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커밍아웃 하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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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서 부모님과 (혹은 친척들과) 얘기를 나누며 종종 답답함을 느꼈다. 부모님이나 이성애혈연(부계건 모계건 상관없이)을 매개하는 친척들은 루인이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아이로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서부터 답답함이 발생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앎은 사실이기도 했다. 부모님들이 원하는 모습 혹은 알고 있는 모습 속에서 루인은 하루 종일 학교에만 있는 “범생이 원단”일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 물정은 잘 모르고(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_-;;) 아직은 철없는 학생.

그리고 부모님이 모르는 모습과 생활 속에서 루인은 실태조사기획단에서 일하기도 했고(“했고”라는 과거시제를 쓰고, 아직 활동이 끝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흑흑)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라는 트랜스젠더/성전환자 단체를 발족하고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루인이 스스로를 활동가로 부를 수 있느냐는 언제나 의심스럽고 부족함에 부끄럽지만. 어쨌거나 여성학/페미니즘 분야에선 나름 유명한 [여/성이론]이란 잡지의 2006년 겨울호에 글을 싣기도 했고(물론 그 글은 너무도 부끄러워서 이렇게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ㅠ_ㅠ) 모 주간지나 어떤 매체들에 미약하나마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얘기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저 공부만 하는 아이”라는 한 친척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속상하고 답답했다. 루인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하기도 했다. 그 내용이나 수준과는 상관없이 “유명한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고 적당히 허풍 섞인 말을 한다면 부모님은 한껏 좋아할 거란 걸 너무도 잘 알지만, 할 수가 없었다. 보여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 믿지만, 행여나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루인이 쓰는 거의 모든 글은 루인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루인의 글을 읽는 순간이 곧 커밍아웃 하는 순간이다. 루인이라는 이름 자체를 밝히기가 꺼려지기도 했고.

그동안 워낙 제멋대로에 속만 썩인 아해라서,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가장 큰 “불효”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그 완고함이 의외의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한편으론 그걸 믿기에 루인이 트랜스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당장은 화를 내거나 울거나 충격에 쓰러지거나 하시겠지만(엄마님의 현재 건강 상태를 봤을 때, 한 번 쓰러진다는 건 다시는 못 일어 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에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루인이 트랜스인 걸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도 있고, 루인 스스로 트랜스’임’을 부정하고 그냥 살겠다고 말하길 바라는 몸으로 루인이 트랜스’임’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맺어 갈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망설이고 그냥, 부모님만은 루인의 정체성들을 영원히 모르길 바라는 몸.
(석사학위 논문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두 가지 판본으로 찍을 계획도 세우고 있다. 실제 제출하고 취득할 제목과 목차의 판본과, 가족들에게 보여줄 제목과 목차를 지닌 판본으로. 그렇다면 아마 서론도 조금은 바뀌겠지. 왜냐면 원래 판본에선 서론에서부터 루인의 정체성들을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할 테니까.)

설이라는 행사를 빌미로 만난 가족 중 조카 한 명은, (어떤 명확한 정체성 범주 구분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나중에 게이로 커밍아웃할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편으론 기쁘지만 한 편으론 걱정이었다. 스스로에게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겪을 일들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왠지 루인의 사촌들 중엔, 나중에 LGBTQ 모임이라도 있다면 그런 모임에서 만날 거라는 느낌이 드는 사촌도 있다. 서로가 당황하려나? 흐흐. 엄청 재밌어하고 좋아하겠지. 후후.)

이런 감정들-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움, 친척 중엔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정체성인 사람이 없길 바라는 몸이 루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픈 걸 의미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루인의 다양한 정체성들이 특별히 자랑스러운 것도 아닌 만큼이나 특별히 부정하고픈 것도 아니다. “게이 자부심[gay pride]”과 같은 말이 혐오와 공포가 만연한 사회적인 맥락에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말은 자칫 동성애자를 특별한 존재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와는 완전히 유리된 존재로 만들 위험성 때문에 별로 안 좋아하는 표현이다(“트랜스젠더는 신을 매개하는 존재”, “트랜스젠더는 젠더와 무관한 존재”, “젠더를 횡단하는 존재”란 식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없는 만큼 부끄럽거나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루인의 친척관계 속에서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몸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이런 앞선 걱정은, 상대를 루인의 수준으로 환원해서 판단하는 것이기에 위험하단 건 ‘안다.’ 커밍아웃하지 않으며, 자신의 원하는 방식으로 여겨지는 트랜스(이럴 때 그 사람을 “트랜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가 다른 트랜스, 트랜스젠더를 향해 더 심한 혐오 발화를 하는 이유엔 이런 ‘앞선 걱정’이 있기 때문임도 ‘안다.’ 이런 고민들 속에서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 답답함은 속상함일 수도 있고, 한편으론 아직도 커밍아웃을 하기에 앞서 걱정과 두려움이 다른 한편으론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바람이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꼭 커밍아웃을 해야 할까?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루인의 정체성들을 부정하거나 숨기지도 않으면서 루인의 활동을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남의 일이지만 관심이 있어서 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하며, 예전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나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인터뷰에 대답한 사람이, 자신의 딸은 자신처럼 살지 않았으면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했다. 조금은 기대를 했기에 어떻게 논문을 썼을지 궁금하고 읽고 싶(었)다. 기회가 생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더 퀸: 파병하는 ‘진보’와 “아들”이라는 성역할

