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수자가 아닙니다.”
이건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를 발족하며, 발족선언문에 쓴 첫 문장이다. 우리는 소수자가 아니다…라는 말.
흔히,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들, 퀴어들, ‘장애’인들 등을 소수자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혹은 약자라고 부르는 경향도 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관련 글을 한 번 쓴 적이 있네. 여기) 하지만 루인은 그렇게 선언하지 않기로 했다.
소수자라는 말은 의도하건 아니건 상관없이 수적으로 적음을 환기한다. 정치적인 권력관계에서의 소수임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는 항상 수적으로 적음을 환기하고, 그래서 동성애자는 10%, 장애인은 10%라는 식의 통계를 들먹인다. 하지만 그 통계는 정확한가. 그 기준이라는 것, 적음을 환기하며 들먹이는 통계의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소수자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맥락적인 언어임에도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젠더가 소수자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다른 모든 맥락과의 관계 중 젠더 정체성이라는 측면만이 부각될 때, 바로 그때만 소수자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수자라는 말을 하나의 고정적인 정체성으로 간주하면서 트랜스젠더의 모든 조건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수자 정체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트랜스남성이 트랜스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여성”에게 언어성폭력을 행사할 때도 트랜스남성은 ‘소수자’인가. 한국처럼 인종차별주의가 극심한 사회에서 트랜스여성은 동남아지역에서 이주한 남성보다 ‘소수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보다 더 강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을 고민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소수자라는 언어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사용한다는 건, 트랜스 개개인들의 여러 정체성들을 오로지 트랜스젠더임 그 하나로 환원하는 방식이다.
소수자라는 말, 특히 트랜스젠더가 소수자이기 위해선 오직 둘 뿐이라는 젠더를 고정적이고 주어진 것으로 간주할 때만 성립할 수 있는 언어이다. 태어날 때 할당한 성별-“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것만이 유일하고 그렇게 할당한 성에 적합한 모습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할 때, 그 환상/허구를 가정할 때만 ‘소수자’라는 말이 성립가능하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정치학은 이런 가정 자체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젠더를 둘로만 해석하는 바로 그것이 문제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트랜스젠더를 소수자라고 명명하긴 힘들다.
물론 우리는 소수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수자가 아니다.
아, 11월 들어서 처음으로 루인이 멋져 보인다ㅋㅋ
당연!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