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걸로는 세 번째(혹은 네 번째) 소설이자, 온다 리쿠의 작품 출판 순서상으론 두 번째 소설인 [구형의 계절]은, 첫 번째 소설인 [여섯 번째 사요코]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시작하면서 환상소설의 형식으로 전개하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청춘성장소설 정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읽은 세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10대며 학교를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근데 다른 작품들 상당수도 그렇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세 작품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이런 선택은 꽤나 적확하다고 느꼈다.
“현실”과 “환상”이란 모호한 경계를 타고 있는 작품들은, “현실”이 “환상”보다 더 “환상”적이고, “환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임을 (조금은 서툴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선 어떤 “현실”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이런 선택이 성공적인 것도 아니고, 남겨진 “현실” 공간은 더 “환상”적인 곳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어쩌면 “현실”이라고, 돌아와야 할 곳이라고 여기는 곳이 “환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 아이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시기로 불리는 청소년기 혹은 10대 시기와 잘 어울린다. 10대만이 질풍노도의 시기이고, 20대가 되면 안정을 찾는다거나, 10대가 정말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 사회가 이런 식으로 10대를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나이는 소설의 이야기 및 형식과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다. 번역자는 이 소설을 장르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장르구분과 그런 경계를 무시하거나 흐리는 작품이라고 얘기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고. (온다 리쿠의 소설에서 장르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누가, 어떤 작품이 그렇지 않겠냐 만은.)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10대 성장물이거나, 추리소설형식과 환상소설형식 등의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는 것이기보다는, 소문과 젠더에 관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요 소재는 소문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이렇게 전해들은 소문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변형되는 소문과, 소문을 믿으며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들과, 소문(이럴 때 소문은 소원/바람이기도 하다)이 정말 이루어져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소문을 전파하는 사람들(출처 혹은 내막을 밝히는 부분에선 아쉬웠지만, 이 역시 분명한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느끼진 않았다). 이 소설을 소문이라는 측면에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인데, 이 과정에서 소문을 전파하는 혹은 수용하는 방식이 성별(“남성”과 “여성”)에 따라 얼마나 다른지를 또한 분명하게 얘기한다. 일테면, (소설을 읽어야만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겠지만 :P) “5월 17일에 오는 사람”을 “남학생”들은 침략자, 그래서 몰살하러 오는 사람으로 수용하고 전파하는 반면, “여학생”들은 데리러 오는 사람으로 수용하고 전파한다는 식이다.
물론 이런 식의 분석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온다 리쿠는 이런 식의 말들을 고스란히 차용해서 소설을 진행하지만, 바로 이런 식의 설명에 따라 성별이 모호해지는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이런 언설 자체에 균열이 발생한다. 주인공 격(이 소설에서 분명한 주인공은 없지만)인 미노리가 그렇다. 여학교를 다니는 미노리는, “남학생”과 대화를 하는 상황에선 “여학생”이라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학생”들과 있을 때면 “여학생들은 저렇다니까”란 식으로 자신을 “여학생”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말이 미노리가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여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읽기에 따라선 “여학생/여성”이나 “남학생/남성”이란 식의 구분으로 자신을 얘기하지 않음을(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 없음) 의미한다. 동시에, “여학생은 이러이러하고 남학생은 저러저러하다”란 식의 말들은 규범적인/관념적인 말일 뿐이란 걸 의미한다. 미노리가 가장 친한 친구와 싸우는 장면에서, 같은 반 친구들은 놀라며 말리는 척 하다간, 교실 문을 닫고 싸움이 중단되지 않길 바라고 누가 이길지 내기 하는데, 이는 성별에 따른 편견에 기대어 소설을 진행하는 동시에 균열을 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말들이 만들어낸 성별역할 혹은 성별에 따른 어떤 성격은, 이 소설의 주요 소재인 소문과 겹치면서, 사실상 “여성은 이러이러하고 남성은 저러저러하다”란 식의 언설들이, 소문처럼 출처도 없고 원본도 없으며, 반복해서 말하는(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 믿음임을 얘기한다. 소문이란 게, 원본이나 원형, 출처를 찾기가 힘들고 사실상 그런 것이 없듯, 그저 돌고 도는 말을 통해 진실인 것처럼 여기듯, 젠더 역시 이러하다. 그래서 (최근에 읽은 한 논문의 논리를 슬쩍 빌리자면) “소문은 젠더와 같다/젠더는 소문과 같다”란 비유는, “젠더는 소문이다”란 직유법으로 얘기할 수 있다.
물론 루인의 많은 독후감이 그러하듯, 이런 감상 역시, 엄청난 “오독”일 수도 있지만-_-;;,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젠더는 소문이다”란 문장이 떠오른 건 사실.
온다 리쿠의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닌데.. ‘소문’이 다른 책에서도 참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이제야 드네요.
젠더는 소문이다.. 아주 멋진 명제의 발견이에요! ^^
히히.
근데 라니님도 온다 리쿠의 책을 읽으셨네요. 왠지 놀라운 느낌이랄까요. ;;;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