[더 퀸] 2007.02.20. 20:20, 아트레온 9관 11층 G-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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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할인이 대학생까지를 의미한다면 더 이상 학생할인을 하지 않았다. 뭔가 찔렸다. 판매하는 분은 학생증 있으면 달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대학생증을 내밀고 할인을 받았는데,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흑흑흑. 천원~~!!! ㅠ_ㅠ

스포일러가 없는 리뷰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무엇을 스포일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01
이 영화가 다이애나란 사람의 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영화가 시작하는 초반, 이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사건, 혹은 다이애나의 죽음과 관련한 얘기들 중에 루인이 아는 것은 없었다. 1997년이면 루인은 십대였고, 배철수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엘튼 존의 노래가 몇 주간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정도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어떤 정보를 떠올리려고 해도, 떠올릴 내용이 없었다. 그러다, 왜 굳이 이 영화의 내용을 실제 있었던 사건과 결부시키려고 하는지 되물었다. 이 영화를 말 그대로 하나의 허구로 간주하면 안 되나. 영국과 프랑스란 나라, 영국의 여왕과 군주제의 존재, 다이애나의 죽음 등을 모두 영화에서 창조한 영화적 허구로 간주하고 본다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일테면 “궁”이라는 드라마처럼.) 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사건으로.

그리고 깨달았다. 이 영화를 어떤 맥락과 분리시켜서 영화적인 허구로만 접근하는 순간,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꽤나 불친절하거나 엉성하다는 걸. 영화 속에서, 다이애나의 죽음에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루인은 그 죽음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한 간극을 가지고 출발하는데, 이 영화를 읽는 사람은 이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사건을 알 거라고, 영국왕실의 맥락들을 알 거라고 가정하고 그런 가정 아래 사건을 전개하지만, 이런 맥락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하나의 허구일 뿐이고(이럴 때, 영국왕실과 군주제 뿐 아니라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허구가 된다) 그럴 때 이 영화는 꽤나 재미없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런 전제에 슬쩍 화가 났다. (물론 이런 “화가 남”은 루인에게도 향해야 하는데,) 마치 자신들이 하는 말의 맥락을 당연히 알 거라는 전제가 가지는 오만함 때문이다. 그 오만함은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가지는 오만함이고.

02
이 영화의 맥락을 영화적 허구로만 가정하지 않고 루인의 접하고 있는 현실에 토대를 두고 읽는다면, 토니 블레어가 “진보” 정당이라는 사실에 당황했다. 루인이 알고 있는 토니 블레어는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에 파병한, 파병을 주장한 사람, “부시의 친구” 혹은 조지 마이클이 “부시의 개”[이런 묘사는 반드시 블레어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개에 대한 모독이다]로 묘사한 뮤직 비디오 속의 모습과 같은 것들이다.

처음으로 총리로 당선될 당시엔 “진보”였을 지 몰라도, 루인이 접하기 시작한 지금의 모습에선, 잘 모르겠다. 저항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침략으로서의 전쟁에 참여하는 걸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선입견으로 이 영화를 접할 때, 두드러지게 다가오는 모습은 인기를 위해 어떻게 연설문을 기획하고 언론을 이용하는가 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의 당수이자 “가장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평가 받는 블레어가 집에선 음식준비를 하지 않고 부인이 음식을 차려주길 기다리는 모습이다. 무엇이 “진보”인가, 라는 진부하지만 언제나 유효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수밖에 없다.

03
이 영화의 재미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여왕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는 그것만으로도 볼만 한데, 헬렌 미렌의 연기가 이 영화를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한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연기력에 덧붙여, 이 영화의 재미는 여왕과 총리의 관계에 있다.

