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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요즘 시집 몇 권을 읽고 있습니다. 달고 좋아요.
01
채호기 시를 읽고 있습니다. 그중
나는 내 삶의 항구를 잃어버렸네
-「환한 대낮에」
위의 구절을 읽고 잠시 숨이 멎었습니다. 허수경의 시에서 “아하 사랑! / 마음에 빗장을 거는 그 소리, 사랑!”이란 구절 이후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길을 걸을 때마다, 잠들기 전, 혹은 샤워를 하거나 그냥 무심할 때마다 “환한 대낮, 갑자기 엄습한 네 사랑 때문에 / 나는 내 삶의 항구를 잃어버렸네”란 구절을 중얼거립니다.
이 시를 읽은 건 다소 우연입니다. 「환한 대낮에」이란 시는 『슬픈 게이』란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슬픈 게이』엔 게이인지 트랜스젠더인지 드랙인지 여장남자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게이”란 범주로 설명하고 있는 시가 몇 편 실려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시집을 읽은 건 아니고 요즘 찾고 있는 자료와 관련 있어서 읽은 거지만요. 첨엔 필요한 시만 몇 편 읽었는데, 왠지 다 읽고 싶어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지요. 좋아요. 그리고 위의 구절에서 그만, 잠시 숨이 막혔습니다.
전 이 시집이 무척 흥미로워요. 게이인지 트랜스젠더인지 알 수 없는 몇 편 때문이 아닙니다. 프로이트 옹은 애도와 우울을 구분하고 있는데요, 애도는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며 충분히 슬퍼하며 떠나보내는 과정이라면,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부인하며 자신과 동일시/합체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정확한 설명은 아닐 수도 있지만, 대충 넘어가고요. ;;; 이런 구분에 따르면 채호기의 시집은 우울증적 동일시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몇 편을 제외하면 우울과 동일시란 주제를 다루고 있죠. 그 정점에 “게이”라는 명명으로 게이 혹은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고 있죠. 법적으론 남성으로 태어났다 해도 자신을 여성으로 동일시하여, 여성인 이들로 설명하면서요. 그렇다면 앞서의 시들이 이성애 구조를 분명히 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집을 통틀어 연애시라 부를 법한 시 중에서 이성애 관계로 보이는 시는 거의 없으니까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시집을 분석하는 글을 쓸까요? 글쎄요. 세월이 지나면 알 수 있겠죠.
02
친구에게서 시집 두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미 몇 달도 더 지난 생일의 선물입니다. 철지난 생일은 챙기지 않는 관례에 비춰 너무 늦은 선물이지만 괜찮습니다. 무려 10년 지기인 친구의 늦은 선물이지만, 괜찮습니다. 원래 이런 관계니까요. 하하. 그리고 사실, 몇 달 만에 만난 게 아니라 (제 기준으로)자주 만났지만 무려 8달 전에 제본한 제 논문을 이제야 줬으니까요. 아하하.
진은영의 시집 두 권인데 상당히 좋아요. 오랜 만에 시집을 읽으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문득 아직도 시집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낯설음을 느꼈어요. 뭐랄까, 시인은 많아도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는 얘길 몇 년 전 얼핏 들은 기억이 있거든요. 단지 그 때문이죠.
암튼 달고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