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어려움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이 두 용어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인 루인은, 글을 쓸 때마다 이 두 용어 중 적어도 하나 정도는 거의 항상 사용하기 마련이다.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는 하리수를 매개하여 상상하기 마련이라, 그렇게 어려운 의미로 여기진 않은 듯 하다. 하리수의 등장은 트랜스젠더라는 용어를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했고, 자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던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들에게 자신을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트랜스젠더는 곧 하리수”라는 한계를 만들기도 했다. 모든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가 호르몬투여나 수술을 하는 건 아니지만 수술 혹은 최소한 호르몬투여는 해야 “진짜 트랜스젠더”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기준을 만든 것이다. 물론 하리수가 이것을 의도한 건 아니며, 하리수와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이다.

루인은 글을 쓸 때마다 젠더, 성별이분법, 성별, 섹슈얼리티와 같은 용어들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트랜스젠더라는 용어는 익숙해도 젠더와 같은 용어들은 그렇게 익숙한 용어들이 아니다. 이는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위상수학을 모를 가능성만큼이나 당연하다(수학 전공자도 잘 모르는데;;;). 젠더와 같은 말들은 여성학, 페미니즘 혹은 젠더스터디를 배우지 않는다면 평생 모른 체 살아갈 수 있는 용어들이고, 사실 이런 말을 모른다고 해서 삶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글을 쓸 때마다 젠더 혹은 성별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루인은 “남녀”나 “여남”과 같은 용어들은 별로 안 좋아하고, 종종 부적절할 수 있는 용어/언어로 여긴다.) 그리고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설명하는 글이나 작가야 말로 정말 똑똑하다고 느낀다. 지적 컴플렉스가 심한 루인은 글이나 말을 통해 루인의 무식이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떠는 편인데, 그래서 소위 “어려운 용어”라고 불리는 단어들을 사용하길 꺼린다.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는 건 자신의 똑똑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무식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안절부절 못하는 셈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루인의 글과 말은 언제나 소통 불능의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루인은 루인이 아는 건 상대방도 당연히 알 거라고 믿고 루인이 사용하는 맥락 정도는 상대방이 당연히 짐작할 거라고 여긴다. 루인이 가장 무식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건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말도 안 되는 가정임을 알면서도 항상 이렇게 가정하고 얘기를 한다.

몇 달 이상, 정기적으로 루인을 만나며 루인의 언어 습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루인이 어떤 낯선 자리에서 인터뷰나 그 무엇을 하러 갈 때면, 농담처럼 “어렵게 말하지 말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그러면 루인은 슬쩍 부아가 치미는데, 이는 “왜 상대방을 무시하나”라는 몸앓이 때문이다. 루인이 어렵게 말하지도 않거니와 상대방은 당연히 루인이 아는 정도의 앎은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은 만나는 자리에 도착하고 얘기를 시작하는 순간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음을 깨닫는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루인은 두 가지 갈등을 하는데, 루인은 말과 글을 어렵게 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렵다고 얘기하는 언어나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갈등은 지식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말을 배배꼬아서 사용하는 것과 익숙하지 않던 언어와 상상력으로 얘기를 하기에 발생하는 것은 다르다는 식으로 풀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지금의 고민은 지금까지의 인식과는 달라서 “어렵다”고 여길 법한 내용을 어떻게 “쉽게” 소통할 것인가, 이다.

언제 즈음, ‘쉽게’ 말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영화] 아포칼립토

[아포칼립토] 2007.02.11. 09:40, 아트레온 8관 11층 F-5

01
영화가 끝났을 때 떠오른 건, 2003년에 개봉한 영화 [아타나주아]였다. 그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의 하나는-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한데- 하얀 얼음 위를 달리는 장면이다. [아포칼립토] 역시 달리는 장면이 참 오래도 나온다. 살기 위해서. 잡히면 죽기 때문에 달리지 않을 수 없기도 하고, 죽을 힘을 다해 달리지 않으면 죽을 위기에 있는 가족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이지 영화를 읽는 사람이 숨찰 정도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뛰고 또 뛴다. 러닝타임이 137분이라는데 후반부의 30~40분은 달리는 것으로 채워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02
마야 문명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욕을 먹는 것 같다. 일테면 마야 문명과 아즈텍 문명, 잉카 문명을 전공한 사람은, 이 영화가 역사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서구의 시선으로 비서구를 야만으로 만드는 전형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칭찬도 하던데.

이 영화를 읽겠다고 했을 때 루인의 의도는 이런 논의들을 루인의 입장으로 읽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끝났을 때, 루인이 가진 인상은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한 장면이었다.

[먼 황금 나라]라는 아동용 소설이 있다. 실제 아동용인지 아동용으로 개작해서 번역한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책을 루인은 참 좋아했는데, 소설 자체의 재미와 함께 마야 문명을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루인에겐 마야문명, 잉카문명, 아즈텍문명에 대한 환상이 있다. “환상”이기 때문에 이들이 얼마나, 어떻게 다르고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는 모른다. ;;; 궁색한 변명이지만, 나름 설득력 있다고 우긴다 -_-;;; 흐흐) 이 소설은 마야 문명이 스페인군대에 침략 받기 전의 시기부터 스페인침략 시기를 다루고 있다.

