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금까지 제 주장의 일부를 배반하고 있습니다. 고의입니다. 뭔가 다른 모색을 위한 거니까요.*
E의 글을 읽고 아이디어를 얻은 단상..
흔히 트랜스젠더나 바이, 동성애자 등의 가시성을 성취하는 방법 중 하나로 커밍아웃을 언급한다. 많은 사람이 커밍아웃을 하면, 방송에 나오면 소위 말하는 ‘대중’은 트랜스젠더 등의 범주를 더 잘 이해/인식할 거란 얘기다. 물론 많은 트랜스젠더가 방송에 꾸준히 등장한다면, 한 명의 아이콘 말고 여러 명이 여기저기 꾸준히 등장한다면, ‘대중’은 트랜스젠더에 좀 더 익숙해질 것이다. 하지만 익숙해짐이 가시성 확보를 담보하는가? 나는 이런 상상력에 회의적이다.
트랜스젠더가, 바이가, 동성애자가, 혹은 그 어떤 변태가 방송에서, 혹은 다른 어떤 미디어를 통해 커밍아웃을 하고 그 수가 늘어나면, 이건 그저 방송에 등장하는 변태가 늘어나는 걸 의미할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대중’은 한 명 이상의 트랜스젠더 등을 조우하며 ‘다양한 변태가 있네..’라는 걸 알게될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방송에, 미디어에 등장하는 변태가 늘어난 것 뿐이다. 이것은 트랜스젠더 등의 가시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커밍아웃은, 그것도 방송 등 소위 대사회 커밍아웃이 퀴어의 가시성을 성취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는 착각인지도 모른다.
하리수 씨가 사회적 인식론을 뒤흔들며 방송에, 그리하여 한국 사회에 등장했지만 사회적 인식은 그렇게까지 변하지 않았다. 한 명의 예외를 구성했을 뿐이다. 대다수의 학제/연구자를 비롯한 ‘대중’은 하리수 씨를 통해 인간을 인식하는 기본 조건으로 트랜스젠더를 사유하기보다 그저 ‘색다른 연예인’으로 기억할 뿐이다. 하리수 씨의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방송 등을 통한 커밍아웃이 야기하는 파장은 의외로 적고, 서둘러 수습됨을 말하고 싶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조광수 씨의 결혼이 비이성애 결혼에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질까? 글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으로는 좀 회의적이다.)
방송을 통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커밍아웃은 가시성을 성취하지 않는다. 물론 주변 지인에겐 어떤 식의 가시성을 성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리수 씨처럼 방송에 꾸준히 등장하여, 길에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수준이 아닌 이상 커밍아웃은 언제나 벽장과 함께 한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가 만든 벽장을 이고 다닌다. 물론 그 벽장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사회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 만든 거대한 벽장이다. 벽장을 만든 건, 벽장에 사는 건,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 존재가 아니라 소위 규범이라 여기는 이성애-비트랜스젠더다. 커밍아웃은 그 벽장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행위지만 아무런 대답을 못 들을 때도 많다. 그리하여 커밍아웃은 벽장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회가 짊어진 벽장의 무게, 두께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천 명의 퀴어가 방송에 나와 동시에 커밍아웃을 하면 퀴어의 가시성이 성취될까? 글쎄..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세상이라 성취된다고도 안 된다고도 말을 못 하겠다. 내 상상력의 한계다. 이런 한계를 전제하고 계속 얘기를 하자면… 내가 전제하는 가시성은, 예를 들어 인간의 젠더 범주에서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 등을 인간의 기본값으로 인식하면서 시작한다. 더 정확하게는, 타인에게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 사람의 젠더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인간의 젠더를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에서 가시성이 시작된다. 커밍아웃이 이런 인식론적 변화에 어떤 식으로건 영향은 끼치겠지만 커밍아웃 여부가 인식론적 변화의 핵심이라곤 믿지 않는다. 단적으로, 내가 트랜스젠더 이슈를 이야기할 때 내가 트랜스젠더란 점을 알 때와 모를 때 내용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이건 매우 슬픈 일이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커밍아웃 요구는 이성애-비트랜스젠더가 아니라 비이성애-트랜스젠더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과 얼마나 다른지 되물어야 한다. 문제는 커밍아웃을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사람을 인식하는 틀 자체를 바꿔내는 작업이다.
(어쩌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