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Susan Stryker “My Words To Victor Frankenstein …”

Susan Stryker “My Words To Victor Frankenstein Above The Village Of Chamounix: Performing Transgender Rage” GLQ, vol.1 (1994)

메리 셸리를 읽고 나서, 스트라이커의 논문 제목을 읽으려 했을 때, 이전엔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제목의 의미를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샤뮤니(Chamounix)는 괴물과 빅터가 만나, 빅터를 떠난 괴물이 그 후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빅터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곳이다. 그러니 제목 “샤무니 마을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하는 나의 말들”은, 괴물이 빅터에게 하는 말이자, 스트라이커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스트라이커는 괴물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 논문은 바로 이런 감정에서 출발한다.

이 논문이, 처음으로 읽은 스트라이커의 논문은 아니다. 그간 몇 편의 논문들을 읽었지만, 그 중 몇 편은 읽기 쉬운 편은 아니었다. 짧은 몇 편의 글은 읽기 쉬웠지만, 어떤 글들은 수월한 영어는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 논문 “My Words”는 정말이지 읽는 내내 감동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이다. 여러 많은 문장들이 감동의 도가니지만, 단 한 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비록 그 한 마디가 이 글을 요약하진 않지만.

할 수 있는 한 무례하게 나는 말한다: 나는 트랜스섹슈얼이다, 고로 나는 괴물이다.(240)

아무려나, 트랜스 관련 글을 읽고자 한다면,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이 글을 꼭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프랑켄슈타인] 혹은 괴물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오숙은 옮김, 서울: 미래사, 2002
Mary Shelley, Frankenstein, London: Penguin Books, 2003/1818/1831

[프랑켄슈타인]을 읽어야지 했던 건 꽤나 오래 전이라고 기억한다. 하지만 언제나 “나중에”란 말로 미루기 일쑤였다. 그러다 5월 어느 날, 수잔 스트라이커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을 먼저 읽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책을 사고 한 달이 흘러서야 읽을 시간이 생겼고, 오랜 만에 읽는 소설책이었다.

사실, 루인에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주는 이미지는 기껏해야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이었다. 그러니 소설책으로 읽은 [프랑켄슈타인]은 낯선 내용이었다. 물론 다른 책을 통해,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이며, 괴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소설을 읽으며, 내내 괴물에 감정이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괴물의 고백과 감정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경험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니 (…)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기쁨에서 몰아내었소. (…) 그들은 날 멸시하고 미워하오. 인적 없는 산과 황량한 빙하가 내 피난처요.(152-153)

아무리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도, 우선 그들의 언어를 완전히 습득하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고, 언어 지식이 있다면 그들에게 내 흉측한 모습을 무시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소. 내가 보기에도 내 일그러진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인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깨닫게 된 사실이오.(171)

내 생김새는 소름이 끼쳤고 체구는 거대했소.(191)

괴물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샤뮤니 언덕에서 얘기하는 내용들, 인용하지 않은 너무 많은 구절들로 읽는 내내 숨이 막혔다.

“내 생김새는 소름이 끼쳤고 체구는 거대했소”가 특히 와 닿은 건, 이 말이 마치 mtf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ftm과 달리 mtf들의 경우, 소위 “남성체형”이라는 몸의 형태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일테면 넓은 어깨, 근육이 있는 팔이나 다리, 각진 얼굴 등등. 호르몬으로 몸의 형태가 변할 때에도 이러한 체형 때문에 “트랜스젠더란 사실”을 들키기 쉽고 그래서 혐오범죄에 노출될 가능성도 상당하다. 트랜스젠더 중 ftm보다 mtf가 더 두드러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한다면, 그건 이런 체형이 한몫하는 셈이다. 물론 이는 그 사회에서 “남성”의 체형은 이러이러해야 하고, “여성”의 체형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란 인식에 기인하고.

메리 셸리야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괴물을 만드는 과정은,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들이 수술을 하는 과정과 닮아 있고, 괴물의 고백과 빅터의 반응은 트랜스젠더의 고백과 의사의 반응처럼 들린다. 그러니 아마, 두고두고 읽을 책이 될 것 같다.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들

지금 이 시간에 학과연구실에 있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문득 낯설다고 느낀다. 아, 그래, 겨울을 지내면서 이 시간이면 玄牝에 돌아가 있곤 했다. 방을 덥히는 시간이 필요했기에(잠들 땐 보일러를 껐기에, 잠들기 한 두 시간 전에는 꼭 玄牝에 도착해야 했다) 9시가 넘으면 돌아가곤 했는데, 봄이 지나갈 때까지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름인 걸. 여름이면 더욱더 늦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아마 [트랜스아메리카]를 대여섯 번은 읽은 듯 하다. 만약 단순히 좋아하는 영화를 이 정도 읽었다면, 좀 읽었거나 그럭저럭 많이 읽은 셈이다. 하지만 분석하려고, 비평하려고 읽었다면? 고작 여섯 번 정도 읽고 비평하겠다고 나대는 셈이다. 부끄럽다.

