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당나귀들, 회색 時

요즘 한 수업이 다소 불만족이라면 다른 한 수업은 너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특히나 그 이유는 수업으로서는 드물게 채식주의와 관련해서 한 달 정도 진행하기 때문. 그렇게 읽는 책 중 한 권은 배수아의 [당나귀들]이다. 예전에 채식주의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며 세미나 자료로 쓸 한국어 책이나 논문이 너무 없어 아쉬웠는데, 진작 이 책을 알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152쪽에 나오는 “혹은 내가 결코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한 그릇의 굴라쉬 수프에 주사위 모양의 고깃덩이가 들어 있을 때, 내가 채식주의자임을 그가 잊은 사실을 가볍게 지적하는 것이 수프 접시의 국물을 떠먹기 전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먹은 다음이어야 하는가.”가 가장 크게 남아 있다. 정작 배수아는 그저 흘리듯이 쓴 부분일 수도 있지만, 실제 이 부분과 관련해선 딱 이 부분에서만 기술하고 있지만, 항상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같이 읽은 “회색 時”란 작품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짝사랑이란 섹슈얼리티와 우울증, 채식주의, 경험 해석과 기억 해석 등을 둘러싸고 아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소설. 특히 미래를 기억하고 과거를 예측한다는 부분, 그래서 미래를 기억하며 쓰는 방식과 과거를 예측하며 쓰는 방식이 상당히 유사한데 이것을 읽다보면 일직선으로 기술하곤 하는 시간 개념이 아닌 서로 꼬이고 휘어지는 시간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훌]에 실려 있다.

신념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의 정신적 경계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신념의 비무장 지대, Noman’s land의 모호함 속에 숨어 있을 때 우리는 마치 무한을 살고 있는 듯이 안전하고 충분히 보호받는다고 느낄 수 있으나, 신념 속에서는 알몸을 드러낸 고슴도치만큼이나 목숨을 노리는 굶주린 상대들에게 고독하게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11쪽)

타인의 말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착하여 총체적인 비판을 날릴 수 있는 용기의 근저에는 대개 한 인간이 그의 한 마디 발언을 통해서도 이 세계의 모든 정신을 빈틈없이 한꺼번에 반영해야 한다는 무리한 전제가 숨어 있는 듯하다. (75쪽)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요리했지만 양념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기름의 온도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얼마나 오래 요리해야 하는지 한 번도 정확히 측정하고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신경 쓰는 것보다 맛이 없으면 맛이 없는대로 먹는 편이 더 나았다. (115쪽)

나에게 추억의 음식이란 전자레인지에서 갓 꺼낸 따뜻하고 하얀 햇반과 그 위에 뿌려 먹는 조미료 김 가루에 적당한 양의 미역이 떠 잇는 인스턴트 미역국과 지나치게 포만감을 주지 않는 스낵 면을 뜻한다. (148쪽)

지금 외국에 있는 당신에게 고향과 관련해서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인가?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우스꽝스럽게도 가장 비인격적인 인스턴트 음식들이었으며, 오직 개인의 상태에서만 토속적이라고 불릴 만한 그 음식들이 고향이라는 단어와 함께 내 토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집에서 먹었던 음식이 아니라 어느 날부턴가 내가 스스로 해먹었던 음식들이 말이다. (149쪽)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이것은 유명한 채식주의 홍보 문안이다. 하지만 음식에 대해서 내게 중요했던 것은 좀 더 다른 질문이었다. 그것은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이다. …(중략)… 절대적 채식주의자였던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당신의 출처는 무엇인가?’ …(중략)… 그때 그의 질문은 정확히는 나의 식습관을 물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바로 그것이 국적을 의미하는 ‘XX인’을 능가하는 중요한 정체성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경우 그의 ‘출처’란 정체성의 고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래서 어쨌든 그의 식대로 말하자면, 내 첫 번째 고향은 인스턴트 식품이었다. (150-151쪽)

혹은 내가 결코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한 그릇의 굴라쉬 수프에 주사위 모양의 고깃덩이가 들어 있을 때, 내가 채식주의자임을 그가 잊은 사실을 가볍게 지적하는 것이 수프 접시의 국물을 떠먹기 전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먹은 다음이어야 하는가. (152쪽)

안녕, 내 예쁜이!

