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ffis][영화]국경을 넘어/메이드 인 아메리카

[제 9회 서울여성영화제]
[국경을 넘어/메이드 인 아메리카] 2007.04.05.14:00, 아트레온 4관 G-7

텍스트를 해석하는 건, 결국 자신의 현재 고민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고 느끼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좀 산만한 몸으로 이 영화를 읽었다. 다른 고민을 하느라 영화를 읽는 몸은 종종 몸은 영화관 밖에 있기고 했다. 영화가 별로였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다른 고민들을 좀 하느라… 흐.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읽으며 든 고민은, 분명 이주노동과 관련한 영화임에도 루인에게 이 영화들은 가족구성과 관련한 영화로 다가왔다. 물론 이주노동이 가족구성과 별개의 문제가 아니고, 이 둘은 너무도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자꾸만 가족구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춘 논의로 읽고 있음을 알았다.

이주노동과 무관한 가족구성이 아니라 이주노동에 따른 가족구성과 재구성으로. 이 영화를 읽으며 불편한 지점은 루인의 소비를 위해 이 지구의 다른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저임금으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었다. 재현이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누군가의 의도, 시선에 따른 구성(편집)이라지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애”는 어쩜 그리도 중산층 가족이데올로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다른 어떤 가족형태를 바랐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충의 스토리는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 영화 제목에 링크해뒀음.)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경우, 텔마는 노예제 이후 흑인들이 백인의 보모역할을 했던 것이 현재 “불법”이민자들이 대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며 보모라는 역할을 고민하게 한다. 텔마는 가사노동자와 보모로 일하는 집의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키웠는데, 그 아이는 텔마를 “엄마”로 부르곤 했다. 이런 명명은 “엄마”가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역할이 아님을 의미하는 동시에 “엄마”에 각인되어 있는 문화적인 역할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또한 이런 명명은 친족을 부르는 방식(엄마, 아빠, 고모, 이모, 언니, 누나 등등)에 균열을 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흑인보모들을 “엄마mom”로 부른 적이 있다고 알고 있기에, 인종에 따른 보모라는 역할의 강화이기도 하다.

가족구성을 둘러싼 “불편”은 주디스의 경우에서 발생했다. 가족을 구성하려는 바람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그럴 리가!), 가족을 구성하려는 방식이나 내용이 자꾸만 중산층 가족이데올로기에 맞추어져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이 “불편”은 편집과 재현 자체가 감독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 구성에서 감독이 슬쩍 빠져 있다는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년, 인터뷰를 하고 녹취를 풀면서 느낀 건, 녹취를 푸는 행위 자체도 이미 해석이라는 것. 다른 사람이 푼 녹취를 루인이 다시 풀다보면 질문자의 언어가 답변자의 언어인 것처럼 바뀐 경우도 있거니와, 질문자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답변자가 언어를 선택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대답하는 사람은 질문자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종종 그 의도에 맞춰 대답을 하기도 하고.

그러니 “불편”함이라는 느낌은 “불만”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 불만의 정체 역시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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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큐는 이주노동자의 성별노동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이 지점은 당분간 읽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통과. 다큐멘터리 속의 “여성”은 한결같이 가사노동이나 보모로 일하고, “남성”은 건축업 등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니 성별분업이 너무도 분명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망설이는 지점은, 영화 속 인물들을 이렇게 쉽게 “남성” 아니면 “여성”이란 식으로 환원해서 얘기해도 되는가, 하는 고민들이다. 저 사람은 남성이고 저 사람은 여성이야, 란 식으로 본인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환원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루인이지만, 그렇다고 둘로 환원하고 이런 환원에 따라 작동하는 문화적인 장치가 없는 건 아니다. 동시에, 사람을 둘 중 하나로 환원하는 바로 그 제도를 비판하고 문제제기 하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몸 형태에 따른 “성별역할” 구조를 비판하는 것을 무력하게 만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 지점을 모색하기까지는 성별노동 부분은 보류하기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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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만나서 기뻤어요. 얘기도 나눠서 좋았고요. 아트레온 어디선가 또 만나요 🙂

제목을 입력해 줬으면 좋겠어요

내용은 어떻게 입력할까요?

무언가를 쓰려고 새글쓰기를 클릭했는데, 문득 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죠. 무엇을 쓰고 싶었던 걸까요? 무언가를 쓰려고 나스타샤를 켰는데, 갑자기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막막함, 먹먹함. 그 어떤 상실감.

무엇을 써야 할까요? 태터툴즈 클래식 버전을 기억하시나요? 태터툴즈 클래식 버전의 글쓰기엔, “내용을 입력해 주세요”라는 글자가 기본적으로 들어 있어요. 하지만 “내용을 입력해 주세요”라는 글자로 이미 내용은 채워져 있기도 해요. 아니에요,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지지난 일요일, 개별연구수업을 준비하며, 논문의 키워드와 각각의 아이디어들은 있는데 그 아이디어와 키워드를 어떻게 연결시킬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지식인”이 떠올랐어요. 웃겼어요. 네이버라면 메일(주로 사용하는 메일은 gmail이지만 메일계정은 10개 정도 있는 듯;;;)과 카페로만 사용할 뿐이고, 검색은 엠파스와 구글을 사용하거든요. 지식인은 믿지 않는 정보 중 하나죠. 하지만, 각각의 연결고리를 잡지 못했을 때 떠오른 건, 지식인에 키워드와 아이디어를 적고 “이 키워드와 아이디어로 논문 목차를 구성해주세요. 급합니다. 내공 100 드릴게요.” 라는 글을 쓰고 싶다고 느꼈어요. 웃겼어요. 지식인이라곤 어쩌다 걸리는 웹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데도 어느 순간 이런 식의 말들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에.

