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서울지역과 비서울지역에서 여성학, 고3경험

이번 학기를 시작하며, 처음엔 총 세 과목을 신청했다. 그러니 현재 두 과목을 듣고 있다는 의미. 결국 이렇게 되었는데, 지도교수와 많은 얘기, 상담을 하며 여러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다음 학기에 더 흥미로운 과목과 놀기로 하고 두 과목을 듣고 있다.

그렇게 듣고 있는 과목들 중 한 과목은 목요일 2시에 한다. 오늘. 그리고 오늘 수업은 지난 주 휴강에 따른 보강 수업으로 선생님과 함께 저녁 먹는 시간까지 해서 2시에 시작해서 8시 40분 즈음에야 끝났다. 물론 저녁을 먹는 시간에도 수업과 관련한 얘기를 나눴지만, 그만큼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이 수업을 들으며, 루인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어서 즐거워하고 있다. 선생님의 쾌락적인 언어들도 좋지만, 또한 그런 과정에서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던 경험들을 해석할 수 있는 틈들이 발생한다는 것, 수업을 듣는다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까지 알았던 지식을 확인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편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앎들 사이에 있던 간극을 메우거나 간극과 균열을 발견하는 쾌락을 경험하는 것.

오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울지역에서 여성학을 한다는 것과 비서울지역에서 여성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문제는 이 “깨달음”이 명절 때마다 느꼈던 점이었음에도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

서울에 소재한 대학에서 여성학을 공부한다는 건, 그다지 주류의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닌, 먹고 살기 어려운 일을 하는, 이란 식의 어떤 이미지가 있다. (한 편으론 사실이고 한 편으론 이미지고.) 그래서 대학원생이라는 어떤 계급성에도 불구하고 여성학을 한다고 하면 경영학을 공부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물론 이런 반응은 루인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성학과 사람들이거나 여성학/페미니즘을 매개해서 만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부산에 갈 때마다, 시공무원인 한 친척어른은 루인에게, 석사 졸업하면 지자체 계약직으로 일하면 되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 지자체 계약직의 경우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이다. 사실, 지금까지 이 말이 가지는 여러 맥락들을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는데, 그저 공무원인 친척어른이 루인에게 하는 관례적인 의미로 받아 들였을 뿐이었다. 선생님께서 서울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것과 부산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다른지를 얘기하는 걸 듣다가, 불쑥 깨달았다. 예전에 부산 지역에 있는 한 여성학과 학생이 했던 말, 부산의 그 대학엔 공무원들도 많다고, 자자체와 상당히 많이 연결 되어 있다고. 그 학생의 말과 루인의 친척어른이 한 말의 연결 지점을 비로소 깨달은 셈이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님은 당연!

서울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맥락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맥락을 놓치곤 한다.

그러며 요즘 고민이 떠올랐다. 이른바 고3의 입시경쟁이라는 것의 의미가 가지는 학벌 차이.

흔히 입시 제도를 얘기하면 힘든 고3들, 입시정책에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단체들, 뭐 이런 이야기들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면 루인은 또, 아 그렇지, 대학에 입학하는 고등학생 시절은 정말 힘들지,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 말에 공감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루인의 경우, 모의고사를 치면 뒤에서 1, 2등을 하는 그런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 학교는 공립이었기에 학교 선생들도 그다지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왔다가 몇 년 지나면 떠날 그런 학교였다. 입시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신경 쓰는 학생도 드물었다. 어쨌거나 인문계였지만, 소위 인문계라고 얘기할 때 말하는 그런 고등학교가 가지는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언론(을 매개하는 여럿)에서 만들어내는 고3의 이미지, 과외 열풍, 학부모단체의 목소리들은 서울이라는, 그것도 모의고사 성적이 상위 1, 2등을 다툴 그런 학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서울지역과 비서울지역이 경험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립과 공립이 다르고 모의고사 성적으로 평가하는 학교의 학력에 따라 다른데, 왜 그리도 고3의 이미지는 천편일률적인지. (일테면 ps의 경우 부산지역에서 모의고사 성적으로 1, 2등을 다투는 그런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래서 이른바 고등학생 혹은 입시지옥이라는 어떤 생활을 했었다.)

한 번은 이와 관련해서 글을 쓰고 싶다. 당장은 아니고, 천천히 오랜 시간을 두고.

바람-열망: Jeff Buckley – Hallelujah

중학생 때, 학교에 가던 어느 길에서였나, 종교에서 자살을 금기시 하고, 금지하는 건 신도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종교를 믿는 분들껜 죄송해요.) 종교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고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그때 그렇게 중얼거렸다. 종교 없음이 곧 종교와 무관한 삶이라거나(가능하지도 않지만) 딱히 종교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문화적 유산”이라고 불리는 의미가 아니라면 애써 만나지도 않았다. 때론 피하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어떤 종교와 관련한 음악은 별로 안 좋아했다.