네가 오지 않는다면
빵 속에 숨겨 둔 칼을 꺼내
부스러기를 털어 버린 다음
네 가슴 깊숙이 찌를 거야.
(172쪽)

차마 말을 계속할 수 없다. 내 슬픔의 용적이 내 존재를 능가해 버리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슬픔의 화상 때문에 매일매일 고통스럽다. 내 목구멍은 송두리째 타버리고 나는 앞으로 나간다. 오직 슬픔이 나의 동력이다. …(중략)… ……죽어 가면서 나는 슬픔으로 인해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간다. 오직 슬픔만이 나의 불타는 호흡이다. (268-269쪽)

갈림길들: 세미나와 글쓰기에서

여성학 혹은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을 때였다. 아니 꼭 공부만 하겠다고 모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런 모임을 만들었고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읽을 책을 정하고 발제자를 정하고 세미나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책에서 읽은 내용보다는 그간 자신들이 겪은 내용들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것이 더 즐거웠다. 책은 아무래도 좋았다. 책은 어렵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 내에서 겪은 차별들, 수업 시간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희롱이나 성폭력 등을 얘기하고 공감하기 시작할 때, 책에서 읽은 내용보다 더 많은 성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모임은 너무도 즐거웠고, 세미나가 있는 날만을 기다렸다. 그날을 중심으로 일주일은 흘렀고 길에서 우연이라도 같은 모임의 누군가를 만나면 복도 반대편 끝에 있는 사람들도 들릴 정도의 큰소리로 인사하며 반가워하곤 했다. 그렇게 세미나는 지속 되었다. 그리고 뭔가 삐걱거리기도 했다.

루인에겐 그랬다. 세미나 모임으로 갈 것인지 이렇게 즐거운 만남의 공간으로 갈 것인지와 관련한 얘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세미나 책은 있고 발제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계속해서 책 혹은 논문의 내용은 겉돌고 있었으니까. 만남이 좋은 것과는 별도로 세미나도 하고 싶었지만 책과 관련한 논의를 하기도 전에 우리는 너무 신나서 일주일 동안 겪은 이야기로 세미나 시간을 채우기 바빴다. 그건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뭔가 불만족스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만약 이런 이야기와 책 속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같이 얘기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많았다. 자신의 감정도 분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루인은, 세미나에 좀 더 충실했으면 했다. (그런데 세미나에 좀 더 충실하다는 건 어떤 걸까?) 책에서 논하고 있는 내용을 좀더 비판적으로 얘기할 수 있었으면 했다. 적어도 세미나 모임이라면.

만약 모임의 성격을 바꿔서 이렇게 서로 만나고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더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물론 알 수 없는 가정일 뿐, 상상일 뿐.

그래서 세미나 모임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여러 곳에서 이런 모임이 있었고 여러 곳에 참여했다. 그럴 때면 많은 경우, 역시 가부장제가 문제야, 젠더가 문제야, 란 식으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책을 읽으며 구조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언어를 모색하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진행하곤 했다. 하지만 “가부장제” 혹은 “젠더”가 결론이 될 수 있을까? 한동안 그렇게 믿기도 했다. “가부장제란 무엇인가”, “젠더란 무엇인가”란 시험문제에 길게도 썼던 답안들. 돌이켜보면 그때의 답안들은 “결국 가부장제가 문제고 그러니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해”라는 식의 대답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가부장제나 젠더는 이미 고정적으로 있고 그것을 어떻게 문제인 것으로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정해진 수순.

