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牝에서..: 지난 일정, 논문

무수한 상념들이 몸을 타고 놀았다. 그러며, “그래, 이건 [Run To 루인]에 쓰면 좋겠어”라고 중얼거렸지만, 그곳엔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었다. 인터넷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는 일주일.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하고 싶은 말들이 몸속에 가라앉았다.

5통의 전화가 왔다. 한 통은 행정조교 업무와 관련한 내용이고, 한 통은 같은 과 사람의 (루인이 조교라는 위치와 관련한) 전화였다. 한 통은 집주인이 인터파크에서 표가 왔다며 언제 오느냐는 내용이었고 한 통은 택배회사에서 집에 있느냐는 전화였다(그 사람은 새로 바뀐 사람인 듯 했다). 그리고 한 통은 소중한 친구의 전화였다.

10통의 문자가 왔다. 활동과 관련한 문자가 있었고 새해 인사를 담은 문자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뮤즈티켓이 도착할 거라고, 루인보다 더 걱정해주신 ㄷㄴㅈㅅ님 문자엔 다시 한 번 고마움을!

gmail엔 활동 관련 메일이 한 통 있고, 파란메일엔 HRnet으로 온 메일과 필요해서 받고 있는 정보메일이 쌓여있다. 그러니 당장 답장을 해야만 하는 메일은 없다.

일주일 동안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메일은 언제나와 마찬가지였고, 전화도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메일을 통해 아주 급한 내용이 있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없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아니지만 핸드폰이 없을 때에도 인터넷이 없을 때에도 잘 살았는걸. 그땐 그때 상황에 맞게 살았고, 지금은 핸드폰과 인터넷이 있는 상황에 적응한 몸으로 살고 있을 뿐이고, 지난 일주일은 단지 인터넷이 없는 상황에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루인의 몸은 언제나 [Run To 루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저런 글을 쓰고 싶다고, 메모지에 적기도 했고, 다이어리엔 좀 더 많은 일기를 썼다.

편지도 많이 썼다. 보내지도 않을 보낼 수도 없는 편지들. 몸에 쓰고 몸에서 지우고 만 편지들. 그렇게 지워버린 언어들은 결국 언젠가 몸에 합체해선 우울증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문자로 나타나지 않는 편지들을 썼다. 이대로 어느 날 죽는다면, 누구도 그 존재를 알 수 없을 편지들. 편지를 쓴 사람조차 다음 날이면 잊어버릴 편지들.

Eels의 [Electro-Shock Blues]를 많이도 들었다. 자주 듣는 앨범은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 있는 경우이다. 앨범 자체가 좋아도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 없다면 자주 안 듣게 되는데, 부산에서 “Climbing To The Moon”이란 곡에 반했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자주 안 듣는 이 앨범이 자주 듣는 앨범 목록에 올랐다. 아울러 “Dead Of Winter”도 반한 곡. 이승환의 [Hwantastic]도 자주 들었다. 특히 좋아한 곡은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와 “울다”. 하지만 어떤 앨범에서 타이틀곡을 유난히 좋아하는 경우가 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앨범에 좋은 평가를 하기 힘들다. (이것이 루인이 앨범을 판단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논문은 9편을 읽었다. 월요일부터 월요일까지 8일 중, 내려가는 날, 어제, 오늘 빼면 5일이니, 적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서 꼭 읽겠다고 한 글은 읽지 않았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며 챙겨간 논문들인데, 아주 놀지는 않은 모양이다. 부산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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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경, “어떻게 우리는 여자, 혹은 남자인가?”, [한국여성학] 제18권 2호(2000)
Patricia Elliot and Katrina Roen, “Transgenderism and the Question of Embodiment”, GLQ 4:2 (1998)
Henry S. Rubin, “Phenomenology as Method in Trans Studies”, GLQ 4:2 (1998)
Joshua Gamson, “Must Identity Movement Self-destruct? A Queer Dilemma”, Social Problems vol.42 no.3 (Aug. 1995)
Daniel Nourry & Nikki Sullivan, “BODILY (Trans)Formations”, Scan vol 1 number 3 november 2004
Nikki Sullivan, “‘It’s as plain as the nose on his face’: Michael Jackson, modificatory practices, and the question of ethics”, Scan vol 1 number 3 november 2004
Nikki Sullivan, “Integrity, Mayhem, and the Question of Self-demand Amputation”, Continuum: Journal of Media & Cultural Studies Sep2005, Vol. 19 Issue 3 (2005)
Nikki Sullivan, “Somatechnics, or, The Social Inscription of Bodies and Selves”, Australian Feminist Studies Nov 2005, Vol. 20 Issue 48 (2005)
Nicole Anderson and Nikki Sullivan, “Technological Interventions”, Scan vol 3 number 3 decembe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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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고 간 부산이지만, 그래서 더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읽고, 최근의 관심사를 정리하다가 당혹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위에 적은 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 뿐 아니라 최근의 관심사를 잘 엮어서 논문을 쓴다면, 참고문헌의 최소한 절반은 1997년 이후에 나온 것으로 채워질 거란 것이었다. 이 정도는 다행이고 아무리 못해도 1/3 이상은 2000년 이후에 나온 글들이다. (이건 일종의 ‘컴플렉스’이다.)