작년, 키드님에게서 두 장의 앨범을 선물 받았을 때, 너무 좋았고 그래서 주구장창 앨범을 들었지만, 제프 버클리의 너무도 매력적인 노래들 사이에서도, 한 곡은 그냥 넘어가곤 했다. “Hallelujah”란 곡. 그저 노래 가사를 통해, 할렐루야, 라고 읊조리는 것이 싫었다. 할렐루야라니….

그렇게 시간이 참 많이도 지났다. 얼마 전 어느 순간이었나, 이 앨범을 듣다가 갑자기 이 노래를 달콤하게 느꼈다. 그리고 급기야 어제 밤부터 이 노래만 듣고 있다. 할렐루야… 이 구절이 (어차피 가사를 확인 안 했으니 실제 가사의 의미는 모르겠고) 종교적 귀의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절박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란 말이라도 읊조리며 기대고 싶었다.

불교의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 한 사람이 죽어 저승길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가는 길에, 누군가가 계속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더랜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관세음보살을 삼천 번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했다나. 그 말에 그 사람은, “나는 바쁘니 삼천 번을 욀 시간이 없다”면서 “천세음보살, 천세음보살, 천세음보살”이라고 말했다. 관세음보살을 외던 사람이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볼 즈음, 천세음보살을 외던 사람은 극락으로 갔다고.

비록 불교 경전에도 어떤 형식을 적어 두고 있긴 하지만, 형식은 어차피 형식일 뿐이란 얘기다. 열망으로 바라는 것이 형식을 잘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일화 혹은 우화. 이광수의 “무명”이란 단편소설엔, 평소엔 종교를 박해하고, 누가 경이라도 외면 구박하던 사람이 자신의 재판 일정을 앞두고 몰래 “관세음보살”을 외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에르노는 애인에게서 전화가 오면 자선단체에 200프랑을 기부하겠다는 식의 다짐을 하며 전화가 오길 열망한다. 만화 [아즈망가 대왕]의 치요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흰 색 선만 밟고 건너며 소원을 빌고자 한다. 그래서 요즘의 루인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흰 색 선만 밟으며 걷고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며, 계속해서, 할렐루야, 라고 읊조리고 있다.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이 부분만 따라하고 있다. 할렐루야, 란 말이 단순히 종교적인 귀의가 아니라, 어떤 열망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반드시 할렐루야나 관세음보살일 필요는 없다. 루인이 매일 아침 인사하는 나무를 부를 수도 있고, 핸드폰 줄을 장식하는 별인형에게 말을 걸 수도 있다. 어차피 믿음을 지탱해 줄 힘이 필요한 것일 뿐. 열망을 송신하고 믿음으로 버티면서, 시간을 견디고 있다.

참, 오랜 만에 노래 가사에 위로 받고 있다. (키드님, 고마워요!)

#노래 들으러 가기

휴학을 둘러싼 얘기들

몇 해 전, 학교에 적응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봄 학기는 어떻게 지나갔는데 가을학기가 되었을 때, 온 몸으로 휴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휴학할까, 자퇴할까 하는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 가을, 추석이 끝난 다음날, 부모님 도장을 몰래 파서(예전에도 적었듯, 소심해서 너무도 비싼, 무려 15,000원이나 하는 도장을 팠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싼 도장을 찍으면 부모님 몰래 하는 것이 들킬 것만 같아서 ㅠ_ㅠ) 휴학계를 제출했을 때, 시원했고 뭔가 후련한 느낌이었다.

봄 학기를 다니며 했던 택배집하장 알바나, 휴학하고 대형할인매장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놀며 인라인을 팔았던 모습은, 지금의 루인을 알고 있는 사람에겐 상상하기 힘든 모습 중 하나이다. 다들 이런 루인의 얘기에 놀라지만, 말하는 루인도 어색하고 낯선 느낌이니까. 물론, 그때 알던 사람들이 만약 지금의 루인을 만난다면, 마찬가지로 낯설겠지. 공부와는 거리가 먼 인간으로 여겼으니까.

지금 다니는 대학원 학과를 개설할 당시부터 지켜본 루인은, 입학은 했지만 결국 적응 못하고 휴학하거나 학교를 그만둔 이를 여럿 봤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학제에 안 맞는 거라고 얘기했지만, 글쎄. 공부가 적성이 아니거나 학제가 요구하는 방식에 안 맞는 것일까?

그때, 휴학 혹은 자퇴를 꿈꾸던 시기에, 수업에 들어가면 기초과목임에도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고, 수업시간은 허공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집과 의논할 의향은 없었다. 이전부터 집과 맺어온 관계 방식이 주는 경험들의 영향과 지금과는 달리 당시엔 사이가 너무도 안 좋았기에 그저 혼자서 속 앓다가 결정했다. 당시의 유일한 (지금도 만나는 그) 친구는 루인의 휴학 결정(자퇴 수순)을 염려하면서도 지지해줬다.