영화 중간 즈음에 가면, 블레어의 부인은 블레어에게 블레어의 죽은 엄마와 관련한 얘기를 한다. 여왕과 동년배이고 성격도 비슷하다고. 그래서 여왕을 감싸도 도느냐고.

여왕과 총리인 둘의 관계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여왕과 총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블레어 부인의 말처럼, 하지만 블레어 부인의 말과는 달리 토니 블레어는 여왕을 엄마처럼 여겨서 지지하거나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왕과 엄마를 동일시 한 것이다. 여왕과 총리 사이의 긴장관계 혹은 적대관계는 어느 순간 총리가 여왕을 지키려는 관계로 바뀌는데, 이 장면에서 블레어의 역할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성역할을 떠오르게 한다. 싸움터에 나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엄마와 누나/동생을 지키거라”는 말을 할 때,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서구의 아들역할. 블레어의 역할은 어느 순간 이렇게 바뀌고, 여왕을 부르는 호칭 맘(Mom)은 어느 순간 엄마를 부르는 호칭 맘(mom)의 뉘앙스로 바뀐다. 영화 말미에 여왕을 알현하는 장면에서 블레어의 모습은 엄마에게 칭찬 받고 싶어서 설레어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여왕과 총리의 관계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바뀐다. 어떤 경우에도 군주제를 폐지할 수는 없다는 블레어의 말이, 군주제 자체가 아니라 엄마-여왕(Mom)을 (또 한 번)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으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왜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노란 손 + 세월 속에 변하는 부모’님’

어제 낮, 지도교수를 만났다가, 피부가 하얗다고, 예전에 노랗던 피부가 좋아졌다는 말을 했다. 부산에 갔다 와서 그런가 보다고 답했다. 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루인의 생활은, 자고, 밥 먹고, 놀고, 밥 먹고, 놀고의 반복이었으니까. 정말 영화와 잠깐 잠깐의 장보러 간 것 외에는 종일 집에서 뒹굴었는데 피부가 안 좋아 질 수가 있으랴…. 케케.

부산에서, 장보러 갔다가 은행에 들려 잠시 머물던 사이 엄마님(요즘 ○○님이란 식의 표현을 통해 고정되지 않은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은 루인의 손을 보더니, 노랗다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엄마님이 몇 해 전에 그랬다며 걱정해서 무슨 이유에서냐고 물으니, 손이 노라면 영양실조의 징후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말에, 무슨 소리냐고 말도 안 된다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채식을 하면 영양실조에 걸린다는 식의 말들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엄마님의 이런 말은 루인의 채식을 문제 삼는 발언으로 넘어 갈까봐 언제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었다. (채식을 해서가 아니라 채식을 하건 채식을 안 하건 상관없이 음식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누구나 영양실조에 걸린다. 그리고 채식이 건강에 더 좋다, 몸에 더 좋다는 말은 채식을 하면 영양이 부족하다, 영양실조에 걸리기 쉽다란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번엔 그저 수긍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영양실조라는 것이,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상태, 그리하여 몸에 영양분이라곤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영양분이 하나만 부족해도 의학에선 영양실조로 판정한다는 얘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다른 영양분은 다 충분한데 철분이나 캴슘과 같은 특정 영양소 하나가 부족해도 영양실조로 판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이유로 부산에 간 것이기도 하다. 몸의 위태로움이, 다른 이유들과 겹치면서, 부산에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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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두 번 이성애혈연가족의 부모를 만나며 느끼는 건, 세월 속에서 변하는 모습이었다. 그토록 완강하기만 그분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루인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ps는 무슨 말 속에 “네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이라는 전제를 붙이기 시작했고, 아빠님은 “언젠간 결혼 할 것 아니냐”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정년퇴임 이전에 결혼하라고 다그치기만 했는데, 이젠 루인이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걸 조금씩은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물론 여전히 루인이 결혼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이런 과정에서 여전히 “그래도 언젠간 결혼을 하겠지”라는 바람을 놓지 않고 싶어 하는 모습. 조금은 슬펐다.

그리고 이런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더 이상 신경질만 내지 않는 루인을 깨달았다. 예전 같으면 결혼 이야기만 나와도 신경질과 짜증이었는데, 지금에 와선, 헤헤거리며 씽긋이 웃기만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말들에 더 이상 짜증으로만 대처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죄송한 몸이기도 했다. “평범”하게 사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지만 “평범”함을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 속에서 루인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걸 깨달으며 죄송했다. 어쩌면 영원히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것이 루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인지도 모르겠다는 몸앓이를 했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음이 마냥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