물론 “트랜스젠더”가 2006년 한국의 최고 인기검색어 중 하나이자 히트상품이긴 하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논의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논문을 쓴다면, 꽤나 위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탁월하게 잘 쓰지 않는 이상, 잘 써봐야 “새롭다”는 얘길 들을 테고, 조금만 엉성해도 “최신 유행 따라 하느냐”는 비판에 직면하기 쉽다는 걸. 이런 짐작을 한 건, 솔직하게, 루인이 아주 빈약한 토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자격지심에서 발생한 짐작이기도 하다. 철학사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서, 그렇다고 수학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쓴다면, 다른 누군가 지적하기도 전에 엉성함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릴 게 뻔하다. 다행히 루인의 지도교수 역시 이런 점에서 정확하기에 루인의 취약함 혹은 엉성함을 언제나 정확하게 지적해주고 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엉성한 글을 쓰려고 안달이지만, 걱정이다.

요즘의 걱정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엉성하지 않게, 탄탄한 토대에서 글쓰기. 고민 중에 있는 글쓰기. 겉멋 들지 않은 글쓰기.

[영화] 록키 발보아: 불을 품고 있는, 기회

[록키 발보아] 2007.02.14.수.17:35 롯데시네마 사상7, 3관 H-12

※”스포일러 주의”라는 말이 무색함…
01
갑자원에 출전하지 못한 히데오는, 갑자원에 출전하는 히로에게 우승하고 돌아오라는 말을 한다. 우승하면 우승했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과 함께. 히로는 히로따의 경기를 TV화면을 통해 보며, 진 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걸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

02
[록키 발보아]와 관련한 기사가 잡지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냥 읽고 싶었다. 애초 이 영화는 읽고 싶은 영화목록에 올라와 있지 않았다. 영화를 읽기 전에는 영화를 아직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화를 읽고 나면, 영화를 이미 읽었다는 이유로 영화와 관련한 기사나 평을 잘 안 읽는 편이다. 그렇기에 영화와 관련한 특집기사를 읽는 건, 루인으로선 드문 일이다. 그렇게 읽은 기사 중, 30살까지 자신을 루저로 알았다는 스탤론의 얘기에 이 영화를 읽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다.

아마 이 영화는 지금까지 읽은 영화 중, 사전 정보가 가장 많은 영화이지 않을까 싶다. 이후, [록키 발보아]와 관련한 기사가 나오기만 하면 다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몇 편 안 되지만.) 하지만 이 영화는 사전 정보가 많아도 별 상관없는 영화이다.

03
영화관에 가는 날, 몸 상태는 꽤나 안 좋았다. 부산에 가기 전 평소 사용하는 비염약이 있음에도 별도로 구매했을 정도로, 부산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면 어김없이 심한 비염으로 골골대기 때문이다. 콧물이 줄줄 흘렀지만 영화관에 가고 싶었다. 아침부터 영화관에 가야겠다고 다짐한 몸이었으니 비염이라고 안 갈 수는 없었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많이 망설였다. 괜찮은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좋았다. 영화관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상영작도 모르고 몇 시에 하는 지도 모르는 몸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좋았다. 서울이었다면 인터넷으로 상영시간을 확인한 후, 약간의 여유 시간을 두고 출발해서 영화관에 가곤 했다. 언제나 시간에 강박적이고 그래서 예상치 않게 남는 시간을 별로 안 좋아하는 루인이기에(그래서 가방엔 읽을거리를 꼭 챙긴다) 영화시간 조차 모르는 상태로 출발한다는 건, 부산이었기에 가능했다. 부산의 집은 컴퓨터는 있지만 ‘장식품’이고 인터넷도 안 되는 공간이기에 영화관의 정확한 위치도 몰랐고 상영시간은커녕 개봉작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출발이었다. 콧물은 자꾸 나오고 머리는 지끈 했지만, 아무렴 어때. 개봉작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읽고 싶은 영화가 많은 상황이고 그 중 한 편 정도는 개봉하지 않겠느냐는 확신이 있기도 했다.