물론 이런 상상은 단지 당시의 몸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일 뿐, 누군가가 이렇게 주제를 구성하고 이런 목차로 글을 쓰거라, 고 한다면 “싫어!”라고 말하며 거절하겠죠. 그저 막막했었죠. 하지만 이런 막막함을 견디며 어떤 상황을 모색하는 것을 좋아해요. 불안을 견디듯 견디는 막막함.

정말이지 키워드만 있고 주제를 명확하게 잡지 못하는 상황에선, 누군가가 주제를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기도 했어요. 그러면 글은 어떻게라도 열심히 할 텐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이렇게 막막함을 견디다, 지난 일요일 갑자기 목차를 짜기 시작했고, 그렇게 현재의 목차가 나왔어요. 사실 목차를 짜기 직전까지는 목차를 짤 엄두도 못 냈어요. 그런데 목차를 짜야겠다고 책상에 앉아 이면지를 꺼냈을 때, 어떻게, 어떻게 목차가 구성되고 있더군요.

물론 이 목차를 또 언제 어떻게 바꿀지는 알 수 없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현재로선 현재의 목차대로 진행할 거예요. 아니, 현재의 목차대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하려고 계획한 방식으로 목차를 구성했네요. 하고 싶은 건 있어요. 그걸 목차로, 어떤 한두 줄로 설명할 주제로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사실 지금도 한두 줄로는 설명을 못 해요. 아니 여전히 주제는 불명확해요. 두 가지인지, 한 가지인데 두 가지라고 착각하는 건지, 따로 다뤄야 하는데 하나에 구겨 넣고 있는 건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아요. 그래서 목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가장 엉성하게 남아 있는 건지도 몰라요. 정확하게 어떤 지점을 말 하려는 지를 명확하게 할 때 목차도 조금은 덜 엉성한 형태로 구성되겠죠.

이번 학기가 끝나면 좀 달라져 있을까요? 아무렴 어때요. 그저, 이 막막함을 견디며 지내겠어요. 이 막막함을 묵묵히 견디고 나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하나만 놓치지 않겠어요. 그러다 무엇도 느낄 수 없으면 또 어때요. 어쨌거나 막막함을 견딘 시간은 몸이 기억할 테니까요. 이런 시간들을 몸이 기억한다면, 이번 학기 내내 고민했던 내용들을 모두 엎고 새로운 주제를 정하고 목차를 처음부터 새로 짠다고 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반복한다고 해서 익숙해지거나 능숙해지는 건 아니지만, 아주 낯설지는 않겠죠. 어렴풋한 흔적만은 남아 있겠죠.

첫 강의실 강의

어쨌거나 한 수업에 특강강사로 초빙받아서 두 시간 동안 횡설수설하고 왔다. 덕분에 아침부터 [트랜스아메리카]와 [미녀는 괴로워]를 다시 읽었고 전에는 지나친 부분들을 다시 읽어서 좋은 만큼이나 두 작품 모두 쉽게 읽을 수 없는, 읽고 있노라면 괴로운 작품임을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몇 번이고 더 읽을 예정이고, 만약 언젠가 어디선가 시간강사를 한다면, 몇 주에 걸쳐 영화를 같이 읽고 얘기를 나누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해도 괜찮겠다고 느꼈다.
(한글로 이루어진 트랜스젠더 관련 글들이 거의 없다는 점도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영화가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대충 꼽아도 10편 정도는 되겠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소년은 울지 않는다], [크라잉 게임], [메종 드 히미코], [폭풍우 치는 밤에], [천하장사 마돈나], [트랜스아메리카], [미녀는 괴로워], [드랙퀸 가무단], 등등. (몇 개는 일부로 제외))

두 시간 수업 중, 한 시간 정도 루인의 원퍼슨쇼를 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기로 했지만, 혼자서 떠들고 나니 30분이 지났다-_-;; 사실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지는 않았다. 질의응답을 중심으로 구성할 계획이었기에. 다행인지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했고, 루인은 어김없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결국 나중에 한 사람이, 질문을 하면 어떤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기만 한다는 지적을 받았을 정도. 어쩌겠어요? 이게 루인의 방식인데… -_-;;;

사실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당황한 건, 대형 강의실에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는 점. 한 20~30명 정도 듣는 수업이라 짐작하고 들어갔는데, 아니어서 상당히 놀랬다. 왜냐면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를 알아야 얘기를 진행하기 편한데, 사람 수가 많은 것도 그렇거니와 강의실 형태 자체가 강사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강생과 강사가 소통하기 좋은 구조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내용은 거의 기억이 안 나지만, 한 시간 정도 지나니까 강의실 전체가 보이고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이 보이더라는 건 중요한 성과이자 체험.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루인의 입장이고 루인의 말을 듣고 있었을 사람들에겐 참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