그런데 도대체 가부장제가 뭐야? 젠더는 또 무어고? 언제나 이 질문이 빠져 있었다.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가부장제나 젠더는 이미 누구나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무엇이었거나 알고 있다고 가정했다. 젠더가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던 루인도 마치 아는 척 이 단어를 남발하곤 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나중에 참여한 누군가가 물었을 때, 침묵이 흘렀다.

매 순간 이런 갈림길들이 있었다. 이것이 단계적이고 그래서 어느 것이 더 발전적인 공간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리가. 모임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끌고 갈 것인가, 어떤 공간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 것인가와 관련한 고민들이다. 이 모든 것이 공존하는 곳이면 가장 좋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수업과 같은 곳이 첫 번째 성격이면 당황스럽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문제야”란 식으로 결론이 나면 더 당황스럽다. “가부장제”나 “젠더”는 원인/결론이 아니라 설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하면서 고민 중에 있다. 소위 말하는 논문과 에세이의 구분이 안 되는 글쓰기, 경험과 이론이 구분 안 되는 글쓰기를 지향하지만 별로 그러지 않아 불만이다. 동시에 설명해야 할 내용을 원인으로, 결론으로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여 언제나 불안하다. 물론 이런 불만과 불안이 계속해서 글을 쓰고 책을 읽게 하는 힘이긴 하지만.

갈피를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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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취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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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키드님이 추천한 영화 “타인의 삶”을 읽고 싶었지만, 몸이 별로 안 좋은 상황이라 현재는 玄牝. 이 시간에 玄牝이라니! 하지만 종일 두통에 메스꺼움이 있어서 영화관에 가는 대신 玄牝으로 돌아왔다. 피곤할 일이 없는데 피곤함도 겹쳐 있다.

수강취소를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그 과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관련한 갈피를 잡고 있다. 매번 망설이고 결정하고를 반복하고 있는데, 아마 선생님(지도교수)과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결정을 못 했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일 중으로 마지막 결정을 내릴 것 같다. 여러 가지 변수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미래지만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려야지 이대로 끄는 건 좋을 것이 없다. 미련한 루인은 미려퉁이긴 하지만.

이곳에 선생님께서 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그 순간만 해도 상당히 당황했지만, 따지고 보면 잘 된 일이고, 그래서 현재 더 좋은 상황이라고 느끼고 있다. 다른 한 편, 만약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이곳에 와서 글을 읽었다면, 달라지는 건 선생님께서 [Run To 루인]에 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 외엔 없다. 그럼에도 그 순간 만큼은 상당히 크게 반응했다. 워낙 과잉반응하는 루인이니까. 하지만 아쉬운 건 더 이상 안 들어 오겠다는 선생님의 말씀.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상당히 아쉬웠다.

어쨌든 선생님과 몇 번에 걸쳐 얘기를(혹은 상담을) 하면서 여러 걱정들과 고민들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예전에 정희진선생님과 얘기를 나눌 때, 좋은 상담은 고민의 방향을 바꾸고 그 고민의 의미를 바꿔주는 것이라고 했다. 일테면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이야”라는 말에 “아냐, 트랜스젠더도 정상이야”란 식이 아니라 “그래, 정신병 맞아. 그런데 어쩌라고?”라는 식으로.(그다지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예면 의미는 전할 수 있을 듯.) 의미를 전환하면서 상대화하는 작업, 그것이 상담이라고 하셨다. INFP는 “선천적인 상담가”라고 하는데, 루인은 별로 그렇지 않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것 같다(물론 선생님의 MBTI는 모르지만). 여러 가지로 했던 많은 고민들의 가능성의 방향들을 바꿔 주셨고 그래서 다른 식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뭔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랄까. 결국 최종 결정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어차피 어떤 결정을 내려도 슬쩍 아쉬워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결국 좀 더 즐거운 몸으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떤 상황이 좀 더 즐거운 몸일까를 선택하는 일이 남았다. 사실 거의 결정했으면서도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갈등하고 있다.

루인보다 더 걱정하고 고민해주신 분들에게도 고마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