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범의 책임

어느 배우의 소년범이 갑자기 부각되고, 이후 행적이 겹쳐서 문제가 되면서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많은 사람이 많은 의견을 갖겠지만, 다행이라면 학부수업에서 형사미성년의 법적 책임과 반성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물론 그 배우는 형사미성년(소위 촉법소년)일 때의 범죄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와 관련한 처벌은 다 받은 상태였다. 폭행 등 사안의 심각성이 문제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조금 다른 경로를 고민했다.

그 배우에게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은퇴 뿐이었을까? 일군의 사람들이 고민하듯, 나는 그 배우가 은퇴를 하기보다 차라리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고 사과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서둘러 쫓겨나기보다 과거의 범죄와 선한 역할을 맡으며 배우게 되는 반성, 청소년기의 잘못을 성인으로서 어떻게 반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성 말이다. 여기에 나는 그가 그저 은퇴하기보다, 형사미성년이나 소년범으로 처벌을 받고 있거나 퇴소 후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을 위한 교육 및 상담 지원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고 적극 활동하는 것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한다. 2022년에 나온 드라마 [소년재판]을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이 드라마의 핵심은 형사미성년에게 확실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재판에 제대로 참석시키고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고, 제대로 반성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김혜수는 처벌이 약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처벌이 안 될 것이니 재판 절차마저 대충 진행하는 것에 화를 냈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내가 한 행동이 야기한 여파를 제대로 직면하고 그것을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어려운데 시간이 없고 예산이 부족하다.

나는 10년도 더 전에 소년원에서 운영한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그때 제대로 정리하고 관련 글을 쓰지 않은 것을 늘 반성한다. 그리고 배운 것은 정말로 교정교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한없이 부족하고 그와 관련한 좋은 모델이 부족하다. 그러니 나는 그 배우가 과거에 소년범이었는데 지금 선하고 정의로운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역겹거나 위선적인 일이 아니라, 정의로운 역할이 과거 세탁이 아니라, 소년범이었던 과거가 현재 정의로운 역할을 맡도록 한 그 양심이나 수치심, 혹은 또 다른 감정이 무엇인지 강의를 하고 다닐 수 있다면 어떨까. 청소년일 때의 범죄를 30년이 지난 현재도 책임을 지고 사회적으로 매장된다는 것은, 사실 범죄를 저지르면 평생 꼬리표로 따라다니니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교훈’이 될 수도 있겠지만, 형사미성년 혹은 민법상 미성년일 때 지은 범죄를 반성하고 다른 삶을 살 기회는 평생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잘못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을 할 필요도 없다는 메시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진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 행위가 피해자에게 끼친 피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리하여 혼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영화 [밀양]에서는 납치범이 혼자 하나님께 구원받는다) 반성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의 모델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실제 그 배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최근 어떤 성품과 성격인지 모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차라리 위선이라도 이런 모델을 만들고 그래서 그 위선이 품성이 될 때까지 계속 애쓰는 모습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한다.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낭만적이겠지만, 진짜 필요한 일이라고 고민해서.

배움 겸손

박사를 하고 일 년 정도 우울 상태로 대충 지내던 시기, 그래도 내가 명확하게 배운 것이 하나는 있었다. 내가 전공하지 않은 지식이나 분야에 대해서는 겸손할 것, 내가 전공한 분야에 대해서는 더더욱 겸손할 것. 모르는 분야를 아는 척하고, 심지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없다.

퀴어와 팔레스타인 수업

이번 학기에도 퀴어이론 수업을 하고 있는데 올해는 새로운 주제를 여럿 추가했다. 그 중 하나는 ‘퀴어 팔레스타인’이다. 퀴어 팔레스타인과 함께 또 다른 주제를 추가하고 싶었는데, 일전에 적은 것처럼 한 학기에 할 수 있는 주제는 많지가 않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생기고, 다시 생길지 알 수 없는 수업일 때, 혹은 내가 다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 세부 주제를 구성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제약이 많다. 암튼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주제를 포기하고 퀴어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짐작하겠지만 나는 퀴어 의제도, 팔레스트인 의제도 잘 모른다.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퀴어-팔레스타인 운동이나 논의를 잘 따라가고 있지도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퀴어 팔레스타인을 다루겠다고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인데 퀴어이론 수업이라면 늦어도 올해는 이스라엘의 침공과 팔레스타인 의제를 다뤄야 하지 않을까라는 고민 때문이다. 일종의 수업이 가져야 할 윤리 같은 거? 내가 뭐 윤리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잘 모르더라도 이 주제를 수업에서 시작해야 다음으로 이어가는 뭔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도 있었다.

그런데 이 수업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음 주에 할 예정이다. 대학원 수업이 강사가 완전히 장악하는 주제가 아니어도 다양한 배경의 수강생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라는 대책없는 믿음은 아니고 실제 파편적으로 아는 지식과 정보를 엮어나가는 작업 또한 수업에서 할 수 있는 경험 중 하나니까. 암튼 이런 이유로 이런 저런 자료를 계속 살펴보고 있다. 이왕 시작한 주제라면 어설프게 넘어가고 싶지는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