몰랐는데,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나 영화 혹은 작품은 [먼 황금 나라] 한 편이 아니었다. 마야문명을 다루고 있는 작품의 상당수는 이 시기를 다루고 있었다. 일테면 [아귀레, 신의 분노]가 그렇다.

그래서 떠오른 건, 도대체 서구 백인들이 이 시기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였다. 이런 침략 시기를 그리워 하는 것인지, 그나마 서유럽에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시기이기에 그런 것인지..

[아포칼립토]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영화 말미에 가면, 스페인군대가 상륙하려는 장면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시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시기에 그토록 많은 집착을 보이는 걸까, 궁금했다.

03
사실,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까지 다 올라갔을 때(디지털돌비 상표 등등;;;;)에도 이 영화와 관련해선 별로 할 말이 없겠다 싶었다. 폭력을 다루고 싶었다면 굳이 마야문명이 아니라 서유럽의 제국주의 침략이나 다른 전쟁을 다뤄도 될 일이었다. “야만”을 다루고 싶었다면 역시나 서유럽이나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며 하는 일을 소재로 삼아도 될 일이다(일테면 [로드 오브 워]처럼).

왜 굳이 그 시기의 그 공간을 다뤄야 했을까?

혹은 마야문명이 망한 건 스페인침략 때문이 아니라 마야문명 내부의 문제 때문이라는 얘길 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를 시작하며 인용구절에는, 위대한 문명은 침략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망한다, 는 내용이 나온다. 스페인이 침략하지 않았어도, 서유럽이 침략하지 않았어도 마야문명은 망할 거였는데, 때마침 그 시기에 스페인이 침략했다는 식으로도 해석할 여지를 준다. 그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두서 없이, 이런 저런 의문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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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 Nikki Sullivan – Queer Material(ities): Lyotard, Language and the Libidinal Body

멋진, 그래서 몸을 움직이게 하는 글을 읽는다는 건 무덤을 파는 일이다. 멋진 글은 언제나 몸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잠도 잊게 하지만, 그 글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다른 글을 찾고 저자가 참고한 글이나 책을 찾기 마련. 그러다보면 어느 새, 읽고 싶어서 읽어야만 하는 글이나 책이 10편/권은 더 늘어나 있다. 이렇게 찾을 때는 마냥 좋고 행복하지만, 시간의 압박, 제한된 시간을 깨닫는 순간, 비명은 행복이 아니라 ‘또 무덤을 팠다’는 자책으로 의미를 바꾼다.

루인은 남들 보다 많이 느리다. 남들 한 시간이면 읽는다는 책을 두세 시간은 걸리고, 서너 시간이면 읽는다는 글은 종종 하루 종일 읽고 있다. 그래서 남들과 같은 시간을 투자하면 언제나 남들보다 뒤쳐진다. 남들보다 두세 배 더 해야 간신히 같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고, 경쟁심이 발동하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

천재를 질투하던 시기엔 이런 루인이 싫었다. 천재가 부럽고 루인도 천재이고 싶었다. 하지만, 천재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천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자신을 싫어했고, 열등감도 심하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강하지만(이 글 참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이것이 더욱더 분발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영원히 인정받지 못 할 수도 있다. 일테면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한, 루인이 무슨 글을 쓰건, 무슨 활동을 하건, 부모님께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생일 때는 학점만이 유일한 지표가 되는데, 루인은 학점도 별로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루인은 재능도 없으면서 그저 비싼 등록금만 지불하고 있는 무능한 인간일 때가 많다. 뭐, 이 말이 아주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직접 듣고 유쾌할 수는 없다 -_-;;)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자리에서 오래 머무는 건 잘 한다. 남들보다 오래 걸리는 만큼 오래 머물 수는 있다. 남들보다 두세 배는 오래 걸리는 만큼, 그 정도 시간을 한 곳에 머무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다. 그렇게 간신히 따라간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어제, 멋진 글 한 편을 읽으면서 신나고 좋았다. 그러면서 또 무덤을 파고 있는 루인을 깨달았다. 저자의 다른 글은 이미 읽겠다고 찾아둔 상태였지만, 저자가 참고한 다른 글들을 찾아서 읽고 싶은 욕심이 몸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책을 사거나 제본을 하거나, 그러겠지. 그런데 읽을 시간이 없다(평생이라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논문을 쓸 때까지는 시간 개념으로). 루인이 책을 빨리 읽거나 영어를 잘 한다면 읽고 싶은 거 다 읽을 수 있겠지만, 책 읽는 시간도 늦고 영어도 잘 못한다. 그저 남들보다 시간을 더 들일 뿐. 그 뿐이다. 그래도 이런 건 잘 하니까 아직은 멋진 글을 만나는 것도 즐겁다. 평생 만나고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