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정치적 올바름

#
가끔, “저의 말이 당신[루인]에게 상처가 될까봐 질문하기가 조심스러워요”, 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말에 대한 루인의 반응은, 이 글을 읽고 있을 분들의 상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참 착하다. 루인은 범생이라니까… 😛

그러니까, 그런 말에 대한 루인의 반응은 간단하다. “루인이 상처 받을까봐 걱정인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으로 인해 자신이 가해자가 될까봐 걱정인 것 아닌가요?”

누구도 대화를 시도하기 전까진 그 말이 상처가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상처가 되면 또 어때.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너무도 과잉 반응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엔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왜들 그리 상처를 주고받는 일에 강박적인지.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과정 이후, 이와 관련한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는 것, 그것이 더 문제라고 느낀다. 질문자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질문을 받은 사람은 왜 그것이 상처인지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없을 때 상처가 되지 어떤 말을 했다고 무조건 상처가 된다고 느끼진 않는다.

#
그러니까, “정치적인 올바름”이란 말은 언어가 아니라고 예전에 많이 적었는데, 최근의 고민을 살짝 덧붙이면.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건, 상대방의 입장에 따른 “정치적인 올바름”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판단하는 “정치적인 올바름”이다. 즉 자신의 입장에서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올바름”을 결정한다. 그러니 “정치적인 올바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화의 과정에서 그다지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질문하는 사람은 그것이 “정치적인 올바른” 질문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에겐 폭력일 수 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 같아 질문하지 않은 것이 너무도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

결론은 같다. 뭐든 질문을 던지는 대신 그런 질문을 통해 대화를 하는 것. 어떤 사람이 동성애 혐오 발화를 하건 트랜스혐오 발화를 하건,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는지 그 맥락을 듣고 싶다. 사과가 전부는 아니다.

연애를 둘러싼 상념들

최근 술자리나 어떤 모임 자리를 통해 유난히 연애와 관련한 주제로 얘기를 많이 나누고 있다. 물론 루인의 경우 주로 듣기만 하는 입장이지만, 내년 1월 15일 마감인 논문의 주제도 연애다. 흐흐. 정확하게는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성의 관계”이지만.

며칠 전 참석했던 한 술자리에선 갑작스레 이상형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적잖아 당황하며 아무 말도 못하다가 그냥 없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굳이 따지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땐 떠오르지 않았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이미지가 굳어질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이상형이 있긴 있다. 얘기를 나누다보면 변태하는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사람. 루인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인데, 문제는 얘기를 나누며 변태할 수 있는 사람은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평생 친구로 삼고 싶어 하기에 연애가 성립하지 않는다. 쿠쿠. 결국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다만 이상형은 아니고 조건이 있을 따름인데, 주지하다시피 루인과 같은 채식주의자(vegan)여야 한다. 언젠가 장난삼아 쓴 글에서도 밝혔듯, ‘하늘이 점지한 인연’이라도 채식주의자가 아니면 헤어지겠다는 것이 루인의 입장일 정도로 완고하다. 관련해서 별로 안 좋은 기억이 몸에 남아 있기 때문.

왜 연애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다른 땐 못해도 이럴 때만은 주제 파악은 한다”고 대답하곤 한다. 이런 식의 대답은 상당히 복잡한데 자칫 정체성과 관련해서 자기혐오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누가 루인 같은 인간을 좋아하겠어요?”라고 대답한다. 사실이잖아. 후후후. 주제 파악은 하고 산다니까. -_-v

“주제 파악은 한다”는 말이 복잡한 이유는, 못 생겼다, 가난하다, 무식하다 등의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결혼 조건에 기준을 두고 있어서만은 아니다(듀오가 문제라니깐!). 이런 이유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론 그저 이런 표현이 그럴 듯 했다. 왠지 설득력 있잖아. 후후.

하지만 근래에 들어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 지점은, 어제 인용한 헨리 루빈의 글 처럼 트랜스라는 위치 때문이다. (비슷한 글을 적은 것 같은데 못 찾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래서 그 사람에게 고백하려할 때, 루인은 루인이 트랜스임을 밝혀야 함과 동시에 ‘레즈비언’이면서 퀴어(queer)임도 밝혀야 한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한다. 일부 트랜스에게 동성애 혐오가 있는 만큼이나 일부 동성애자들에게도 트랜스혐오가 존재한다. 그래서 트랜스레즈비언이나 트랜스게이의 존재는 레즈비언 공동체나 게이 공동체에서, 그리고 트랜스젠더 공동체에서도 그렇게 수월한 건 아니다. 그런데 트랜스레즈비언이나 트랜스게이, 트랜스퀴어가 좋아하는 사람이 완고한 ‘이성애’자라고 자신을 믿고 있고 트랜스혐오와 동성애혐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트랜스혐오와 동성애혐오가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부딪히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가 없는데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어때서”와 같은 평소의 반응은 루인에게 ‘쿨’하게만 보일 뿐 자신을 성찰하는 것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그게 어때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커밍아웃을 한다면?” 혹은 “당신에게 고백한다면?”이란 질문을 던지는 순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멈칫하며 ‘그건 싫어’라는 표정을 짓곤 한다. 이런 반응을, “난 이성애자야”라는 이유로만 합리화할 수 없는데, “난 이성애자라서 그건 싫어”라는 반응은, 어떤 의미에서 “난 동성애자가 싫어”라는 반응보다 더 한 혐오발화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반응은 자신을 합리화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커밍아웃을 통해 발생하는 관계에선 단순히 그런 식으로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고백했을 때, “난 이성애자라서”와 같은 반응은 “네가 트랜스라서 싫어” 혹은 “네가 동성애자라서 싫어”, “네가 퀴어라서 싫어”라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것과는 별도로 자신의 정체성은 모든 것의 원인으로 여겨지고 상당한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된다. “난 이성애자라서 싫어”라는 말은 ‘쿨’함은 있어도 어떻게 관계 맺고 소통할 지에 대해선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고 현재로선 별로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심리의 반영으로 다가온다. 이럴 때 이런 대답은 ‘명백한’ 트랜스혐오 발화와 별다른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헨리 루빈의 글에 눈물표시 200만 개를 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 지점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낙인도 자기 부인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정체성이 가지는 의미로 인해 모든 걸 망설이는 상황. 루인에게 연애와 그것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의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뭔가 결론이 이상하다-_-;;;;;)

연애와 트랜스

트랜스섹슈얼로서 누군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건 “날 걷어차”라고 적은 종이를 등에 붙이고 초등학교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헨리 루빈 “(트랜스섹슈얼) 남성처럼 읽기”

요즘 가장 자주 중얼거리는 말이다. 최근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이 문장에 밑줄 긋곤, 눈물표시(ㅠㅠ) 200만 개를 달고 싶었다.