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긍정하는 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삶도 바뀌고 세상도 달리 보일 것이란 말이 있다. 꽤나 흔한 말이다. 누군가가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힘들어할 때 조언으로 쉽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난 이런 말을 무척 싫어했다. 긍정적으로 살라니, 이 무슨 태평한 소리냐. 이 괴이쩍은 세상에서 어떻게 긍정적으로 살 수 있단 말이냐. 끊임없이 싸우고 분노하기에도 바쁜 세상,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고민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란 말은 이 아름다운 세상, 좋게 좋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긍정적 사고는 나를 규정하는 세상의 해석체계에 대항할 힘을 갖는다는 뜻이다. 긍정적 사고는, 벨 훅스의 사랑처럼,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갖고서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인식하는 힘이다. 더 중요하게는, 나를 부정적으로 대하는 이 세상의 해석에 대항하며 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긍정적 사고는 사랑과 함께 급진적 사유체계며 혁명을 위한 초석이다.
삶을 긍정하는 힘은 지금 세상을 그냥 좋게 좋게 인식함이 아니다. 나를 부정하는 세상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이 아니다. 나를 부정적으로 대하는 세상의 해석에 대항할 수 있도록 나를 긍정하는 일이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해석할 수 있도록 긍정하는 힘이다. 그러니 죽지 말고 삶을 긍정하며 어떻게든 살면 좋겠다. 이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삶을 긍정하며 살자. 일단 살자. 살면서 저항하자.

이것이 내가 하는 말: 시건방진 트랜스젠더

01

좀 건방지게 말하자. 나는 한국 페미니즘 운동이 성취한 인식론적 토대의 수혜자면서 바로 그 인식론에 저항해야 하는 도전자다. 페미니즘은 학제에서 비규범적 존재가 자신의 위치로 기존 학제를 다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했다. 내가 아니라 나를 문제 삼는 바로 그 질문의 토대를 문제삼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밑절미 삼는다. ‘여성’이란 토대는 여전히 견고하다. 견고할 뿐만 아니라 집요하게 고집하는 근본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와 노력에 포섭될 수도 없고 내쳐질 수도 없는 존재다. 나는 예외로는 머물 수 있지만 예외로만 머물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예외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로 인해, 꼭 내가 아니라도 트랜스젠더를 인식하며 인식론적 토대, 존재론적 토대 자체를 바꾸길 바란다. 이것이 내가 나를 전시하고 공개하는 이유다. 내가 아니라 젠더란 범주, 여성-남성으로 나뉜 공간을 새롭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상상할 수 있길 바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지 나의 편의가 아니다. 예외로 머무는 한 나는 편하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 더 불편하다. 내가 제공 받은 편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편의를 제공하는 사람이 것이다. 내게 편의를 제공하려고 애쓴 분의 노력을 폄훼하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에겐 언제나 고마울 따름이다. 그저 그 분의 노력과 상관없이 그 행동이 의도하지 않게 유지하는 토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예외로 포섭될 때, 젠더 이분법을 유지하려는 토대는 온전한 형태로 유지된다. 세상은 여성 아니면 남성 뿐이라고 인식하는 방식은 아무런 문제 없이 그냥 유지된다. 누차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바라지 않는다.
02
가장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급진성을 사유할 것.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급진적으로 사는 것이다.
03
어제 처음으로 김비 님을 뵈었다. 글은 여러 편 읽었지만 직접 뵙고 강의를 들은 것은 처음이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면서도 힘이 넘치고 또 성찰이 반짝이는 말이라니!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태도의 문제와 끊임없이 연결하는 말하기 방식은 보통의 내공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김비 님의 삶을 말로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이었다. 나는 그냥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나중엔 또 어떤 식의 삶을 선택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활자에 처음 등장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하고 있어서 고마웠다.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김비 님이나 하리수 님과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다. 공적 인물이 아무도 없던 시기에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과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그 이후에 등장했고 그래서 조금은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참고로 02번의 말은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 이야기>란 책 제목과도 관련 있다. 이 얼마나 끝내주는 제목이냐!

