이토록 관심이 많은 나라에 살고 있으니까. 아동*의 인권* 말고 *아동*에게도 좀 관심을 가지지.

(일테면 아이가 있는 트랜스젠더의 경우, 성별변경이 현재로선 안 되는데, 많은 반대논리는 아동의 인권이다. 아이가 겪을 혼란을 생각해야지 부/모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비난과 함께. 하지만 정작 트랜스젠더 부/모와 아동의 입장에선 호적상의 성별변경을 하지 않는 것이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학교에 온 사람은 아버지면서 “여성”인데 호적상엔 “남성/부”로 적혀있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에서, 호적상의 성별변경을 하지 금하는 것이 아니라 승인하는 것이 “아동의 인권”이다.)

02. 신문기사는 “트랜스젠더의” 입양, 즉 트랜스젠더에 방점을 찍고 있는데 이를 통해 혈연가족이라는 강박이 심한 한국사회에서 “입양”아동이 경험하는 지점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기사는 입양아동은 “입양한” 아동지만 한국의 왕따 문제와 무관하다는 환상을 조장한다.

왕따문화가 있어서 트랜스젠더는 아동을 입양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아이는 부모의 역사와 무관하게 입양아동임을 알고 있을 거라는 전제가 동시에 작동하는데 그렇다면 한국에서 가족은 반드시 “이성애”혈연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강박 먼저 문제제기해야 하지 않나? “입양”도 왕따의 원인으로 작동한다면, 트랜스젠더 부모가 입양하는 걸 반대하는 건 부모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일종의 “트랜스혐오”로 읽을 수 있겠지) 동시에 가족은 반드시 혈연으로 구성해야지, 입양한다는 것, 그것도 공공연히 입양한다는 것 즉 가족을 입양을 통해 구성한다는 것도 반대의 주요 이유일 테다. 하리수가 아닌 다른 연예인들이 아이를 입양할 때도 언론에선 상당히 호들갑스레 반응하니까. 물론 부모가 트랜스젠더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란 점에서 보도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왕따를 경험할 수 있으니 입양은 안 된다”는 논리가 말이나 되긴 돼? 이런 논리라면 장애인은 결혼을 하면 안 되거나 결혼은 해도 아이를 낳으면 안 되고, 이주노동자 역시 아이를 낳으면 안 되고, 아이가 왕따를 당할 수 있으니 이혼은 절대 해선 안 되고, 부모 중 한 명이 없으면 “결손”가정이 되니까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 중 누구도 절대 죽으면 안 되고 등등. 지나친 오독일 수도 있지만, 이런 논리는 현재 만연한 “왕따”문제를 풀어갈 의지가 전혀 없거나, “왕따문제”는 “왕따 당하는 아이의 문제”이지 “왕따를 하는 아이의 문제” 혹은 “왕따”가 가능하게 하는 사회문화적인 맥락의 문제는 아니란 식으로 읽힌다.

03.

법적으로는 트랜스젠더의 입양은 문제가 없지만 상당수 국민 의견은 “입양한 아이가 나중에 부모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받게 될 정체성 혼란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데 모아지고 있다.

기사는 이 구절로 시작하는데, 조금은 진부한 얘기를 덧붙이자면, “성별은 타고난 것이며 절대 변할 수 없고 이성애야 말로 자연스러운 거다”라고 말하며 “아이들이 겪을 정체성 혼란” 운운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이성애”도 “여성”/”남성”이란 정체성도 결코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정체성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 만약 “이성애”나 “여성”/”남성” 정체성이 그렇게 본질적이고 안정적이라면 이런 식의 말을 하며 불안할 이유가 있을까? 부모가 “동성애자”건 트랜스젠더건 아이의 정체성에 무슨 상관이 있겠어.

04. 이 기사에 논평을 해야겠다고 느낀 건, 인터뷰를 인용하는 방식 때문에.

서강대 조옥라 교수(사회학)는 “부모의 마음이야 그렇지 않더라도 요새 아이들은 뭔가 꼬투리 하나만 있어도 왕따를 시킨다”며 “(트랜스젠더의 입양은) 우리 국민이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상황이라 당분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터뷰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은

입양된 아이의 ‘왕따’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라는 진단이다.

조옥라교수의 말은 “트랜스젠더의 입양이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논쟁이 될 거라는 의미인데 반해 기자는 이 내용을 “트랜스젠더가 입양한 아이는 왕따가 될 것이다”란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코미디는

이진우(34) 간사는 “하리수의 결혼은 성전환자들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좋은 선례이고 입양계획도 잘 진행됐으면 좋겠다”면서도 “입양기관은 대부분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트랜스젠더에게 아이를 맡기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라는 인용구를

트랜스젠더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전문가들도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표명하고 있다.

라고 해석하는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다. 이진우씨는 입양기관이 종교단체라서 아직은 힘들 거라고 얘기하고 기자는 시기상조라고 해석했다. 이거 코미디 맞지? “호형호제를 허하노라”고 말하는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 소자..”라고 대답하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어” 가출했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거지?
(근데 언제부터 이진우씨가 “트랜스젠더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전문가”였어?)

05. 입양기관에선 계속해서 “국민의 정서법상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는데, 그럼 그 시기는 언제인가요? 적당한 시기를 하사해 주시면, 감히 받들어 그 시기에 입양을 추진하겠사와요. 흥!

글고, 트랜스젠더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냐? 역시 “불법”이었어? 역시 그런 거야?

06. 이런 논쟁을 찬반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권침해”아냐? 코미디는 계속된다.

07. 노회찬 관련 기사를 읽으면 속이 탄다. 노회찬 관련 기사에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 (성전환자인권실태조사기획단·노회찬의원실 발행)’라고 적여 있는데, 노회찬 의원실에선 인쇄비만 냈거든! 조사 자료집에도 “후원”으로 명시되어 있거든! 아울러 퀴어문화축제때 이 양반이 와서 축하인사를 했는데, 멀찌감치 서서 들으며 든 상념: 선거 유세 하러 왔니?

정말, 코미디는 계속 된다!

※지렁이 블로그엔, 마지막 부분을 고쳐서 올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