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것과 포기한 것: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3학년 2학기, 보리

보리가 아프기 전에 본 것

[스포일러 같은 거 있을 수 있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봤다. 긴 상영시간에 비추어 재미있었다. 나는 16년의 시간이 중요한 시간으로 남았는데 주인공 밥의 입장에서는 윌라를 양육하며 혁명을 멈춘 시간이었지만, 다른 나머지에게는 혁명을 계속해서 이어간 시간이었다. 밥과 윌라의 정보를 누설하는 ‘배신자’가 되었지만 하워드 서머빌은 계속해서 해적방송을 하며 혁명의 구성원을 연결했다. 디안드라도 어디선가 혁명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윌라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채고 피신 시킬 수 있었다. 센세로 불리는 세르지오는 집을 개조하여 이민자를 안전하게 지낼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폭탄을 터트리는 방식의 혁명은 멈췄지만 정보를 유통시키고 백인우월주의자, 극우 포퓰리스트를 계속 감시하고, 이주민과 이민자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또한 혁명이 아니라면 무엇이 혁명인가? 느리고 천천히 가는 ‘저속 혁명’ 같은 느낌이겠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결국 록조가 윌라를 납치하려고 했을 때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핵심적인 힘이 되었고, 밥이 계속해서 사고를 치며 개그를 할 때 그를 구출하고 윌라와 만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그러니까 윌라가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 혹은 저항하는 활동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6년의 시간 동안, 특별히 두드러진 무언가가 없을 때에도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가고 조직을 유지시킨 그 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이 점이 나는 좋았다. 그리고 또 다르게 좋은 점. 윌라는 예기치 않은 도움 속에서 스스로 벗어났고, 밥은 윌라를 구출하기 위해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나는 이 두 장면이 모두 좋았다. 윌라는 예기치 않게 자신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에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가 되는 것의 개연성을 만들었다. 밥은 결국 딸 윌라를 구출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윌라를 구출하기 위해, 혹은 어떤 순간에 혼자 남겨졌다는 그 감각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추적하고 쫓아간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에 윌라가 고립감을 느끼기보다 안도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그 역할, 나는 그 역할을 해주는 사람도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언젠가 봤던 한 다큐멘터리에서 ‘퀴어의 생존은 의무’라는 말을 듣고 펑펑 운 적이 있다. 먼저 살아서 계속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의 존재는 중요하다. 하지만 밥은 개그캐지.

<3학년 2학기>을 봤다. H가 좋다고 추천했는데, 개봉한 것을 뒤늦게 알아 서둘러 봤다. 매우 좋았고 슬펐다. 슬픈 것은 고3이 집안을 거들기 위해 어떤 책임을 지는 것, 불합리한 직장을 다니면서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는 모습이 슬펐다. 고3은 당연히 입시를 한다는 한국 사회의 서사에서, 입시가 끝나면 당연히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서사에서 ‘과학고’를 나와 3학년 2학기부터 공장에서 실습을 하며 곧바로 취업 되기를 희망하는 삶에서 이미 또 한 명의 생계부양자가 되고 있었다. 생계부양자가 되는 것이 슬프다는 것은 생애주기에 기반한 규범적 상상력이라는 것을 알지만, 영화에서 주인공의 표정, 어떤 불만도 표출하기보다 감내하는 그 표정이 슬펐다. 그리고 내가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았던, 고3에 바로 수습을 거쳐 취업하는 삶을 이제야 좀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을 반성했다. 나의 세계는 지극히 규범적이고 대학 기반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제대로 모르면서도 함부로 떠들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기도 했다. 추가로 더 상영하는 곳이 있다면 더 보고 싶다.

그리고 보리의 간병이 필요해서 취소해야 했던 연극 두 편. <납골당 드라이브>와 <매드 어사일럼>. 둘 다 꼭 보고 싶었는데 취소했다. 수업 등 생계 활동이 아니면 당분간 외출은 자제할 필요가 있겠다. 보리는 병원에서는 쌩쌩하더니 집에 와서는 힘들어했다. 병원에 있기 싫어 일부러 활발했나 싶을 정도로 집에 오자마자 걱정이 되는 상태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 어제 밤, 오늘 아침에는 다시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싶었다. 다음주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기로 했는데 한동안은 생계-소득 활동을 제외한 다른 모든 활동은 자제해야겠다.

보리, 일단 퇴원은 했지만

2박 3일 입원하고 오늘 퇴원했다. 어제 면회 갔을 때, 그리고 오늘 퇴원시키면서 들었던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검사 수치와 상태 사이의 괴리였다. 첫날 못 들은 이야기를 어제 들었는데 CK수치가 문제였다. 근육과 관련이 있는 이 수치가 첫 날은 기준치 상단의 2.5배 정도였고 췌장 수치가 유난히 나빠 주목 받지 않았다. 그런데 입원 다음날, 그러니까 어제 검사를 했더니 CK수치가 기준치 상단의 12배 가량인 3000이 넘는 값이 나왔다. 그래서 의사도 어려워했다. CK 수치가 이 정도 값이 나오려면 심각한 구타나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라고. 문제는 관련성이 있을 다른 수치 중 일부는 감소하며 정상 범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보리의 컨디션이었는데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시고 활발하다는 점이었다. 검사 수치와 상태 사이의 간극. 의사는 이것을 어려워했다.