살면서 후회 따윈 하지 않겠다고 중학생 시절 다짐한 이후, 잘 지키고 있는 편이지만, “후회”할 일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에 와서 그때 다짐을 재해석하면, “후회”할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재해석하며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하다는 의미랄까(꿈보다 해몽;;;). 물론 여전히 반추하는 용기가 부족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가장 많이 반추하는 경험 중 하나는 고2 때의 어느 날. 당시 가장 절친했던 그는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어 했고, 음악연습실에 나가서 매일 연습했고, “대학에 가야지” 라는 말을 했지만, 공부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어느 날인가, 루인에게 대학에 꼭 가야하느냐고 물었을 때, 루인의 대답은 “그래도 가야지 않겠니”였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 친구가 바라던 대답은 “안 가도 괜찮아”였음을 깨달았을 때, 그 친구가 느꼈을 감정을 짐작하며 너무도 미안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루인의 맥락에서 대학에 간다는 건, “합법적인 방법”으로 부산에서 탈출한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그건 루인의 맥락일 뿐, 그 친구에겐 그렇지 않았다.)

반면 루인의 휴학결정과 자퇴다짐에, 친구는 이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요가를 배울 수도 있다는 등의 얘길 하며 지지했다. 그땐 그 말이 허망한 공상 같고 꿈같은 얘기라고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얼마나 힘이 되던지! 그 후 인라인스케이트 판매알바를 하고 그러다 그 회사의 창고관리로 취직하면서 지내던 시절. 집에선 여전히 학교에 다닌다고 알았고, 방학일 시기엔 일이 있어서 못 내려간다고만 말했다. 그러다 설이 다가왔다.

부산에 내려가기 너무도 싫었기에, 결국 선택한 전략은 설날 일주일 전에 핸드폰을 중단하고 그저 안 내려 가는 것이었다. 전략이란 점으로 평가하자면 정말 바보 같은 계획이었다. 아무려나 설 다음날, 방에 앉아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루인을 부르는 줄 몰랐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나가서 문을 열었고 루인을 부르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당시 살던 동네의 경찰이었다! -_-;; 루인 친척 중에 공무원이 적지 않은 편인데, 다른 지역에서 시공무원을 하던 친척에게 서울경찰청에서 일하는 동기가 있었고, 그렇게 끈이 닿아 결국 …. (이것이 바로 자취생의 가출이기도 하다. 켁.)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날 회사에 출근했고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모님이 회사로 왔다. (이것이 바로 계획이 어설프면 쉽게 들킨다는 증거 되겠다. -_-;;) 그렇게 붙잡혀선 부산에 질질 끌려갔다. 나중에 듣고서야 알았는데, 경찰이 부모님께 전화해서 전하길, “얘가 무슨 마약한 표정이라고 당장 데려 가라”고 했다나. 쿨럭. -_-;;;

그렇게 부산에 내려가 여러 날을 쉬면서, 조금씩 몸에 쌓여 있던 긴장들, 억압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공부가 하고 싶었다. 그제야 비로소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이런 경험들이 있어서인지, 대학원에 들어와 적응 못하거나 휴학을 고민하는 이들에겐 휴학하고 싶으면 하라고 말하는 편이다. 그만 두고 싶다면 그만 둬야지. 결국, 몸 가는 데로 가야지. 그 사람이 공부에 재능이 없거나 학제에 안 맞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낼 시간일 뿐이란 의미니까. 학교만이 있어야 할 유일한 공간은 아니니까.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19살 혹은 20살에 대학에 입학해서 2년 혹은 4년 만에 졸업하고 취직하는 수순을 밟을 필요는 없으니까. 현재의 한국 사회는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속도로 살 것을 요구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방식과 동일한 속도로 살 수 있는 건 아니고 실제 그렇게 살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게 요구하는 기준으로 평가할 뿐. 지금이 아니어도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은 언제든 있고 언젠간 올 테니까. (루인이 학생이니 학교라고 표현했을 뿐.)

그때 휴학하지 않고 그냥 지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 어떻게 잘 지나가서 지금보다 좀 더 빨리 대학원에 입학하고 이미 벌써 박사과정에 있을까? 그래서 그때, 휴학했던 그 시기가 적응 못하고 방황하던 혹은 실패의 시간이었을까? 돌아보면, 학부 생활 중 가장 반짝이는 시간, 가장 잘 했다고 여기는 시간은 (이랑 활동 시기보다도) 그때, 휴학하고 보낸 시간이다.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그 시절을 얘기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언어가 있기에 가능한 평가인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진 않다. 휴학과 질질 끌려가던 그 장면이, 지금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건, 어느 순간 이후 강력한 믿음으로 자리하고 있다.

…R과 얘기를 나누다가, 떠올랐어요.
오늘 즐거웠어요. 또, 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