이런 부끄러움들이 계속된다. 요즘 들어 부쩍, 긴장감은 떨어지고 페티쉬만 늘었다고 중얼거리고 있다. 공부도 안 하면서 열심히 한 것 같은 과거만 상기하며, “그래도 좀 했어”라고 자기 위안이나 하고 있는 삶. 이런 자신을 깨닫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어졌다. 초등학생시절 30번 정도 읽은 소설책이 있다. 옛 말쌈에 100번은 읽어야 비로소 그 책의 말뜻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뜻을 대충은 혹은 얼핏 엿본 적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고작 대여섯 번이라니. 그렇다고 다른 거라도 열심히 하느냐면 전혀 아니다. 엄살이 아니라 건조한 자기 평가.

개별연구수업을 준비하며 버틀러와 ㅌㄹ ㅁㅇ의 책 서평을 몇 개 찾았는데, 서평을 읽으면서 상당히 당황했다. 정녕 서평자와 루인은 같은 책을 읽은 것이란 말이냐!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세 번 정도 읽었는데, 서평자가 언급하는 비평이 루인의 비평과 너무 다를 때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임에도) 당황하고 좌절한다. 도대체 무얼 읽은 것이냐. 읽긴 읽은 것이냐!

아무려나, 하고 싶은 말은, [트랜스아메리카]를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와 다시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너무 달랐다. 처음엔 단순히 횡단서사로 읽었다. [Run To 루인]의 어느 글에도 이렇게 해석하며 적었고. 미국을 횡단하는 내용과 성별을 횡단[이른바 성전환]하는 내용이 겹쳐있는 정도의 영화로 간주했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읽으며, 이 영화의 주제는 다르게 다가왔다. 최근의 결론 중 하나는, (프로서의 지적과 비슷한데) 트랜스젠더에게 “성전환”은 수술과정이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통합과정, 서사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것. 이 영화는 비록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하기위해 뉴욕에서 LA로 가지만, 이 과정은 단지 수술을 하러 가는 작업이 아니라,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과 소통하고 죽었다고 부정한 부모들과 화해하는 작업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며 엔딩크레딧을 읽다가, 흥미로운 인물 두 명을 발견. 한 명은 케이트 본스틴(Kate Bornstein)이고 다른 한 명은 리키 윌킨스(Riki Wilchins). 아마 영화자문을 했지 않을까 싶다. 이 두 명이 유난히 반가운 건, 트랜스와 관련한 공부를 시작할 초기에 정말 좋아하며 읽었던 저자들이기 때문이다. 본스틴은 트랜스/젠더 이론가이자 연극배우고, 윌킨스는 트랜스/젠더(혹은 젠더퀴어) 이론가이자 젠더 활동가이다. 둘 다 글을 쉽게 쓴다는 점에서 영어라도 부담스럽지는 않다는 장점도 있다. -_-;;; 흐흐.

본스틴의 주요 저작은 자서전이기도 한 [젠더 법외자Gender Outlaw](무법자가 더 와 닿는 표현이지만 법외자가 좀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최근의 고민은 이 책의 제목의 의미인데, 젠더 법외자란 말은 젠더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실제 책의 내용도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 한땐 이런 표현이 좋았지만, 좋아할 수는 있어도 동의하긴 힘들다. 트랜스젠더를 젠더 법외자로 얘기할 경우, 젠더 사회의 바깥-즉, 현재의 사회제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존재, 초월적인 존재로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스틴의 경우 실제 경향이 좀 있다. 물론 작년에 읽고 다시 안 읽었다는 점에서 지금 이 글의 신뢰도는 상당히 떨어짐!)

그래서 최근 자주 중얼거리는 윌킨스의 말이 더 와 닿는다: “사람들은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했다고 얘기하지만, 젠더시스템이 나를 위반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이런 인식이 현재로선 더 매력적이다. 윌킨스의 이런 말을 통할 땐, 젠더나 젠더시스템을 고정된 의미로 가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젠더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젠더시스템이 문제이며, 위반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제도라고 접근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윌킨스의 말이 더 와 닿는 건, 젠더와 관련한 논의를 하다보면, 적지 않은 경우에 트랜스젠더를 사례로, 논의의 주제/대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와 젠더 규범을 강화한다”는 말과 “트랜스젠더는 이성애 젠더 규범에 문제제기하며 젠더를 초월한다”란 식의 언설들 모두, 트랜스젠더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개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개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협상하고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이런 논쟁에선 말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개개인들은 “보수적”이기만 한 것도 “진보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윌킨스의 말은 바로 이런 식의 논쟁에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했다”라는 말에서 나는 사례로, 논의의 주제로 존재하며 규명해야할 대상은 “나”가 되지만, “젠더시스템이 나를 위반했다”고 말하는 순간, 규명할 대상은 “나”에서 “젠더시스템”으로 바뀌고, 논쟁의 주제 역시 “젠더시스템”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경험’을 통해 때때로 기존의 논의 자체를 바꿀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말이 좋은 이유는 석사논문과 관련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주기 때문이다. 보통은 석사논문의 아이디어도 [Run To 루인]에 적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적기가 애매하다. 아직은 막연한 상태라 개념어만 남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

아무려나 내일 마감인 기말논문의 초고를 오늘에야 간신히 끝냈는데, 초고 상태가 엉망이다. 그러니 엄청난 수정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초고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한숨을 돌리고 있다. 월요일이 지나 화요일이 오면, [Run To 루인]도 좀 더 활발하겠지. 월요일까지 써야할 글이 두 편 더 있고 월요일 저녁엔 위그출판회의가 있으니까. 그럼 이제 슬슬 玄牝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