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요즘 하고 있는 알바는 다름 아니라, 녹취를 푸는 알바다. 책 읽는 시간을 많이 안 뺏기고, 재택근무면서 하기에 가장 무난한 알바가 녹취 푸는 알바지만, 또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알바가 녹취 푸는 알바기도 하다.

보통 논문 등을 위해 녹취를 푼다거나 회의록 녹취를 풀 때면, 더듬은 말이나, 앞뒤가 안 맞는 말은 적당히 편집해서 윤문작업을 거치기 마련이다. 푼 녹취를 논문에 인용으로 쓸 때는 다시 한 번, 내용을 어느 정도 뭉개는 방향으로 편집하기 마련이고. 하지만 이번 녹취는 그렇지 않다. 일테면

일테면, 뭐, 꼭 무슨, 뭐, 어, 꼭 존재해야 되는가 하는, 존재가치를 지니는, {예} 그렇진 않아요.

라던가

해설을 ㅇㅌㄱ씨가 핸 걸로 기억하는데 {아나운서} 아나운사 ㅇㅌㄱ씨가.

란 식이다.

정부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듯(정부에서 수주한 것을 어찌어찌하여 하기로 했다), 이번 알바의 특징은, 그 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 어떤 윤문도 용납하지 않는다. 표준어 표기법으로는 “아나운서”로 알고 있지만, 말을 한 사람이 “아나운“로 했으니 “아나운“로 적어야 한다. 뭐, 이런 건 사실 편하다. 말하는 사람의 어투를 살릴 필요가 있을 때, 이런 걸 고치지 말라고 하면, 운신의 폭이 편하니까.

하지만 첫 번째로 예를 든 것처럼, “뭐, 꼭 무슨, 뭐, 어, 꼭” 이란 식의 말투까지 다 살려야 할 때면, 스트레스의 강도가 꽤나 심해진다. 그렇잖아도 녹취를 풀 때면 이런 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아예 이렇게 규정을 하니 더 신경 쓰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니 친척 상황은 현저하게 늦어지고. ㅠ_ㅠ

하지만 내용을 듣고 있으면 은근히 재밌기도 하다. 지금 풀고 있는 사람은 1950, 60, 70년대 ㅇㅎ판에서 효과음을 담당했던 사람인데, 당시 ㅇㅎ판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달까. 물론 전공이 ㅇㅎ와는 완전히 무관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관심이 있으니까. 아무려나 이번 녹취파일에서 특히나 흥미로운 내용은,
::혹시나 검색으로 이 내용이 걸리면 좀 곤란할 수 있는 관계로, ㅇㅎ으로 처리. 흐흐.::

그럼, 이, 여기 저, 볼을 때리는 거와, 또 뭐, 배를 때리는 거와, 팔을 때리는 거와, 뭐, 다리, 허벅지를 때리는 거와 달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참, 그, 구분할라는 게 굉장히 힘들지 않아요? {예} ㄱㅅㅇ감독이 꼭, 그걸, 고집을 했단 말이야. “꼭 넣어달라”고, “구분해달라”고. {아} 그래가지고 그것이, 예를 들어서 무슨, 뭐, 돼지고기 비곗살을 사다가 친대던가, 또는, 그, 저, 뭐, 피드백에다가 친대던가, 또는 배추를 뭐, 뭐, 통배를 갖다가 친대던가, 이런 거 저런 거 다양하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ㅇㅅㅇㅎ에서 효과음을 더빙해야 했던 시절, 신체부위마다 다른 효과음을 내기 위해 고심한 부분이다. 비곗살을 친 부분이 신체의 어느 부위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이런 얘기, 은근히 재밌다. 흐흐

8 thoughts on “알바

    1. 사실상 자학하고 있어요. 흐흐흐. ㅜ_ㅜ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는 건 좋은데, 흑.

  1. ㅋㅋ 고구려 벽화에 관한 영작보다는 비곗살 얘기 녹취가 재밌을 것도 같아요..ㅎㅎ

    1. 첨엔 고구려 벽화가 뭐지? 했다고, 이내… 크크크크크
      녹취가, 조금은 관심이 있는 내용이다보니 은근히 중독적이에요. 흐흐

  2. 목소리가 되게 이상한 사람… 이라거나 가래가 계속 끓는 사람 녹취하려면 무지 괴로울 거 같다는;

    1. 목소리는 나쁘지 않은데 연세가 있어서 말을 하면서 단어를 삼키거나;; 해서 곤란할 때가 있어요.
      하청을 준 사람의 경우, 혼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도 있다는 제보가 있긴 했지만, 전 운이 좋았달까요. ;; 흐흐

    1. 그렇죠? 도대체 이런 녹취 상태를 자료집으로 내겠다니, 아무리 정부에서 하는 일이라지만, 참, 한심하다느 느낌도 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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