그리고 오늘. 낮에 오늘 퇴원하자는 전화가 왔고 그래서 데리러 갔다. 병원에서 설명을 들으니, CK 수치는 4750을 넘겼고 췌장 관련 수치도 나빠졌는데 간이나 다른 관련 있을 법한 수치는 감소 중이거나 정상 범위에 들어왔다. 그리고 보리는 활발했다. 근육에 경련이나 이상 증상이 관찰되냐면 그렇지 않았고 병원에서 나랑 있는 동안에도 상당히 활발했고 힘을 잘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서는 병원에서 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집에서 관찰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며 해준 두 가지 이야기는, 고양이의 췌장 수치를 측정하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다음에는 헐액검사 기기를 바꿔서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것.

일단 연령이 있으시고 신장 문제를 초기에 발견했으니 겸사겸사 이것저것 약을 처방받았다. 아마 평생 약을 먹여야 하겠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살아가기를…

보리, 두 번째 입원

밤새 몇 번 토를 하는 것을 봤다. 궁시렁거리면서 아침에 치워야지 했다. 아침에 보리는 평소와 다르게 울었고 자신이 토한 자리로 나를 데려갔다. 이 자리에 토했으니 치워달라는 걸까… 그리고는 근처에서 식빵을 구웠다. 뭔가 기운이 없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병원에 가자고 했다. 늘어졌지만 활기가 넘쳐서 이게 일회적으로 토한 건지 어쩐 건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안심비용이다 생각했다. 24시간 운영하는 대형병원이지만 정규 운영 시간 외에는 응급으로 접수가 되고 그럼 비용이 많이 드는지(다행스럽게도 응급 진료를 한 적이 없어서 모른다) 9시가 지나야 접수를 받아주기에, 일단 토한 걸 좀 치웠다. 대략 10곳?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나서는데 비가 잔뜩 내리고 있었다. 비가 그치길 기다릴 수는 없으니 대충 비를 맞으며 병원으로 갔다. 다행이라면 병원이 걸어서 10분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니 비를 좀 맞아도 10분 정도였다.

얼마간 대기했다가 의사와 상담을 했다. 많이 토해서 데려왔는데 몇 해 전 일주일 정도 입원한 이력도 있고 이제 보리가 11살이 넘었으니 조금만 안 좋아도 병원 데려오는 게 낫겠다 싶어 데려왔다고 했다. 의사도 보리가 워낙 활발한 상태라 심각한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건강검진한다 생각해서 이것저것 검사는 해보겠다고 가볍게 말했다. 뉘앙스는 별 것 아닐 거 같다는 말투. 나도 좀 안심이 되었다. 그래, 지난 8월 귀리도 자주 토해서 병원에 왔지만 사흘 정도 약을 먹으면 괜찮은 상태라고 했으니 이번에도 기껏해야 그 정도겠지(그날 의사는 귀리의 근육에 감탄 또 감탄하셨다. 정말 뱃살 빼면 다 근육… 근육에 감탄할 수 있는 건강 상태였다).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검사는 1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불안해야 할까, 어째야 할까, 안절부절 못 하는 상태였지만 진료 중인 동물이 여럿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불안을 억누르며 기다렸다. 그리고 좀 더 기다리니 의사가 불렀다.

췌장이 안 좋다는 말을 시작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수치를 말해줬다. 여러 수치가 문제였는데 일단 췌장이 가장 나빴다. 췌장 수치의 상단이 3.6 정도였고 급성으로 나빠지면 10정도가 나온다고 했다. 보리는 27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나쁜 수치는 췌장의 수치와 모두 연계되는데 인과관계는 아직 확인이 안 되는 상태였다. 보리는 과거에도 췌장을 비롯한 장에 염증이 있고 자가면역질환이 있어서 일주일을 입원했는데 일단 비슷한 부위였다. 하지만 동일한 질병인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기본 검사만 했으니까. 의사가 뭐라고 했더라… 흉수나 폐에 물이 찰 수 있는 위험은 몇 해 전에도 들었는데 아직 그런 증상은 없다고 했다. 이제 장기적으로 집에서 보살피고 관리하는 일을 해야 할 거라고 했다. 의사의 그 말에 완치의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주기적으로 방문해야 하고, 먹고 있는 처방사료를 바꿔야 할텐데 입원해서 검사해본 다음에 새 처방사료를 결정한다고 했다. 췌장의 상태를 추적하는 어떤 기구가 나왔다고 들었는데(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 강아지에게는 잘 맞는데 고양이에게는 오류가 많다고 했다. 무엇보다… 어린/청년 고양이는 췌장의 수치와 활발함 사이에 상관성이 있어서 수치가 나쁘면 기운이 없는데, 노령 고양이는 활발하거나 상태가 괜찮은데 수치 검사를 하면 더 나빠진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여기가 좀 당혹스러운 부분이었다. 수치는 나빠지는데 겉으로 보는 상태는 괜찮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갈 주요 단서가 기력인데 그것이 지표가 될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할까. 아 그리고 신장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또 뭐가 있더라…

암튼 그래서 일단 며칠 입원해서 이런저런 검사를 더 하고 수액을 맞추고 췌장 수치가 떨어지는지를 확인하고… 암튼 며칠 그러기로 했다. 뭐가 되었든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비는 그쳤고 빗길을 같이 한 보리도, 이동장도 병원에 둔 채 H와 집으로 돌아오니, 아침에는 발견하지 못한, 밤새 토한 더 많은 흔적이 보였다. 그래서 아프다고, 자신이 토한 자리에 나를 데려갔구나 싶어 보리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어쩐지 이동장에 넣었을 때 반항을 안 하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