이런 확신과는 상관없이 이런 여유가 좋았다. 개봉 시간이 애매하게들 남아서 많이 기다린다 해도 상관없다는 여유. 이것이 좋았다. 다행인지 영화는 얼마 안 기다려서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좌석에 앉고 영상이 나오자마자 쌍코피라도 터진 사람처럼 화장지로 코를 막긴 했지만. (아아, 이미지 관리 안 돼-_-;;;) 아님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읽는 내내 신경에 거슬릴 테니까. 물론 극장엔 단 4명이었다. 조조로 상영했던 [아귀레, 신의 분노]도 6~7명 정도는 되었다고 기억하는데, 대형개봉관에서 4명이라니! 후후후. 좋았어!

04
불을 품고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것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물론, 그것이 혐오/공포범죄를 비롯한 폭력이라면 달라지지만). 몸에 불을 품고 사는 사람. 그리고 그 불을 점화하고 피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뻔한 구성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불을 품고(록키는 “야수”라고 표현한다) 그 불을 점화하고 태우는 열정을 읽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이 영화가 좋았다. 내용 구성이야 너무 뻔하기 때문에 몇 년 뒤 명절 특집 TV방송용 영화로 읽어도 무방하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런 감정은 비염으로 몸 상태는 흐리멍덩했고 사람이 단 네 명이라는 사실이 너무너무 좋아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이 글엔 이 영화의 내용 일부를 적고 있으니 스포일러 주의하세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뻔한 구성이고, 그런 구성에 감동하기엔 너무도 영악한 몸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영화 한 편정도 있는 것도 괜찮다고 몸앓았다. 아니다. 이런 영화가 있어서 좋았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뻔한’ 말에(하지만 이 ‘뻔함’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동한 것이 아니다. 혹은,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성취할 수 있다는 식의, 자본주의세뇌에 감동받은 것도 아니다.

몸에 품고 있는 불을 점화하려는 그 열정이 좋았다. 왜냐면 불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불을 점화하기 보다는 여건을 탓하며 아무 것도 안 하려는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났기 때문이다. 루인 역시 이런 사람 중의 한 명이고, 그래서 이 영화를 읽으며 부끄러웠다.

05
서른까지 줄곧 루저(패배자)로 살았고, 스스로가 루저라고 여겼고, 단 한 번 성공하고 그 성공의 덫에 걸려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던 인생. 그 인생이 몸에 닿았다. 그런 인생을 산 사람이 그 인생을 영화에 담았고, 그래서 모두가 말렸던 영화를 만들었고 그 영화가, 말리던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며 성공하고 있다. 영화를 제작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제작 소식에 비웃음을 보내는데, 이 장면은 록키가 60세의 나이로 시범경기를 할 때 아나운서들의 멘트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왜 “시범”exhibition경기냐고 묻는 말에 “처형”execution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하지 않으냐고 답하는 식이다.) 그리고 경기가 끝났을 때, 아나운서들이 더 이상 록키를 조롱하지 않았듯,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관객도 평론가도 더 이상 이 영화를 비웃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호의를 베푸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는 부분이었다.

06
얼마 전에 인생엔 언제나 선택과 포기가 있고 얻는 게 있으면 얻는 것으로 인한 잃는 것도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지금은 이 말을 의심한다.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잃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양자택일로만 해석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게끔 하는 것은 아닌지. 지금의 기회만이 인생의 유일한 기회로 인식하도록 배운 것은 아닌지.

누구나 선택과 포기의 기로에 서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협상할 따름이다. 인생엔 단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도 웃긴다. 오늘 선택하지 않아도 언젠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죽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지금의 선택은 현재 상황에서 ‘최선’이고 그러니 다른 선택지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치 지금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 그래서 선택하지 않으면 포기한 것처럼 얘기하는 것, 선택 아니면 포기라는 식의 이분법 틀에서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것은 누구이고 누구의 언어인가.

[록키 발보아]를 읽으며 이런 몸앓이를 했다.

