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 혹은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을 때였다. 아니 꼭 공부만 하겠다고 모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런 모임을 만들었고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읽을 책을 정하고 발제자를 정하고 세미나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책에서 읽은 내용보다는 그간 자신들이 겪은 내용들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것이 더 즐거웠다. 책은 아무래도 좋았다. 책은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 내에서 겪은 차별들, 수업 시간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희롱이나 성폭력 등을 얘기하고 공감하기 시작할 때, 책에서 읽은 내용보다 더 많은 성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모임은 너무도 즐거웠고, 세미나가 있는 날만을 기다렸다. 그날을 중심으로 일주일은 흘렀고 길에서 우연이라도 같은 모임의 누군가를 만나면 복도 반대편 끝에 있는 사람들도 들릴 정도의 큰소리로 인사하며 반가워하곤 했다. 그렇게 세미나는 지속 되었다. 그리고 뭔가 삐걱거리기도 했다.
루인에겐 그랬다. 세미나 모임으로 갈 것인지 이렇게 즐거운 만남의 공간으로 갈 것인지와 관련한 얘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세미나 책은 있고 발제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계속해서 책 혹은 논문의 내용은 겉돌고 있었으니까. 만남이 좋은 것과는 별도로 세미나도 하고 싶었지만 책과 관련한 논의를 하기도 전에 우리는 너무 신나서 일주일 동안 겪은 이야기로 세미나 시간을 채우기 바빴다. 그건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뭔가 불만족스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만약 이런 이야기와 책 속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같이 얘기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많았다. 자신의 감정도 분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루인은, 세미나에 좀 더 충실했으면 했다. (그런데 세미나에 좀 더 충실하다는 건 어떤 걸까?) 책에서 논하고 있는 내용을 좀더 비판적으로 얘기할 수 있었으면 했다. 적어도 세미나 모임이라면.
만약 모임의 성격을 바꿔서 이렇게 서로 만나고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더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물론 알 수 없는 가정일 뿐, 상상일 뿐.
그래서 세미나 모임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여러 곳에서 이런 모임이 있었고 여러 곳에 참여했다. 그럴 때면 많은 경우, 역시 가부장제가 문제야, 젠더가 문제야, 란 식으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책을 읽으며 구조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언어를 모색하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진행하곤 했다. 하지만 “가부장제” 혹은 “젠더”가 결론이 될 수 있을까? 한동안 그렇게 믿기도 했다. “가부장제란 무엇인가”, “젠더란 무엇인가”란 시험문제에 길게도 썼던 답안들. 돌이켜보면 그때의 답안들은 “결국 가부장제가 문제고 그러니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해”라는 식의 대답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가부장제나 젠더는 이미 고정적으로 있고 그것을 어떻게 문제인 것으로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정해진 수순.
그런데 도대체 가부장제가 뭐야? 젠더는 또 무어고? 언제나 이 질문이 빠져 있었다.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가부장제나 젠더는 이미 누구나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무엇이었거나 알고 있다고 가정했다. 젠더가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던 루인도 마치 아는 척 이 단어를 남발하곤 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나중에 참여한 누군가가 물었을 때, 침묵이 흘렀다.
매 순간 이런 갈림길들이 있었다. 이것이 단계적이고 그래서 어느 것이 더 발전적인 공간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리가. 모임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끌고 갈 것인가, 어떤 공간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 것인가와 관련한 고민들이다. 이 모든 것이 공존하는 곳이면 가장 좋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수업과 같은 곳이 첫 번째 성격이면 당황스럽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문제야”란 식으로 결론이 나면 더 당황스럽다. “가부장제”나 “젠더”는 원인/결론이 아니라 설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하면서 고민 중에 있다. 소위 말하는 논문과 에세이의 구분이 안 되는 글쓰기, 경험과 이론이 구분 안 되는 글쓰기를 지향하지만 별로 그러지 않아 불만이다. 동시에 설명해야 할 내용을 원인으로, 결론으로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여 언제나 불안하다. 물론 이런 불만과 불안이 계속해서 글을 쓰고 책을 읽게 하는 힘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