주절주절: 겨울의 길고양이, 트랜스젠더 강좌, 권력을 활용하기

왜 가끔은 내 안의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다 어디갔나, 싶을 때가 있죠. 다들 경험하셨겠지만요. 무언가를 쓰고 싶지만, 무엇하나 주절거리기에 부족한 내용들이라 무언가를 쓰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들의 조각들을 늘어놓는 수밖에 ….

전 요즘 길고양이들은 겨울을 어떻게 보내나, 하는 고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추운 겨울, 길고양이들에게 겨울은 어떤 풍경일까요? 집에서 사는 것이 익숙한 저에겐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죠. 찬 바람이 쌩쌩 불고 때로 겨울비와 눈이 내리는 밤, 고양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요?

혹은 트랜스젠더 강의는 어떻게 해야 ‘쉬울까’를 고민합니다. 사실 전 트랜스젠더 특강 가서 트랜스젠더에 관한 얘기는 거의 안 합니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의 어려움을 듣고 싶어하지만, 저는 젠더 경험에 초점을 맞추죠. 그리고 비트랜스의 젠더경험과 트랜스젠더의 젠더경험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고 애씁니다. 아무래도 초보 강사니 여러 강의안을 만드는데요. 최근 ‘딱 학부생용이다’ 싶은 강의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정도 그 강의안을 바탕으로 강의를 했는데요. 최근 특강을 들으신 선생님(저를 특강으로 초대한 선생님이기도 하죠)께서 말하길, 학부생이 듣기엔 너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헉. ㅜ_ㅜ 그래서 혹시나 하고 “그럼 대학원생이 듣기엔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대학원생(아마도 여성학/젠더이론 전공일) 정도면 무난하겠다고 답하셨죠. 우허엉. ㅠ_ㅠ 며칠 전 특강의 수강생들의 감상문을 받았는데요. 어렵다는 말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너무 많은 내용을 말해서 초점을 모르겠다는 말도 있고요. 이건 모두 중요한 지적입니다. 가장 정확한 지적은 강사님은 강의를 많이 안 하신 듯해요, 란 논평이었습니다. 매우 고마운 논평이죠. 초보 배우는 무대에서 발걸음부터 어색하다고 했나요? 저런 논평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겁니다. 아무려나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의 경험과 비트랜스의 경험을 분리하지 않는 강좌를 쉽게 하기. 이 고민을 하며, 저는 ㅎ님을 스토킹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시간대면 ㅎ님 강좌를 따라 다니기로 한 거죠. 하하. 스토킹하겠다고 말했는데 특강 일정을 알려주는 경우도 스토킹인지는 애매하지만…. 암튼 열심히 배워야죠. 🙂

다른 한편,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이를테면 제가 트랜스젠더 이슈로 특강을 할 수 있는 건, 제가 가진 어떤 권력 때문이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는 매우 많고, 트랜스젠더 연구를 전공한 사람은 저 외에도 여럿 있고, 트랜스젠더 이슈로 특강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저보다 강의를 더 잘하고, 글도 더 잘 씁니다. 그럼에도 제가 한다는 건 제가 가진 어떤 특권적 자원과 떼려야 뗄 수 없겠죠. 이것이 제가 가진 권력이라면, 어쨌든 이것이 권력이라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 해야 겠죠. 한땐 권력을 전면 부정한 시기도 있습니다. 권력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이해한 시기도 있고요. 하지만 권력이 맥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저에게 활용할 만한 권력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활용할 것인가? 즉, 미약하나마 어떤 권력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힘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것이 관건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암튼 내일은 극장에라도 갈까 봐요. 선택할 만한 영화가 없어 고민이지만요. 그리고 무척 피곤해서 늦은 밤이지만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