루인은 중고등학교 때까지 영어 공부를 ‘안’ 했는데, 이것이 영어를 포기했다거나(물론 농담으로 “포기”했다고 표현하지만) 그 시절에 배우는 내용과 만날 기회를 잃은 건 아니다. 다만 영어와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몸이 되길 기다렸을 뿐이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토익이나 토플이 아닌 그저 읽고 싶은 책들과 글들이 영어뿐이라는 이유로, 그 읽고 싶음이 너무도 절실해서 몸을 가득 채웠을 때에야 비로소 영어를 읽기 시작했고 영어문법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이 기다림을, 더 즐거운 몸으로 놀 수 있기 위한 준비의 시간을 포기 혹은 기회상실, 잃음으로 간주하는 건 제도교육의 판단방식이고 제도교육의 잣대로 평가하는 언어일 뿐이다. 이제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때, 영어시간에 다른 책을 읽은 건, 그런 식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영어와 신나게 놀 수 있는 몸의 시간을 기다린 것뿐이라고. 누구에게나 그 무언가와 즐겁게 놀 수 있는 몸의 시간이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그런 몸이라고 느낀다면 꼭 잡으라고. 그로 인해 다른 무언가를 선택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과 (더 즐거운 몸으로)놀 수 있는 기회는 언젠가 꼭 돌아온다고.

떠남의 준비

두통약과 비염약을 샀다. 물품 목록을 적고 오늘 오후엔 서울역에 갔다 왔다. 부산에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일주일 정도 부산에 머물기로 했다. 무려 일주일.

작년 추석이 끝나고 서울 오는 길에 다짐했다. 다음 설엔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부산에 가지 않겠노라고. 그러면 다음 추석은 논문을 핑계로 가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부산에 가지 않고 지낼 수 있겠구나, 했다. 그리고 사전 준비도 좋아서, 작년 말 즈음부터 설에 못 내려 갈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일정이 있어서 못 갈 수도 있다는 핑계들.

1월이 끝나고 2월이 들어섰을 때도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갔다 오기로 했다. 그것도 무려 일주일이나.

쉬고 싶다는 바람이 몸을 채우고 있다. 쉬고 싶다고?

부산에, 이성애혈연가족들이 사는 곳에 가면 쉰다고 하기엔 스트레스만 잔뜩 받아 오기 마련이다. 졸업 후의 일부터 결혼, 돈벌이 등등은 기본이고 루인의 머리스타일부터 매니큐어나 각종 표현방식들 까지 모든 것이 간섭의 대상이고 그러다보면 스트레스가 넘치기 시작해선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다고, 속으로 외치곤 한다. 그래서 이번 설에 내려간다면, 설 전날인 토요일 밤 늦게 내려가서 일요일 설을 지낸 다음, 월요일에 올라오는 걸로 할까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예정된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내려가서 쉬기로 했다. 루인에게 쉰다는 건, 그저 하루 종일 씻지 않고 이불 속에 뒹굴며 지낼 수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그러며 책이나 글과 놀고 싶었다. 서울에 머문다고 해서 책이나 글과 놀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몸과 부산에서의 몸은 너무도 다르다.

하루 종일 서울의 연구실에 머물면 책을 읽다가 종종 업무를 처리하기도 하고 인터넷과 놀기도 하고 그런다. 하루 종일 부산의 방에 머물 때면, 그저 하루 종일 책이나 글과 논다. 쉬고 싶을 땐 그냥 멍하니 있어도 상관없다. 인터넷도 없고 컴퓨터도 없다(피시방엔 안 가니까). 그러니 그저 여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20년 가량을 산 곳이지만, 부산엔 만날 친구도 없고 그래서 약속이란 것도 없다. 서울에 있다고 해서 딱히 약속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부산에 머물면 누군가를 만날 가능성 자체가 없다. 이런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긴장해 있는 몸을 좀 풀어 주고 싶다. 하루 종일 긴장 상태에 살고 있는 몸을 풀어 주고 그렇게 느슨해진 몸을 느끼고 싶었다. 예정된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해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긴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적어도 지금의 스트레스에서 만큼은 벗어나고 싶었다. 이 지독한 우울증에서 좀 벗어 나고 싶었고. 몸과 하나인 우울증이 부산에 간다고 덜하겠느냐만은, 경험 상 안다. 우울하다고 해도 그 정도가 달라짐을. 그 느낌이 달라짐을.

그래서 부산에 일주일 정도 갔다 오기로 다짐했다. 오늘 간다.

#만화 [20세기 소년]을 읽다보면 켄지의 음악을 트는 디제이가 나온다. 가수도 없고 듣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주구장창 같은 음악만 틀고 있는 디제이. “디제이는 없어도 음악은 흐른다”란 말을 쓸 때마다 그 디제이가 떠오른다. 정말, 디제이는 없어도 음악은 흐를까? 어쩌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